제주의 숲을 가다 1

한라산 둘레길로 향하다.

by오션펌킨

오늘 여행은, 귀신에 홀린 것 같은 오싹함을 경험한 하루를 이야기하려 한다.

어제 하루 종일 비바람이 몰아치던 제주의 모습은 오간데 없이 청명한 하늘과 산뜻한 공기가 여행하기 좋은 날이었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새벽같이 눈을 떠 조심스레 배낭을 들고 숙소를 나와 버스터미널로 갔다. 외부 활동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비바람이 심해서 카페에서 세 시간을 보내며 계획한 여행을 실현하기 위해 당차게 출발했다.

그런데, 여행 계획의 허수를 미쳐 확인하지 않았던 것을 간과했었다. 평소라면 AI의 도움을 받더라도 더블 체크를 반드시 했었는데, 한라산둘레길 여행을 계획하면서 한껏 들떠 있었던 것인지 AI가 안내하는 것들을 검증 없이 수용하여 여행 경로를 결정했다.

시작부터 잘못된 위치였던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산길은 어디든 연결되어 있다는 어리석은 믿음을 따라 마냥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갔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찔하기까지 하다. 혹여 그곳에서 자칫 부상이라도 당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한라산탐방소 연락처가 쓰여있는 송신탑에서 전화를 했었지만 연결도 되지 않았었다. 겁 없이 더 깊이 숲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걸어갔던 그때의 내가 지금도 실감 나지 않는다.

우선, 여행의 시작은 국도 1131번의 어딘가 수악교라는 이정표가 있는 버스정류장에서부터였다.

"수악길입구" 정류장에서 하차하여 이승악 입구까지 걸어야 한다는 AI의 보고서를 믿고 망설임 없이 내렸다. 그러고 보니 버스 기사님이 버스를 세울 때 멈칫했던 것이 기억난다. 이곳에서는 사람이 잘 내리지 않는 곳이었던 것 같다. 찰나지만 의심해 볼 수 있는 순간은 있었다. 이승악 안내소까지 3km를 걸어야 한다고 했으니 걸었다. 내리막길인 것에 감사하며 첫 차를 타고 출발한 덕분에 여유롭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그런데 한참을 걸어 내려오다 만난 이정표는 "수악길"이었다. 내가 갈 곳은 "이승악 입구"였는데 한 치의 의심 없이 이정표가 있는 곳으로 가서 당당하게 들어갔다. 이제 시작이군~!!! 이라며 오늘 여행도 완주해 보리라 다짐하며 말이다.

숲 길은 정말 예뻤다. 어제 내린 비로 먼지가 씻겨 나가서 청량하고 산뜻한 느낌이었다. 숲 속 길을 걸으며 한창 들떴었다. 부모님께 안부 인사까지 전하고 응원까지 받으며 행복했다.

위 세 장의 사진을 보면서 의심이 없었던 그때의 나를 떠올려 본다. "이승악 입구"를 까맣게 잊고 있던 나는 발걸음 가볍게 숲 속 길로 향했다. 물오름 탐방로라고 쓰여 있는 가운데 사진 속 안내를 보면 물오름 둘레길은 순환길이다. 친절하게 안내가 되어 있는 내용도 확인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도 내 머릿속에는 가서 찾아보면 이승악과 연결된 길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물오름 정상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여느 오름처럼 인상 깊은 풍경이 펼쳐지지는 않았지만 탁 트인 전경이 속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다. 쨍한 햇볕 덕분에 제주의 바다까지 시야에 들어왔다. 이때 시간이 7시 정도였다. 부모님께 아침 인사하고 즐거운 하루를 기원했었다. 그리고 전망대 왼쪽으로 보이는 길로 들어가 한참을 걸었다. 숲 속으로 들어가 수풀들을 헤치며 열심히 걸었다. 유명하지 않은 오름이라서 이정표가 친절하지 않고 길이 정돈되어 있지 않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든 연결된 길이 나오겠거니 했는데, 반가운 마음에 뛰어나온 길은 원점이었다. 내가 처음 진입했던 그곳, "수악길 입구"였다.

무슨 일이지? 어리둥절했지만 다른 방법은 없었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 밖에. 일단 다시 국도를 걸었다. 날이 좋고 길이 좋아서 걸을만했다.

좋은 경험 했다 스스로 위안 삼으며 내려오던 중에 영화 속 여행자를 현혹하는 마법의 마을 같은 입구를 발견했다. 처음엔 들어가 볼까 했으나 정확한 표시가 없으면 함부로 들어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기서는 어떻게 현명한 판단을 한 것이었는지도 궁금하다.

국도를 따라 조금 더 내려오다 보니 숲 길 같은 곳을 만났다. 들어가 보고 싶었다. 한라산둘레길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이미 지도 앱은 정확한 신호를 주지 못하고 있는 곳이었다. 지도를 실행해도 방향을 표시하는 화살표는 그 자리에서 맴돌기만 할 뿐이었다. 그런데 그 길로 다시 빨려 들어갔다.

빨려 들어갔다는 표현이 맞다. 고민도 하지 않았다. 이 길이 맞는지, 혹시 이상한 곳이 나오면 어떻게 할지 일말의 고민도 없었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을 보면 나오는 장면이 떠올랐다. 아주 작은 불빛 하나만 보고 대자연의 속으로 들어갔다가 온갖 모험을 다 하고 다시 숲 속에서 주인공이 튕겨져 나오게 되는 장면이었다. 처음엔 겁을 먹고 인간을 경계하던 숲 속의 모든 생명체들이 주인공이 온순한 인간임을 알아채고 장난치고 놀아주다가 내보내 주는 상황의 장면 말이다.

한참을 숲 속에서 길처럼 보이는 곳만 보면 따라 들어갔다. 올레길 표식 같은 빨간 리본이 보이면 그 방향으로 무조건 나아갔다. 어차피 사람이 다녔던 길인 듯하니 가다 보면 출구가 나오리라.

믿었다. 육지에서 아빠와 산을 탈 때면 해 주시던 말씀을 상기시키며 일단 길이라 판단되면 걸었다. 어차피 뒤돌아 나가도 걸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디가 되었든 연결되는 지점만 찾아서 나가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하늘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름드리나무들이 빽빽하게 숲을 이루고 있는 곳을 한참 걷다 보니 저 끝에 하늘이 보였다.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그 빛만 따라 걸었다. 마지막에 수풀을 걷고 나오자 바로 눈앞에 새로운 이정표가 보였다. 어찌나 반가운지... 하지만 반가움도 잠시, 이곳이 어디인지 알아야 할 것 같아 정신을 차려 보았다.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데 바스락 소리가 났다. 등산객이겠거니 했는데 느낌이 달랐다.

몸이 굳은 채로 눈만 움직이면서 주위를 경계했다. 그런데 어이없는 장면을 목격했다.

인간인 나에 대한 일말의 경계도 없이 풀을 뜯고 있는 녀석이 있었다. 사슴이라 생각했었는데, 나중에 목격담을 이야기해 줬던 지인의 말로는 노루라고 했다. 사슴이었다면 더 신비로웠을까.

인간을 경계하지 않는 동물이 우리에 갇혀 있는 것도 아니고, 저 멀리 풀 뜯는 소리가 들리는 위치에서 나와 함께 있다는 것에 신비로움까지 느꼈다. 나무꾼이 신선들이 있는 동굴 안으로 들어갔을 때의 기분이 이와 같았을까 싶었다.

인기척이 전혀 없는 거대한 숲 속에서 홀로 길을 찾아 헤매다가 만난 생명체가 사슴, 아니 노루였다니. 넋을 놓고 바라보며 세상에 대한 경계를 풀고 나도 잠시 쉬었다.

배낭에 싸가지고 온 간식을 꺼내어 먹고 재정비를 했다. "이승악 입구"를 찾기 위해 지도 맵을 켰더니 처음 출발했던 버스정류장에서의 거리와 같았다. 이건 또 무슨 경우일까?

아직 오전 10시가 조금 넘었을 뿐이다. 오전 중에는 "이승악 입구"까지 갈 수 있겠지. 그렇게만 된다면 오늘 여행 일정은 이승악 완주로 마무리하면 된다고 합리화하며 다시 길을 찾아 나섰다. 이번엔 지도 맵이 정상으로 작동을 해주어서 안심을 할 수 있었다. 나의 선택에 확신을 주듯 가던 중에 만난 안내판은 나를 현혹시켰다. 분명 나의 위치에서 길을 따라 올라가면 이승악 오름 정상을 만날 수 있다는 내용의 그림이었다. 반갑고 기뻤다. 내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과 결국 가고자 했던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정말 뿌듯했다. 아빠를 따라 산행을 하면서 배웠던 여러 가지 것들을 나 혼자 여행하면서 실행해 보고 성취해 낸다는 것이 좋았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면 아빠와 나눌 이야기가 많아질 것에 가슴 벅찼다.

이번엔 정확한 이정표를 보고 따라 들어갔던 것인데, 생각과 같지 않았다.

수악주둔소의 역사적 의미와 장소를 둘러보며 잠시 묵념을 했다. 올레 18구간에서 만났던 주정공장수용소 4.3 역사관에서 받았던 느낌과 같았다. 묵직한 무언가가 단전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곳에 묻혔을 수많은 영혼들을 위로하며 감사를 전했다. 당신들의 용기로 후손들이 지금처럼 부유하게 잘 살고 있다고, 그 뜻을 결코 잊지 않겠다고 홀로 세상 진지하게 기도를 했다.


견고하게 쌓아놓은 돌벽을 방패 삼아 적들과 무수한 싸움을 했을 그들을 생각하며 주변을 돌아보고 나의 길을 찾기 위해 그곳을 빠져나왔다. 빨간색 리본이 곳곳에 묶여 있길래 열심히 그곳을 향해 걸었다. 다행히 사람들이 무수히 밟고 지나간 흔적들이 가득했다. 길이구나 싶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걷고 또 걸었다. 하지만 "이승악" 정상은 찾을 수가 없었다. 분명 연결되는 길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또다시 지도 맵은 말을 듣지 않았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도 알려주지 못했다. 아... 왔던 길을 돌아 내려가야 하다니... 망연자실.

산행을 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길을 가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잘못 들어간 길을 다시 돌아 나오는 것은 망설여진다. 왜인지 설명이 되지 않지만, 어떻게는 앞으로 전진해서 길을 찾아내면 그 쾌감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이 기쁘다.

여기서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돌아 나가자. 잘못 왔다면 돌아가면 된다. 인생사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잘못된 선택을 했다면 원점으로 가면 된다. 진정하자. 스스로를 다독이고 돌아 나와 국도를 걸었다. 새벽과는 다른 온도로 시간이 많이 지나갔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부디 정오가 되기 전까지는 목적하는 곳에 도달할 수 있기를 바랐는데, 쉽지 않을 것 같다.

국도 1119번을 따라 편하게 내려오기만 했어도 되는 곳을 나는 두 번이나 샛길로 빠져서 목적지와 멀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편편한 찻길을 걷기보다는 청량한 숲 길을 걷고 싶다는 마음이 컸고, 산길은 어디든 이어진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숲 길처럼 보이면 무조건 진입했던 무모한 선택이었지만 억울하지는 않았다. 덕분에 쉽게 할 수 없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승악 입구"까지 도착했다. 이때 시간이 12시가 조금 넘은 때였다. 정상에 올라가 점심을 먹자고 생각하며 출발선에 섰다.

평소 건강한 노후를 위해 부지런히 등산을 하는 부모님 덕분에 좋은 유전자를 물려받아 산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육지에서 높은 산은 다녀본 경험이 있었고 산악인이라고 불려도 부끄럽지는 않을 정도라 스스로를 평가했었다. 하지만 한라산은 달랐다.

두 번이나 이름 모를 숲 속에 자발적 유기가 되는 경험을 하면서 처절한 고독을 느껴보았다.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긴 시간 산행을 하고 오던 아빠의 고독이 이입되면서 갑자기 울컥하며 눈시울이 붉어졌었다. 동네 수리산과 관악산은 모르는 길이 없을 정도로 누비고 다녔던 아빠였지만 그 경지에 오르기까지 헤매고 고립된 경험이 없었겠는가. 도심 속 산이긴 하지만 그래도 산세가 험하고 깊은 곳이라 안전을 보장할 수는 없다.

그렇게 산을 하루 종일 걷다가 오면 진이 빠지고 입맛조차 없을 때가 있다. 그런데 아빠는 오랜 시간 그렇게 산을 다녔다. 마냥 산이 좋으신가 싶었다. 몸은 힘들지만 마음이 편한 것을 알기 때문에 아빠를 충분히 이해한다고 여겼었다. 그런데 숲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아빠 때문에 눈물이 났다.

분명 아빠도 그때의 나와 같은 두려움과 공포를 경험했던 적 있었을 텐데, 그럴 때 아빠는 누구에게 의지하고 그 심정을 털어놓았을까? 아마도 혼자 삭이고 가슴에 묻었을 것이다. 그 마음을 생각하니 더 가슴이 무너졌다. 가족이지만 곁에서 함께 사는 가족이 있지만 그 고독은 철저히 혼자 겪어냈을 것이다.

그 마음을 생각하니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눈물이 멈추질 않는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을 것이다. 건강하게 함께 걸어 여행할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을 것임을 안다. 그러니 부지런히 추억을 쌓아가자. 내 가슴에 후회의 멍이 들지 않도록.

새롭게 이승악을 오르기 시작하면서 그 긴 길 위에서 다짐하고 또 다짐을 했다.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