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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람이 불어 걸을 수가 없어서...

by오션펌킨

제주는 여행자로만 다녀갔던 곳인데, 지인이 사는 곳이 되니 여행 중 찾아갈 수 있는 곳이 생겨 새롭다. 혼자 하는 여행은 자신과의 대화에 집중할 수 있어 좋다. 그러나 3, 4일 정도 홀로 여행을 하고 나면 낯선 이와의 대화도 반갑게 느껴진다. 그런데 취향이 같은 지인이 있어 만날 기회가 생기니 색다른 기분에 신이 났다.

15일 내내 빡빡하게 짜놓은 일정이 제주의 비바람으로 인해 진행이 어렵게 되어 지인에게 연락을 했더니 흔쾌히 오라고 허락을 했다. 아침부터 가벼운 발걸음으로 약속 장소로 출발했다.

하늘은 파랗게 밝은데 빗방울은 떨어지고, 바람이 거세게 불어 우산도 무용지물이었다. 사진으로 보면 멋진 하늘인데, 현실은 사진과 같지 않아 신기할 따름이었다.

약속장소로 가는 중에 제주동문시장이 있어서 일부러 들어갔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시간대에 왔던 곳이라 한산한 모습은 낯설게 느껴지긴 했지만 제주에 올 때마다 들러서 그런지 자주 방문했던 곳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 파악이 되었다. 가족여행 때 와서 회를 떴던 곳, 한라산에서 먹을 간식으로 오메기 떡을 샀던 곳, 야시장이 열리던 곳, 집에 돌아갈 때 지인들에게 줄 선물을 샀던 가게 등의 위치가 한눈에 들어왔다. 입구가 열 개가 넘는 제주동문시장은 사람들이 많을 때는 입출구를 찾지 못해 엉뚱한 곳에서 헤맬 수가 있다. 이렇게 사람이 없는 때에는 헷갈릴 일이 없을 듯하다.

약속 시간 전에 올레 18구간의 일부를 걸어볼 생각으로 서부두쪽을 향해 걸었다. 올레 18구간의 종착점인 김만덕기념관 앞에서 역방향으로 출발해서 4, 5km 정도 걷다가 지인의 가게로 갈 계획을 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걷기 시작했지만 빗방울이 떨어지면서 날씨요정의 장난이 예상되었다.

서부두는 몇 년 전에 부모님과 차로 제주 여행을 하고 육지로 돌아가는 때에 배를 타기 위해 왔던 기억이 있다. 엄청 큰 배 안으로 차와 사람들이 꾸역꾸역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감탄했었다. 완도까지만 타고 가는 배였지만 새로운 경험이었다.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장소여서 그런지 그 옆을 지나갈 뿐인데도 기분이 좋았다.

서부두를 지나서 걷는 중에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자 제주도민들이 앞장서서 만든 역사관이 웅장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현재 제주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곳이 많아 관광자원이 풍부한 것으로 인식되지만 과거에는 비운의 땅이었다. 육지에서 유배를 보내면 돌아오지 못하는 곳이었고, 환경적으로도 사면초가에 몰린 민간인들이 학살을 당하는 아픔이 있는 곳이었다.

제주도 관광지로 개발이 되면서 예전의 모습들이 사라지고 역사의 현장들이 훼손되다 보니 역사적 장소를 보전하여 그 아픔을 기억할 수 없어서 역사관을 지어놓은 듯했다.

민간인 학살과 동족 간 살인이 일어났던 과거는 매번 상기시켜 다시는 같은 일이 번복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할 일이다. 평화로워 보이던 올레 18구간을 걷다가 만난 역사관은 다소 생뚱맞은 느낌이었다가 그 뜻을 읽고 나서 숙연해졌다. 잠시나마 그곳에서 묵념을 하고서 발길을 돌렸다.

서울의 벽화마을로 "이화마을"이 있는 것처럼 올레 18구간 중에 만나는 마을에는 벽마다 의미 있는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다. 벽화를 따라만 걸어도 올레길을 걸을 수 있을 것 같은 정도다. 마을로 진입하는 오르막길을 올라가면서 뒤를 돌면 서부두의 풍경이 펼쳐진다. 마을로 깊이 진입할수록 바다가 잘 보이는 기이한 현상에 매료되어 힘든 줄 모르고 오르막을 올랐다. 이 길 끝에서 만나는 작은 사라봉까지 가기로 계획을 했으나 우산을 펼 수도 없는 정도의 바람 세기로 사라봉 입구까지 가서 머뭇거리다가 가까운 카페로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바람도 거셌지만 구름이 까맣게 하늘을 가려서 아침 9시인데도 마치 해지기 직전의 어둑한 느낌이 들어서 작은 봉우리였지만 산을 오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자주 가던 곳이라면 또 모를까, 초행인데 어떤 환경인지 모를 곳을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지도 검색을 통해 일찍 영업을 하는 카페를 검색해서 그곳까지 우산도 펴지 못하고 비바람 맞으며 걸어갔다.

다행히 카페는 아침 7시부터 영업을 하는 곳이었다. 온라인카지노도 메뉴에 있었고 오랜 시간 앉아 있어도 눈치 주지 않는 구조로 인테리어가 되어 있었다. 쾌적한 환경에 커피 맛도 좋은 카페를 찾은 것에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아직 행운의 여신은 내 편.

약속 시간까지 멍 때리기를 하다가 가야지 했는데, 자연스럽게 지도를 펼치게 되었고 지도를 살피다가 다음 날 여행계획까지 마무리했다. 날이 좋을 것으로 간주하고 15일간 올레길을 숙소 가까운 곳에서 시작해서 순차적으로 진행해 나가려고 했었다. 하지만 이틀째 비바람이 심하게 불어 외부 활동이 어려운 지경이 되고 나니 무리하게 일정을 진행할 수가 없게 되었다.

날이 좋은 날은 꽉 차게 하루 걷고 그렇지 않은 날은 실내에서 제주를 즐길 수 있는 여행 코스를 찾아야 했다. 다행히 다음 날은 비가 그친다고 하니 날 좋을 때 열심히 걸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도시와 해안선을 걷는 올레길도 좋지만 한라산둘레길을 걸으며 숲을 즐기는 것도 좋을 듯했다. 그리고 제주의 숲은 비가 와도 걸을 수 있는 곳이 있다. 오히려 비가 오면 걷기가 좋은 곳도 있다고 하니 찾아가 보자고 생각했다.

(그 계획의 결말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다음 글을 읽으면 알 수 있다.)

세 시간 정도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다음 날 여행계획까지 완벽하게 설계했다는 뿌듯한 마음을 안고 지인의 가게로 향했다. 가는 길이 꼬불꼬불하면서 정겹다. 관광지만 찍고 돌아가는 여행을 하다가 현지인들이 살고 있는 모습을 직접 보게 되니 오히려 제주가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제주에 하나밖에 없는 중앙지하상가 안에 있는 지인의 손뜨개인형 매장에 도착했다. 아기자기한 인형들이 가득 진열되어 있어 한참 인형 구경하기 바빴다.

대체로 손재주가 좋은 한국인들은 "핸드메이드"에 큰 의미를 두지는 않는다. 하지만 직접 제작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식 같은 작품이다. 일일이 손으로 만들어 진열해 놓은 작품들은 가격의 고하를 막론하고 애지중지하게 된다. 하지만 대중들은 취미 정도로 취급하곤 하기 때문에 공예인들은 그 무심함에 상처를 받기도 한다.

손뜨개 인형을 배우는 곳에서 알게 된 지인은 이미 제주에서 공방을 운영한 경력이 오래다. 디자인의 다양성을 위해 끊임없이 배우러 다니는 그가 육지까지 새로운 인형을 배우기 위해 왔다가 만나게 된 인연이었다. 농담처럼 "제주 가면 들를게요" 했던 말이 실현이 되고 나니 이 만남이 더 의미 있게 다가왔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식사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제주에서 추천할 만한 음식을 물었는데, 제주 사람인 그는 오히려 서울에서 핫한 음식들을 더 좋아한다고 답했다.

첨언하자면, 제주 사람들은 오메기떡은 질색이라고 했다.

결국 찾아간 곳은 만두 맛집이었다. 웨이팅까지 있는 집으로 제주에서는 굉장히 유명한 맛집이라고 한다. 음식이 무엇이 중요하랴. 지인과 만나 기나긴 이야기들을 하며 보낸 시간이 소중하지.

만두소는 제주산 흑돼지를 사용했다고 식당 주인이 보태어 주었다. 맛있는 수다, 즐거운 만두 식사였다. 만둣국 육수의 담백함과 깊은 맛은 지금도 기억이 난다. 찾아가서 먹을만한 메뉴였다.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