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멀리 가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들

영화 <오디세이>를 보고...

byWONA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일이 점점 드물어졌다. 그런데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오디세이>만큼은 영화관에서 보고 싶었다. 기왕 큰 스크린 앞에 세 시간을 앉아 있을 거라면 내가 좋아하는 자리에서 온전히 집중하고 싶었다. 문제는 이 세계적인 거장의 영화는 역시나 연일 매진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온갖 스포일러들을 애써 피해 다니며 개봉하고 한참이 지나서야 마침내 영화를 보게 되었다.


기다린 보람은 있었다. 스케일에 놀라고, 긴장했다가 웃고, 또 마음이 아팠다. 희로애락을 오간 세 시간은 생각보다 짧았다. 그런데 영화는 끝났는데 생각이 끝나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도, 다음 날에도 몇몇 장면과 대사가 자꾸 되돌아왔다.


그중 이상할 만큼 오래 남은 것은 전쟁이었다.


오디세우스는 이타카의 왕이고, 페넬로페의 남편이며, 텔레마코스의 아버지다. 흥미롭게도 그는 애초에 전쟁에 나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한 전승에 따르면 그는 트로이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척을 하기도 했다. 밭에 소금을 뿌리며 광기를 가장했는데, 이를 의심한 팔라메데스가 어린 텔레마코스를 쟁기 앞에 내려놓자 본능적으로 쟁기를 돌렸고, 그렇게 연기가 들통났다는 것이다.


훗날 트로이를 무너뜨릴 만큼 영리했던 남자는 그 전쟁에 가지 않으려고도 지략을 썼던 셈이다.


그래도 그는 결국 떠났고, 전쟁은 10년 동안 이어졌다.


트로이 전쟁의 시작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야기는 더 기묘하다. 스파르타 왕 메넬라오스의 아내 헬레네가 트로이 왕자 파리스와 떠나자 그리스의 왕들과 영웅들이 트로이로 향한다. 그 밑에는 오래전 맺은 맹세와 명예, 복수, 신들의 이해관계까지 얽혀 있다. 누가 옳았는지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는 전쟁은 아니다.


다만 영화를 보면서 나는 다른 것이 궁금해졌다.


전쟁이 10년쯤 계속되면 사람들은 처음 싸우기 시작한 이유를 여전히 기억할까.


처음에야 분명 지켜야 할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다. 약속이든 명예든, 빼앗긴 무엇이든. 그런데 싸움이 길어지면 지키려고 시작한 싸움이 이기기 위한 싸움이 되고, 어느 순간에는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보다 지지 않는 일이 중요해진다.


트로이를 함락시킨 계바카라, 그 유명한 목마를 생각해 낸 사람도 오디세우스였다. 그는 역사와 신화에 영원히 이름이 남을 만큼 크게 이겼다.


그런데 그 승리가 이상하게 통쾌하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도시 하나가 무너졌고, 그 자신도 이미 10년을 잃었다.


누구를 위한 전쟁이었을까.


조금 더 정확히 묻자면, 그는 대체 무엇을 지키려고 이토록 많은 것을 잃었을까.


호메로스의 두 서사시는 그래서 묘하게 이어진다. <일리아스>가 트로이 전쟁의 한복판을 이야기한다면, <오디세이아>는 전쟁이 끝난 뒤 오디세우스가 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다.


전쟁은 끝났지만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나는 그 사실이 중요하게 느껴졌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일과 전쟁이 끝난 뒤 자기 삶으로 돌아가는 일은 전혀 다른 문제였을 테니까.


전쟁에 10년, 이타카로 돌아가는 데 다시 10년.


어린 아들을 두고 떠난 남자가 장성한 아들 앞에 다시 서기까지 20년이 흐른다. 그런데 그 긴 모험의 목적지는 새로운 왕국도, 또 다른 승리도 아니었다.


페넬로페와 텔레마코스가 있는 이타카.


집이었다.


처음에는 오랜 전쟁에 지친 사람의 당연한 향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영화가 계속될수록 '집'이라는 말이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그곳에는 전쟁 이전의 그가 있었다.


페넬로페의 남편이자 어린 텔레마코스의 아버지였던 사람. 아직 수많은 죽음을 보지 않았고, 지키지 못한 약속도 많지 않던 사람.


오디세우스가 그토록 돌아가고 싶었던 곳은 이타카라는 섬이라기보다 거기 두고 온 자기 자신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갈 수는 있어도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귀향길에서 만나는 존재들도 그래서 단순한 괴물이나 신으로 보이지 않았다.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에게 붙잡힌 오디세우스는 그를 속이고 눈을 멀게 한 뒤 빠져나온다. 여기까지는 또 한 번의 영웅담이다. 그런데 배가 안전한 곳까지 나온 뒤, 그는 굳이 자기 이름을 외친다.


너를 이긴 사람이 누구인지 기억하라고.


문제는 폴리페모스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아들이었다는 것. 아들의 눈을 멀게 한 자의 이름을 알게 된 포세이돈은 그 뒤로 오디세우스의 귀향을 끈질기게 방해한다.


이 대목이 마음에 걸렸다.


괴물을 이긴 것도 오디세우스였고, 그 승리 때문에 더 먼바다를 떠돌게 된 것도 오디세우스였다.


지략과 자존심, 세상에 자기 이름을 남기고 싶은 욕망. 트로이를 무너뜨린 그 힘이 이번에는 그를 이타카에서 멀어지게 했다.


누구에게나 그런 면이 있다.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성질이라고 해서 앞으로도 나를 좋은 곳으로 데려가리라는 보장은 없다. 한때 나를 버티게 했던 방식이 어느 순간 나를 지치게 하고, 앞으로 밀어준 욕망 때문에 정작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를 잊기도 한다.


어쩌면 문제는 내가 무엇을 잘하느냐보다, 무엇을 멈추지 못하느냐에 있을 때도 있다.


세이렌 장면이 오래 남은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나는 세이렌을 아름다운 노래로 뱃사람을 홀려 죽음으로 이끄는 존재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원래 이야기 속 세이렌의 유혹은 훨씬 교묘하다.


그들은 쾌락을 약속하지 않는다.


오디세우스의 이름을 부르고, 트로이에서 있었던 일과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알고 있다고 노래한다. 더 알고 싶은 사람에게는 지식을, 자기가 누구인지 확인받고 싶은 영웅에게는 그의 이름을 내민다.


그가 가장 약한 곳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이다.


키르케에게 미리 경고를 들은 오디세우스는 부하들의 귀를 밀랍으로 막는다. 그런데 자기 귀는 막지 않는다. 대신 몸을 돛대에 단단히 묶게 하고, 아무리 풀어달라고 애원해도 절대 풀어주지 말라고 명령한 뒤 노래를 듣는다.


나는 이 장면이 참 인간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듣고 싶었고, 알고 싶었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흔들렸다. 다만 그 순간의 자신에게 자기 운명을 결정할 권리까지 넘겨주지는 않았다.


욕망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욕망에 흔들릴 나를 미리 아는 것이 어쩌면 더 현실적인 절제인지도 모르겠다.


영화 속에서 세이렌의 노래를 풀어 말하는 대목도 귀에 남았다.


그 내용은 이랬다.


가장 원하는 것은 가장 가질 수 없는 것이고,

가장 가질 수 없는 것은 한때 가졌다가 잃어버린 것이라고.

그리고 그것은 지키지 못한 약속들의 노래라고.


잔인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가져본 적이 없는 것은 꿈꿀 수 있다. 언젠가 가질 수 있다고 믿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때 가졌다가 잃은 것은 다르다.


그게 어떤 것이었는지 너무 잘 안다.


그때의 온도도, 그 안에 있던 사람도, 그때의 나도 기억한다.


그래서 다시 원하는 마음에는 후회가 섞인다.


조금만 달라졌다면 지킬 수 있지 않았을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아직 곁에 있지 않았을까.


아무리 위대한 영웅도 시간은 이기지 못한다.


그 모든 신과 괴물을 이기고 이타카에 닿는다 해도 전쟁 전의 이타카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도 페넬로페도 달라졌고, 품에 안고 떠났던 아이는 어른이 되었다.


그러니 세이렌이 던지는 가장 잔인한 질문은 이것이었을지 모른다.


정말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게 맞느냐는 것.


그토록 집에 가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이상한 질문 같지만, 조금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내가 바라는 건 돌아가는 일 자체보다, 돌아가면 모든 게 예전 같으리라는 믿음일 때가 있다.


하지만 돌아가는 일은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없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렀다. 잃은 것은 정말 잃었다. 그리고 나 역시 그때의 사람이 아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큼 돌아가는 일이 두려운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도 오디세우스는 돌아간다.


나는 그 점이 좋았다.


되찾을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돌아가기 때문이다.


여기서 '집'이라는 말이 내게 조금 다른 뜻이 되었다.


집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곳이라서 집인 게 아니구나. 수많은 가능성 가운데 끝내 지키기로 고른 내 삶의 경계구나.


인간에게 어려운 것은 아마 둘 중 어느 쪽도 틀리지 않았다는 데 있을 것이다.

떠나고 싶으면서 돌아갈 곳을 원하고, 자유롭고 싶으면서 어딘가에 속하고 싶다. 지금의 삶을 사랑하면서도 살아보지 않은 다른 삶을 상상한다.


하지만 한 사람이 모든 삶을 살아볼 수는 없다.


무언가를 고른다는 건 고르지 않은 수많은 삶을 내려놓는 일이기도 하다.


성숙해진다고 세이렌의 노래가 덜 아름답게 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저 너머에 가 보지 못한 세계가 있고, 될 수도 있었던 또 다른 내가 있다는 걸 안다.


그런데도 어느 순간에는 돌아갈 곳을 고른다.


영화의 마지막이 그렇게 아름다웠던 것도 그래서였던 것 같다.


세 시간 동안 한 사람의 생을 통째로 지나온 기분이었다.


그 끝에 남은 사랑은 이미 여러 번 깨지고 흔들린 뒤의 사랑이다. 죽은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고 지나간 20년도 되돌릴 수 없다.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 역시 서로가 기억하던 그때의 사람들이 아니다.


그런데도 서로를 알아본다.


깨지고 변하고 낯설어진 뒤에도 다시 상대를 알아보는 일.


나는 그것이 사랑의 꽤 아름다운 형태라고 느꼈다.


삶은 사람을 바꾼다. 때로는 너무 멀리 데려가기도 한다. 그러니 돌아간다는 것은 20년 전의 두 사람으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다.


달라진 내가 달라진 당신 앞에 다시 서는 일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내게 남은 건 영웅의 모험담보다 오래된 질문이었다.


나는 지금 몇 개의 전쟁을 치르고 있을까.


돌이켜 보면 내게도 그런 싸움들이 있었다. 처음에는 분명 지키고 싶은 것이 있어서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기는 것이 더 중요해진 일들. 이미 처음과는 의미가 달라졌다는 걸 알면서도 내가 먼저 놓으면 진 것 같아서 오래 붙잡고 있던 것들.


그때의 나는 내가 무언가를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면 잘 모르겠다.


정말 지키고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지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


아마 그 둘은 생각보다 자주 닮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가끔은 승패보다 먼저 물어야겠다.


내가 지금 치르고 있는 이 싸움은 처음에 무엇을 지키려고 시작했는지.


그리고 아직도 그것을 지키고 있는지.


오디세우스는 전쟁에서 이겼다. 괴물을 이겼고, 바다를 건넜고, 끝내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난 뒤에는 그의 수많은 승리보다 그가 마지막까지 돌아가려 했다는 사실이 더 마음에 남았다.


사람은 왜 그토록 멀리 가고 싶어 하면서도 돌아갈 곳을 필요로 할까.


그리고 나는 꼭 그렇게 멀리까지 가 보고 나서야


무엇이 집이었는지 알게 될까.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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