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 좋아하고, 덜 표현하고, 더 계산하는 법
요즘 내 알고리즘이 이상한 건지, 세상이 정말 이런 이야기로 가득해진 건지 모르겠다.
유난히 사람들에게 정신 차리라는 말이 많다.
특히 마흔 언저리의 사람들에게 그렇다. ‘영포티’니 ‘늙크크’니 하는 이름들이 생겨났고, 결정사 유튜브를 보다 보면 마흔이 넘은 여성이 원하는 배우자의 조건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제법 호된 질바카라을 받는다.
“아직도 현실을 모르네요.”
“눈을 낮추셔야죠.”
“자기 객관화가 안 되어 있어요.”
물론 현실은 현실이다.
나이가 들면 만날 수 있는 사람의 범위가 달라질 수도 있고, 내가 가진 조건과 원하는 상대의 조건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면 원하는 관계를 만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결혼을 중개하는 회사라면 그 가능성을 현실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그들의 일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그다음부터가 이상하다.
“현재 말씀하신 조건으로는 매칭이 어렵습니다.”
여기까지는 정보다. 그런데 그것이 “그 나이에 아직도 그런 사람을 바라세요?”가 되는 순간, 정보는 훈육에 가까워진다.
원하는 상대를 만나기 어렵다면 만나기 어렵다고 말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그래도 그 조건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면 그냥 그렇게 살게 두면 되는 것 아닌가.
바라는 것이 많은 채로 결국 혼자가 된다면 그 결과도 본인이 감당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 전에 굳이 그 사람의 욕망까지 교정하려 드는 걸까.
원하는 것을 모두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가와 원하는 것을 원해도 되는가는 다른 이야기다.
비슷한 불편함은 연애와 심리를 다루는 콘텐츠에서도 느낀다.
누군가를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내지 말라고 한다. 먼저 연락하지 말고, 너무 잘해주지 말고, 적당한 거리를 두고, 때로는 상대가 나를 잃을 수도 있다고 느끼게 해야 한다고 한다. 너무 잘해주면 호구가 되고, 잡힐 듯 잡히지 않아야 매력이 유지된다는 말도 흔하다. 이런 조언들이 모두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관계에는 경계가 필요하다. 나를 잃어가면서까지 누군가를 사랑할 필요는 없고, 같은 상처를 반복한다면 내가 어떤 관계 패턴을 가지고 있는지도 돌아봐야 한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 사람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심리의 언어가 사람에게 마음을 감추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애착이론은 내가 왜 관계에서 이런 반응을 하는지를 이해하기보다 ‘회피형을 거르는 법’으로 소비되고, 경계를 세우라는 말은 ‘먼저 연락하지 않는 법’이 된다. 자기 존중은 어느새 내가 더 좋아하면 진다는 이상한 승부의 언어와 섞인다.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생각해본다.
그 사람이 좋아서 잘해주고 싶었고, 내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상대에게 부담이 되지 않는 선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진심을 다했다. 그런데 상대는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때 내가 배워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다음에는 덜 좋아해야 하는 걸까. 마음을 너무 일찍 보여주지 말아야 하는 걸까. 아니면 내가 잘해줘서 매력이 없어졌다고 생각해야 할까.
나는 오히려 다른 것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진심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까지 움직일 수는 없다는 것.
나는 좋아할 수 있지만 상대는 나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내 마음이 닿지 않았을 때 내려놓는 것. 아마 관계에서 배워야 할 것은 그런 종류의 수용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배신당했을 때도 비슷하다.
내가 진심을 다했는데 상대가 신뢰를 저버렸다면 그건 우선 신뢰를 저버린 사람의 잘못이다. 그 사실을 인정한 뒤에야 나는 왜 그 관계에 오래 머물렀는지, 어떤 신호를 지나쳤는지, 다음에는 어디에서 멈출 것인지를 돌아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그 순서를 뒤집는다.
네가 너무 퍼줘서 그렇다거나, 애정결핍 때문에 그렇게까지 했다거나, 자존감이 낮아서 상대에게 매달렸다는 식으로.
때로는 맞는 분석일 것이다. 하지만 모든 진심에서 결핍을 찾아내고 모든 헌신에서 낮은 자존감을 발견하기 시작하면, 잘해준 사람이 자신이 잘해준 것을 후회하게 된다. 사랑했던 사람이 사랑했던 자신의 방식부터 의심한다.
그리고 다음에는 조금 덜 좋아하고, 조금 덜 표현하고, 조금 더 계산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것을 성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나는 가끔 그게 정말 성숙인지 궁금하다. 상처받지 않는 방법 하나를 더 익힌 것은 아닌지.
요즘의 연애 콘텐츠를 보다 보면 관계를 잘하는 법보다 관계에서 손해 보지 않는 법을 배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연락하는 시간도, 답장의 속도도, 표현의 양도 전략이 된다. 선물도 애정도 때로는 침묵과 부재마저 상대의 반응을 끌어내기 위한 기술이 된다.
그렇게 관계의 목적이 조금씩 바뀐다.
상대를 사랑하는 것에서 상대의 관심을 유지하는 것으로.
얼마만큼 다가가야 나를 그리워하는지, 얼마만큼 물러나야 나를 잃을까 불안해하는지를 계산하기 시작하면 내 마음을 전하는 대신 상대의 반응을 설계하게 된다.
사랑의 설렘도 비슷한 방식으로 오해되는 것 같다.
처음에는 답장 하나에도 심장이 뛰고 상대의 작은 행동 하나에도 의미를 붙인다. 아직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다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되고 내일도 연락이 올 것을 알게 되면 불확실성은 줄어든다.
하지만 설렘이 줄어든 자리가 반드시 비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자리에는 익숙함과 신뢰, 편안함과 존중이 생긴다. 아플 때 약을 챙겨주는 일, 별일 없는 하루를 함께 보내는 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듣는 일. 함께 보낸 시간이 쌓이면서 생기는 의리도 있고, 이 사람 앞에서는 애써 괜찮은 사람이 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도 있다.
나는 그것들이 설렘에 못지않게 매력적인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처음의 설렘이 그 사람을 더 알고 싶게 만드는 힘이라면, 그다음에 생기는 감정들은 그 사람과 계속 함께 있고 싶게 만드는 힘에 가깝다. 전자가 관계를 시작하게 한다면 후자는 관계를 계속 선택하게 한다.
오래된 관계의 매력은 여기에 있다. 처음처럼 심장이 뛰지는 않아도, 수많은 시간을 함께 지나온 뒤에도 여전히 이 사람과 내일을 보내고 싶다는 마음. 그것은 설렘이 퇴색한 결과라기보다 관계가 다른 종류의 매력을 갖게 된 것에 가깝다.
그런데 불확실성을 매력이라고 믿으면 이런 변화는 쉽게 권태로 오해된다. 계속 설레기 위해서는 계속 조금씩 불안해야 하고, 잡힐 듯 잡히지 않아야 하고, 익숙해질 즈음 다시 거리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관계가 깊어지면서 생기는 매력을 경험하기도 전에 다시 처음의 감정을 찾아 나서게 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그래서 관계가 점점 피로해지는지도 모른다. 시작하기 전에는 사람을 판별해야 하고, 시작한 뒤에는 관심을 유지해야 하고, 익숙해지면 다시 설렘을 만들어야 하니까.
사랑을 지속하는 것과 설렘을 지속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생각해보면 내가 처음 느꼈던 불편함도 결국 여기로 돌아온다.
결정사에서는 나이에 맞게 욕망을 조절하라고 하고, 연애 콘텐츠에서는 너무 좋아하지 말라고 하고, 심리 콘텐츠에서는 상처받기 전에 자신을 보호하라고 한다.
각각은 그럴듯하다. 내가 피로한 것은 개별적인 조언보다 그 조언들이 끝없이 반복되는 방식인지도 모르겠다.
쇼츠 하나가 끝나면 비슷한 쇼츠가 나오고, 릴스를 넘기면 또 누군가가 사람을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눈다.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건가.
이 나이에 이런 사람을 원하는 게 우스운 건가.
먼저 연락하면 만만해지는 건가.
잘해주면 결국 질리는 건가.
알고리즘은 무엇을 믿으라고 직접 말하지 않는다. 비슷한 말을 계속 보여줄 뿐이다. 그런데 반복은 때때로 주장보다 강하다. 어느 순간 그것이 세상의 상식처럼 느껴지고, 나 역시 나를 그 기준으로 심사하기 시작한다.
그게 내가 요즘 이런 콘텐츠를 보며 느끼는 피로에 가까운 것 같다.
무언가를 배웠다는 느낌보다 조금씩 움츠러든다는 느낌.
나는 현실을 무시하자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좋아한다고 모두 사랑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진심이라고 해서 언제나 좋은 관계가 되는 것도 아니다. 사랑이라는 이유로 모욕을 견딜 필요도 없고, 상대가 원하지 않는 마음을 순애라는 이름으로 계속 밀어붙여서도 안 된다.
사람에게는 자신을 지키는 법이 필요하다.
다만 자신을 지킨다는 것이 마음을 덜 쓰는 사람이 되는 일은 아니었으면 한다.
어쩌면 관계란 애초에 어느 정도의 위험을 받아들이는 일인지도 모른다. 만나기 어려운 사람을 바라다가 혼자가 될 수도 있고, 더 많이 좋아했다가 거절당할 수도 있다. 믿었던 사람에게 실망할 수도 있고, 내가 건넨 마음이 같은 크기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 가능성을 완전히 없애고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배워야 할 것은 위험을 없애는 기술이 아니라,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다시 자기 삶으로 돌아오는 힘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원하는 것을 원했던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사랑했던 것을 후회하지 않고, 진심이었던 자신까지 틀렸다고 만들지 않으면서.
좋아할 때는 좋아하고, 그 마음이 닿지 않았을 때는 상대의 마음까지 내 것이 아님을 인정하는 것. 사랑할 때는 사랑하고, 존중받지 못할 때는 떠나는 것.
말로 적어놓으면 밀당보다 훨씬 단순하다. 실제로는 훨씬 어렵다. 기술이 아니라 감당하는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누군가를 만났을 때, 지난 사람에게 배운 두려움을 새 사람에게 미리 청구하지 않는 것.
나는 그게 꽤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상처받지 않는 법을 많이 배웠다.
이제는 상처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을 믿는 법, 마음이 언제나 같은 마음으로 돌아오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진심을 건네는 법도 조금은 배웠으면 좋겠다.
상처받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상처가 나를 덜 진실한 사람으로 만들지 못하게 하는 것.
요즘 내가 배우고 싶은 관계의 기술은 오히려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