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수 없기에 가능한 것들
며칠 전, 사주팔자를 보듯 사람의 지문으로 타고난 기질과 적성을 분석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이가 어떤 성향을 지녔는지, 무엇에 재능이 있는지, 부모와는 얼마나 잘 맞는지까지 살펴볼 수 있다고 했다. 비용이 적지 않은데도 자녀를 위해 검사를 받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고 했다.
그중에는 경제적으로 여유롭고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들도 많다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만한 사람들이 선택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이 흥미로웠다. 슬롯적 지위나 학력이 그 사람의 모든 판단을 보증해 주지는 않는다. 많은 사람이 선택한다는 사실과 그 선택의 근거가 충분하다는 사실은 다른 문제다.
그래도 사람들이 이런 분석에 끌리는 이유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가 무엇을 타고났는지 미리 알 수 있다면 그에 맞는 환경을 마련하고 교육의 방향을 정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기대할 수 있을 테니까. 아이를 더 잘 이해하고 싶은 마음에는 아이가 살아갈 미래를 미리 준비해 주고 싶은 바람도 담겨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알고 싶어 하는 걸까.
미래를 궁금해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내일의 날씨부터 몇 년 뒤의 삶까지, 우리는 아직 오지 않은 일들을 끊임없이 상상한다. 그 상상은 때로 기대가 되고, 때로 걱정이 된다. 중요한 문제일수록 알 수 없다는 사실은 더 크게 다가온다.
불안이 많은 사람들은 현재보다 과거나 미래에 더 오래 머무르곤 한다. 지나간 일을 되짚으며 후회하거나,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한다. 몸은 오늘을 살고 있는데 생각은 좀처럼 지금 이 순간에 머무르지 못한다.
나 역시 그런 시절을 겪었다.
불안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불안하기 때문에 준비하고, 조심하고, 더 나은 선택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마음이 너무 커지면 정작 지금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바라보지 못하게 된다.
한때 나는 사주나 타로점에 푹 빠졌었다. 꽤 많은 시간과 돈을 썼다. 어떤 이야기는 신기할 만큼 잘 맞았고, 어떤 이야기는 한참 뒤에 돌아보니 그럴듯하게 들어맞았다.
그때의 나는 미래가 무척 궁금했다. 지금의 선택이 옳은지,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바라는 방향으로 삶이 흘러갈 수 있을지 알고 싶었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은 내가 가장 불안했던 때이기도 하다.
어쩌면 나는 미래에 대한 답을 얻고 싶었다기보다, 답이 있다는 사실을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알 수 없는 것에 누군가 이름을 붙이고 설명해 주면, 적어도 잠시는 마음이 놓였으니까.
그런 시간을 한참 보내던 어느 날, 대학 시절 한 선배가 추천해 주었던 에크하르트 톨레의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가 떠올랐다. 오래전에 읽었던 바카라을 다시 펼쳤고, 그제야 그 말의 의미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바카라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달라진 것은 그 바카라을 읽는 나였다.
처음 읽었을 때 그저 좋은 말이라고 생각했던 문장들이, 불안 속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뒤에는 다르게 다가왔다. 지나간 일에 매달리고 오지 않은 일을 걱정하느라 정작 내가 살고 있는 시간을 얼마나 자주 놓쳐 왔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그 시절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사주나 타로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들도 있고, 어떤 해석은 평소 생각하지 못했던 질문을 던져 주기도 한다. 나 역시 그랬다. 그 시간을 지나왔기에 이전에는 몰랐던 것들을 알아가게 되었다.
다만 시간이 흐르면서 분명하게 구분하게 된 것이 있다. 하나의 해석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것과 그 해석에 자신을 맡기는 것은 다르다는 사실이다. 어떤 설명이 내 삶과 닮았다고 느끼는 것과, 그 설명이 내 삶을 예측할 수 있다는 것도 서로 다른 일이다.
사주가 오랜 경험과 통계가 쌓인 결과라 과학적 근거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태어난 계절이나 환경이 기질에 영향을 미치고, 그 차이가 삶의 여러 모습으로 이어진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사주명리학이 그런 관계를 과학적으로 검증한 예측 체계라는 근거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 사람은 자신에게 들어맞는 이야기를 더 잘 기억하고, 지나간 일을 예전에 들은 설명에 연결해 이해하기도 한다. 누구에게나 적용될 만한 성격 묘사가 유독 나를 정확히 설명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바넘 효과(Barnum effect)도 있다.
길지 않은 삶이지만,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면 한 가지는 알 것 같다.
그토록 궁금해했던 미래는 결국 내가 살아낸 수많은 현재가 모여 만들어진 것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일도 있었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달라진 환경도 있었다. 그 모든 것을 내가 결정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때마다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행동하고, 주어진 상황에 어떤 태도로 응답했는지는 분명 이후의 삶에 영향을 미쳤다.
미래를 걱정하며 보낸 시간도, 누군가에게 답을 구하러 다녔던 시간도 결국은 나의 현재였다. 그 시간을 다르게 보냈다면 지금의 나는 또 다른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미래를 미리 알아내는 것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알아가는 편이 더 중요하게 느껴진다. 과거는 기억할 수 있고 미래는 상상할 수 있지만,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는 것은 현재에서뿐이다. 어쩌면 내가 바카라임질 수 있는 미래란, 지금 바카라임질 수 있는 일들을 하나씩 해 나가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요즘 나는 지나온 시간을 기록하고 돌아보는 일에 의미를 두고 있다. 사느라 바빠 들여다보지 못했던 나의 모습들을 하나씩 꺼내어 정리하고, 그 안에서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생각과 감정을 발견하는 일이다.
내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인지, 어떤 순간에 기쁨을 느끼고 무엇을 견디기 어려워하는지 이해할수록 지금의 선택도 분명해진다.
내가 바라는 성공은 남들이 인정하는 성취의 크기로 정해지지 않는다. 언젠가 돌아보았을 때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삶, 나다운 선택을 하며 살아왔다고 말할 수 있는 삶에 더 가깝다. 그런 삶은 먼 미래의 어느 날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이해하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행동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만들어진다고 믿는다.
자신을 이해하는 일이 이렇게 어렵고도 중요한데, 하물며 아직 자라고 있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일은 어떨까.
나는 오랫동안 아이들을 가르치고 관찰해왔다. 그 과정에서 같은 나이의 아이들이 얼마나 다른 속도와 방식으로 성장하는지 지켜볼 수 있었다.
어떤 아이는 처음부터 자신의 생각을 또렷하게 표현하고, 어떤 아이는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문제를 빨리 푸는 아이가 반드시 깊이 이해하는 것은 아니고, 처음에는 서툴렀던 아이가 어느 순간 놀라울 만큼 자라기도 한다. 어른도 다르지 않다. 누구나 자신만의 속도로 배우고, 경험에 따라 달라지고,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한 모습을 발견한다. 아이들에게는 그런 경험을 쌓아갈 시간이 더 많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래서 아이를 가르칠 때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관찰과 인내다.
무엇을 어려워하는지, 어떤 설명에 반응하는지, 어떤 순간에 흥미를 보이는지 살핀다. 같은 문제를 틀려도 그 이유는 아이마다 다르다. 어떤 아이에게는 지식이, 어떤 아이에게는 자신감이 부족하다. 문제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방법을 아직 배우지 못한 경우도 있다.
그 차이를 알아가는 것이 내게는 교육의 시작이다.
나는 교육을 지식을 전달하는 일로만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을 조금 더 편안하고 지혜롭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을 단계적으로 익히면서, 스스로를 이해하고 자신의 한계를 넓혀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할 수 없었던 일을 해내고 어려웠던 문제를 스스로 풀어내면서 아이는 자신의 능력을 발견한다. 그렇게 쌓인 경험은 성적이나 실력뿐 아니라 자신을 믿는 마음에도 스며든다. 언젠가 누군가의 판단에 기대기보다 자신의 생각으로 선택하고 그 결과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기를, 나는 바란다.
그러기 위해 아이를 가르치고 키우는 어른에게는 또 하나의 어려운 숙제가 주어진다.
자신의 시선과 판단으로 아이를 너무 일찍 단정하지 않는 일. 그리고 아이가 스스로 알아가고 자랄 시간을 기다려 주는 일이다.
부모는 교사가 알지 못하는 아이의 모습을 알고 있다. 집에서와 학교에서의 모습이 다를 수 있고, 오래 함께 살아온 부모만 알아차리는 작은 변화도 있다. 그래서 부모의 이야기를 듣는 일은 중요하다.
그런데 가끔은 아이에 대한 생각이 너무 확고한 경우를 만난다. 우리 아이는 원래 이런 성향이라거나, 이 분야에 재능이 있다거나, 앞으로 반드시 이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식이다.
그럴 때 나는 조심스러워진다.
아이가 지금 보여 주는 모습이 이미 정해진 설명과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과학에 재능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아이가 그림 그리기를 더 좋아할 수도 있고, 언어에 소질이 없다던 아이가 어느 날 글쓰기에 깊이 빠져들 수도 있다.
검사나 평가가 아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경우도 물론 있다. 다만 그 결과는 아이를 바라보는 여러 시선 중의 하나로만 남았으면 좋겠다. 한번 얻은 설명을 믿기 시작하면 우리는 무심코 그 설명에 들어맞는 모습에 더 주목하게 된다. 아이의 가능성을 발견하려고 얻은 정보가 오히려 아직 발견하지 못한 가능성을 지나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래서 아이를 바라보는 방식에 대한 생각이 크게 다를 때에는 수업을 맡지 않기도 한다. 서로 다른 교육관을 조율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것이 늘 쉽지는 않다는 것도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솔직히 서운할 때도 있다. 아이의 적성을 알아보는 데에는 적지 않은 비용을 쓰면서, 아이와 시간을 보내며 그 아이에게 맞는 배움을 고민하는 일은 가볍게 여겨질 때다. 그럴 때마다 아이의 가능성을 알아내는 일과 그 가능성이 자라도록 돕는 일이 서로 다른 무게로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된다.
또 같은 날 들었던 이야기에서 마음에 걸린 점이 하나 더 있었다. 우리는 이름이나 전화번호 하나가 어디에 쓰이는지도 따지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데 아이의 기질과 적성을 알아볼 수 있다는 기대 앞에서는 지문처럼 쉽게 바꿀 수 없는 신체의 고유한 정보를 제공하기도 한다. 물론 실제로 어떤 정보가 수집되고 보관되는지, 어떻게 보호되는지에 따라 사정은 다를 것이다. 다만 특히 아이의 정보라면, 그 정보를 제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쯤 생각해 볼 만하지 않을까.
그리고 내게 더 크게 남은 질문은 따로 있었다.
우리는 아이의 미래를 알고 싶어 하면서, 정작 아이를 이해하기 위해 이미 가지고 있는 감각을 얼마나 쓰고 있을까.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함께 시간을 보내며 느끼는 것. 아이가 무엇을 할 때 즐거워하는지, 어떤 순간에 몰두하는지, 무엇을 어려워하는지 지켜보는 것. 그리고 어른의 시선에서 잠시 벗어나, 아이의 눈높이에서 그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
그런 관찰이 언제나 정확할 수는 없다. 내가 본 모습이 아이의 전부일 리도 없다. 그래서 더 오래 바라보고, 때로는 내 생각이 틀렸음을 인정하면서 이해를 넓혀 가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직접 보고 들은 것보다 누군가 분석해 준 결과를 더 객관적인 설명처럼 느낀다.
아이의 손끝에 새겨진 무늬를 들여다보느라, 그 손으로 지금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는 미처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과연 누구를 위한 일일까.
이 질문을 떠올렸다고 해서 아이의 미래를 궁금해하는 부모의 마음을 의심하고 싶지는 않다. 아이가 덜 헤매고, 자신에게 맞는 길을 찾고,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그 마음에는 사랑과 함께 걱정도 있을 것이다.
나 역시 미래가 불안했던 시절에는 누군가의 설명을 듣고 싶었다. 불확실한 시간을 견디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조금은 안다. 그리고 나는 아직 부모가 되어 본 적이 없다. 아이의 미래를 자신의 바카라임처럼 느끼며 사는 마음에는 내가 경험하지 못한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마음을 쉽게 판단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불안을 다루는 일과 다른 사람의 미래를 대신 판단하는 일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특히 아이는 아직 자신이 좋아할 것들을 다 만나 보지도,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충분히 시험해 보지도 못했다. 지금 잘하는 것이 평생의 재능이 될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시행착오를 줄여주려는 마음이 오히려 아이가 스스로 경험하고 선택할 기회를 빼앗는 일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이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자체로 하나의 온전한 인격체이다.
그럼에도 그 가능성을 미리 알아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알 수 없기에 가능한 일들도 있다.
누군가를 이해하고 아낀다는 것이 그 사람의 미래를 미리 알아내거나 대신 결정해 주어야 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이해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설명을 확인하는 일이 아니라, 아직 모르는 모습을 발견할 준비를 하는 일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미래가 궁금하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고 싶고, 지금의 선택이 옳은지 확인받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런 마음은 아마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제는 미래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리 불편하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돌아보면 틀린 선택은 시간이 지나며 배움이 되었지만, 남에게 내어 준 선택은 오래도록 자바카라으로 남았다.
내가 직접 선택했기에 잘못된 판단을 돌아볼 수 있었고, 다음에는 무엇을 다르게 해야 할지 생각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조금씩 나를 알게 되었고, 내 선택이 가져온 결과를 받아들이는 법도 배웠다. 누구도 대신 겪어 줄 수 없는 시간이었다.
아이들에게도 그런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때로는 잘못 고르고, 마음이 바뀌고,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시간. 좋아한다고 믿었던 것에 흥미를 잃기도 하고, 할 수 없을 것 같던 일을 해내며 스스로에게 놀라기도 하는 시간.
어른의 눈에는 그 시간이 시행착오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에게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스스로 선택한 경험이 쌓여야 다음 선택을 위한 판단도 자라고, 그 결과를 바카라임지는 법도 배울 수 있을 테니까.
우리가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 시간을 대신 살아 주는 것이 아니라 필요할 때 손을 내밀고, 아이가 자신의 힘으로 걸어갈 때에는 그 손을 잠시 놓고 가만히 지켜봐 줄 수 있는 일 아닐까.
아이의 미래를 위해 무엇을 미리 알아내야 할지 고민하는 마음도 이해한다. 하지만 아이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지를 아는 것보다, 지금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지 바라보는 일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그 작은 손이 지금 만들고 있는 것들이 모여 언젠가 아이의 삶을 이루어 갈 것이다. 그 안에는 어른이 예상하지 못했던 선택도, 실패라고 생각했던 경험도, 아직 이름 붙일 수 없는 가능성도 함께 있을 것이다.
그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 꼭 알아야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결국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은 언제나 현재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