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것도 바카라이라고?

넓은 아트북의 세계

by사부작

파리에 어느 정도 적응했을 무렵이었다.

한국으로 귀임을 앞둔 언니가 마지막으로 만난 날 내게 말했다.


"밥 하고 치우고 그렇게 시간이 다 가더라. 결국 아무것도 배운 것 하나 없이, 나를 위해 시간을 쓰지 못하고 돌아가는 게 제일 아쉬웠어. 본인만의 시간을 꼭 가져."


누구보다 잘 지내고 똑 부러지게 아이들을 잘 키우고 돌아가는 언니였다.
그 말이 오래도록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대로 시간을 보내기에는 아까웠다.
언젠가 아이와 함께 쌓아온 이야기와 그림을 제대로 된 그림바카라으로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늘 품고 있었다.

어쩌면 지금이 그 시작일지도 몰랐다.
프랑스라면 미술의 나라니까. 뭔가 배울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파리 장식미술관 아트북 아틀리에 수업을 대기자로 신청했다.

한참 뒤 프랑스 남자 직원에게서 자리가 났다는 전화를 받았다.
'정말 내가 들을 수 있을까?'
불어는 인사와 계산 정도 외엔 한마디도 못했다. 그래도 미술은 그림으로 하는 거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번역기도 있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무모했다.


사실 아트북이 무엇인지도 정확히 몰랐다.
'아트가 들어간 바카라 정도겠지.'
생각이 단순했던 덕분에 오히려 겁 없이 수업을 신청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첫 수업.
밝은 에너지를 가진 덴마크 출신의 Anja 작가님이 수업을 맡고 계셨다.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분이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여러 다른 과목의 수업을 거친 뒤에야 알았다. 번역기를 사용하는 나를 가장 자연스럽게 이해해 주고, 끝까지 기다려 주며, 나의 조력자가 되어 준 유일한 선생님이었다.


첫 시간은 자기소개였다.

예상했던 순서였다.
파리에 오기 전 아들과 함께 만든 그림바카라 여러 권을 챙겨 갔다. 한국어와 영어가 함께 담긴 바카라, 그리고 그것을 프랑스어로 번역한 종이, 그림바카라을 바탕으로 만든 프랑스어 영상까지 준비했다.
더듬더듬 불어로 자기소개를 했다.
그저 불어를 못하는 동양인일 뿐이었다.
그런 나에게 수강생들은 따뜻한 격려와 박수를 보내 주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자기소개가 시작되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번역기로 내용을 확인해 보니, 그냥 취미로 온 사람들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미술계에서 활동해 온 작가, 화가, 공예가, 북아티스트….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내가 감히 이 수업을 들어도 되는 걸까.'
아까 받았던 박수가 점점 민망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우리는 도서관 안의 '비밀의 방'으로 안내받았다.


장식미술관 도서관 안에는 누구나 들어갈 수 없는 희귀 서적 열람실이 있었다. 예약해야만 들어갈 수 있고, 고서 전문가가 옆에서 바카라을 지켜보는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장 뒤뷔페를 만났다.

그의 원본 판화가 담긴 바카라이 내 앞에 놓였다.


엽서처럼 보이는 그림들. 이해할 수 없는 형태들. 손바닥만 한 바카라도 있었고, 사람 상반신만 한 바카라도 있었다. 어떤 것은 접힌 종이 한 장뿐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바카라이었다.

놀라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병풍처럼 펼쳐지는 일본 바카라. 나무로 만든 표지.

천 위에 그림을 입힌 바카라.


그 바카라만을 위한 천 케이스와 종이 상자.


영수증과 엽서만 모아 만든 개인 파일북.

커다란 천 주머니 안에 여러 권의 작은 바카라이 들어 있는 작품.



어떤 것은 그림인지 바카라인지조차 구분되지 않았다.

완벽하지 않은 바카라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 모두가 '바카라'이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이 수업은 그림바카라을 만드는 수업이 아니었다.

'바카라'이라는 개념 자체를 다시 배우는 수업이었다.
불어도 모르는데 너무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날부터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기술을 배우는 것이 아니었다. 내 안의 편견을 깨는 일이었다.
나는 바카라은 네모나야 하고, 페이지를 넘겨야 하고, 글과 그림이 있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 믿음이 얼마나 좁은 세계였는지, 파리의 첫 아트북 수업은 조용히 보여 주었다.


학기 내내 나는 무슨 바카라을 만들어야 할까 하는 고민 이전에 나 자신의 편견을 허무는 싸움을 해야 했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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