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에 있다는 것의 의미
아무도 밀턴의 말을 믿지 않았다. 집 뒷마당에 UFO가 추락했고 외계인이 나타났다고 아무리 말해도 사람들은 진지하게 듣지 않는다. 그가 노인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가 무엇을 보았는지보다 그의 기억이 온전한지를 의심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기보다 이제 혼자 살아도 괜찮은지를 걱정한다.
영화 〈Jules〉를 보면서 나는 그 장면들이 이상하리만큼 서러웠다. 아무도 그의 말을 믿어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슬펐다.
나이가 든다는 건 조금씩 자기 말에 대한 신뢰를 잃어 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이야기하면 “그랬구나”보다 “정말?”이 먼저 돌아오고, 새로운 일을 해 보겠다고 하면 “왜?”보다 “괜찮겠어?”를 듣는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더 자주 걱정하고, 대신 판단하려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스스로에게도 묻게 될 것 같다. 내 기억이 맞을까. 내 판단을 믿어도 될까.
〈Jules〉에는 그런 사람들이 나온다. 혼자 사는 노인들. 자녀도 있고 이웃도 있지만, 자기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할 수 있는 상대는 많지 않다. 걱정은 넘치는데, 그 안에서 그들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진다.
결국 밀턴의 집에 모여든 것은 비슷한 처지의 노인들이었고, 그들 사이에 외계인 Jules가 있었다. 말도 못 하고, 생김새도 다르고,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존재. 그런데 그들은 Jules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음식을 건네고, 옷을 입히고, 말을 걸고, 자기 이야기를 한다.
Jules도 그들을 판단하지 않는다. 말이 맞는지 따지지 않고, 기억이 정확한지 의심하지 않는다. 그저 바라보고, 곁에 있다.
나는 그게 Jules가 가진 가장 큰 능력처럼 보였다. 자기 자신조차 믿어도 될지 불안한 사람 곁에 아무 조건 없이 머물러 주는 것. Jules는 말 한마디 없이 그들에게 힘이 되었다.
영화를 보다가 오래전 엄마의 부탁이 떠올랐다.
엄마는 돌아가시기 전, 결혼하기 전까지는 아무리 바빠도 하루 한 끼는 꼭 아빠와 같이 먹으라고 했다. 내가 밥을 먹지 않아도 괜찮으니 식탁에는 함께 앉아 아빠와 이야기를 나누라고. 언젠가 결혼해 내 가정을 꾸리더라도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아빠와 밥을 먹으라고 했다.
나는 그 부탁을 지켜 왔고, 그 뜻도 안다고 생각했다. 혼자 남을 아빠가 걱정됐겠지. 혼자 밥 먹게 하지 말라는 뜻이었겠지. 그런데 〈Jules〉를 보고 나서야 엄마가 왜 굳이 “네가 먹지 않아도 된다”고 했는지가 마음에 와 닿았다.
중요한 건 밥이 아니었다. 옆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하루 한 번이 언젠가 일주일에 한 번이 되더라도, 그 시간이 사라지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아버지에게 필요한 음식을 챙기는 일과 아버지 옆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일은 비슷해 보여도 다르다. 하나는 돌봄이고, 하나는 동행이다.
그 생각을 하다 보니 외할머니가 혼자가 되신 뒤로도 나는 그런 시간을 일부러 만들고 있었다. 시간이 나면 찾아가 할머니와 고스톱을 쳤다. 치매 예방에 좋다는 그럴듯한 명분을 붙였지만, 사실은 할머니가 고스톱을 좋아하시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과일을 사 가서 같이 먹고, 때로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도 맛보여 드리고 싶어 포장해 가곤 한다.
특별한 일을 한 건 없다. 할머니가 좋아하는 걸 할머니와 같이 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온전한 둘만의 시간은 어느새 나에게도 행복이 되었다.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할머니의 삶과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이 특별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엄마가 남긴 부탁은 내가 ‘같이’라는 말을 오래 중요하게 여기며 살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은 많은 도움을 받게 된다. 병원에 데려가 주고, 약을 챙겨 주고, 위험한 일은 못 하게 한다. 사랑해서다. 그런데 사랑이 걱정의 얼굴을 하고 나타나면, 그 사람을 너무 빨리 약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하지 마.” “위험해.” “내가 할게.” “그 얘기 전에 했잖아.”
우리는 친구에게는 쉽게 하지 않을 말을 부모에게는 쉽게 한다. 친구가 새로운 걸 해 보겠다고 하면 왜 하고 싶은지 묻지만, 부모가 무언가를 하겠다고 하면 위험부터 계산한다. 친구의 이야기는 끝까지 들으면서, 부모가 했던 얘기를 또 하면 이미 안다고 말을 자른다. 가까울수록 그 사람을 잘 안다고 생각하고, 바로 그 확신 때문에 더는 묻지 않는다.
요즘 나는 항암치료를 받는 아버지와 이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보낸다. 병원에 같이 가고, 식사를 챙기고, 몸 상태를 살핀다. 처음에는 내가 아버지를 돌보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갈수록 반대의 순간이 자주 온다.
얼마 전 복용약이 달라진 뒤 아버지는 며칠 동안 입맛을 잃었다. 식욕도 기운도 없었다. 뭘 해 드리면 조금이라도 드실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제철 게를 사다 쪘다. 살을 하나하나 발라내고, 야채를 잘게 다져 게살 계란죽을 끓였다. 갓 담은 겉절이를 곁들인 조촐한 식단이었다.
정성이 닿은 건지, 마침 식욕이 돌아올 때가 된 건지는 모르겠다. 그날 이후 아버지는 조금씩 다시 드시기 시작했다. 입맛이 돌아오자 기운도 따라왔다.
며칠 뒤, 한결 기력을 찾은 아버지가 환하게 웃으며 내 손을 꼭 잡았다.
“고맙다.”
아버지는 부쩍 고맙다는 말을 자주 하신다. 행복하다는 말도.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되려 아버지가 내게 무언가를 가르쳐 주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한 일은 죽 한 그릇을 끓인 것뿐인데, 아버지의 감사는 어느새 내 감사가 된다.
병은 우리 가족이 원하지 않았던 시간이다. 그런데 그 시간 때문에 나는 아버지를 더 자세히 보게 됐다. 무엇을 먹는지보다 무엇을 맛있어하는지를 보고, 아픈지를 묻다가 오늘 기분은 어떤지도 묻는다. 아버지를 돌보면서,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아버지라는 사람을 알아 가고 있었다.
그러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서로를 다른 행성에서 온 외계인처럼 바라봐야 하는 건 아닐까.
외계인을 처음 만났다면 우리는 그를 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표정 하나를 오래 들여다보고, 작은 행동에도 이유를 궁금해할 것이다. 모르니까 보고, 모르니까 묻는다.
그런데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는 정반대로 행동한다.
“우리 아빠는 원래 그래.” “엄마는 그런 거 싫어해.”
평생을 함께했다는 이유로 이미 다 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아는 아버지는 수십 년 동안 내가 만들어 온 ‘아버지에 대한 설명’일 수도 있다. 오늘의 아버지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무엇에 행복해하는지, 지금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지는 다시 묻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가족이라고 같은 행성에 사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 아버지에게는 내가 살아 보지 못한 아버지의 우주가 있고, 엄마에게는 내가 끝내 다 알지 못한 엄마의 우주가 있었고, 할머니에게도 내가 알 수 없는 긴 생의 우주가 있다. 그 우주를 다 이해할 수는 없다. 그래도 계속 궁금해할 수는 있다.
Jules도 그랬다. 그는 세 노인의 삶을 해결해 주지 않았다. 늙음을 되돌려 주지도, 외로움을 없애 주지도 않았다. 그들의 말을 듣고, 바라보고, 곁에 있다가 필요할 때 그들을 지켜 주었다.
우리말에는 묘한 짝이 있다.
지켜보다, 그리고 지켜주다.
누군가를 지켜 준다는 건 그에게 닥칠 위험을 대신 치워 주는 일만은 아닐 것이다. 그 사람이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오래 지켜봐 주는 일, 그 사람의 말을 아직 중요한 이야기로 들어 주는 일, 약해졌다고 그의 삶을 대신 결정하지 않는 일. 그리고 가끔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옆에 앉아 있는 일.
엄마가 남긴 부탁도 결국 그거였던 것 같다.
엄마가 말한 하루 한 끼는 하루에 한 번 아빠의 세계에 찾아가라는 말이었고, 일주일에 한 번은 내가 다른 삶을 꾸리더라도 그 세계의 문을 계속 두드리라는 말이었으리라. 아빠의 세계에서 내가 사라지지 않게, 그리고 내 세계에서 아빠가 사라지지 않게.
그래서 나는 아빠를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먼저 판단하기보다 듣고, 지켜 주기 전에 오래 지켜보고 싶다.
밀턴 곁의 Jules처럼.
서로 다른 행성에 살아도, 같은 식탁에는 앉을 수 있으니까.
〈Jules〉 (2023)
마크 터틀타웁(Marc Turtletaub) 감독 · 벤 킹슬리 주연
87분 · 코미디/드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