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돌아가는 길

사랑하고 있을 때, 나는 가장 아름다웠다.

byWONA

최근 들어 조금씩 지친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정말로 무너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아직은 괜찮다고, 이 정도는 견딜 수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런데 특별히 무슨 일이 생긴 것도 아닌데 마음이 무겁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이미 지쳐 있는 날들이 이어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애써 빠져나왔던 어둠 속으로 다시 걸어 들어갈 것 같았다.


그래서 잠시 쉬기로 했다. 무언가를 해결하거나 새로운 계획을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나를 조금 내버려 두고 싶었다.


어린 시절 다니던 초등학교를 찾아갔다. 살던 동네를 걷고, 친구들과 자주 가던 떡볶이집을 떠올렸다. 대학 시절이 고스란히 남아 있을 거라 기대했던 골목골목은 몰라보게 변해 있었다. 친구들과 웃고 떠들던 카페, 별다른 이유 없이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가던 길. 오래된 기억을 더듬어 찾아간 곳들에서 나는 뜻밖에도 오래전의 나를 만났다.


어릴 적에는 한없이 커 보이던 운동장이 놀랄 만큼 작았다. 교실도, 복도도 그랬다. 그토록 넓어 보였던 세상이 사실은 이렇게 작은 곳이었나 싶어 한참을 바라보았다.


대학 시절에는 졸업만 하면 근사한 커리어 우먼이 되어 어느 정도 슬롯 생활을 하다가, 적당한 때에 운명의 짝을 만나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겠지 생각했다. 그렇게 당연한 절차라 믿었건만 그토록 평범한 줄 알았던 삶이 생각만큼 계획대로만 흘러가진 않았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그때 나는 무엇을 꿈꾸었더라.


아주 어릴 때부터 나는 현모양처가 꿈이었다.


지금은 조금 고리타분하게 들릴지도 모르는 말이다. 하지만 내가 꿈꾸었던 것은 희생하거나 순종하는 아내이자 어머니라기 보다는, 현명한 엄마이자 좋은 아내가 되어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삶이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아기를 돌보는 일을 좋아했다. 베이비시팅 아르바이트도 많이 했었다. 왜 그토록 가정을 이루는 일에 마음이 갔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아마 집안분위기나 주변의 가족들을 지켜보면서 가정의 화목은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꼈던 것 같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오히려 이해하기 어려운 순간들이 있고,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일들도 있다. 서로 다른 마음을 이해하고, 때로는 기다리며, 오랜 시간을 함께 살아가는 일. 돈을 잘 벌고 슬롯적으로 인정받는 삶도 가치 있지만, 내게는 화목한 가정을 꾸리는 일이 그보다 훨씬 중요하고 근본적인 일인듯 느껴졌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오래전부터 바라왔던 삶을 떠올리자 눈물이 핑 돌았다. 꿈을 버린 적은 없는데, 돌아보니 내가 원했던 삶과는 꽤 다른 곳에 와 있었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을 부정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고, 그 과정에서 얻은 것들도 분명히 있었다.


다만 어린 나에게 조금 미안했다.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할까.


나이가 들면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생긴다고들 한다. 나는 오랫동안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늦은 나이란 없고, 의지만 있다면 언제든 다시 배우고 도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지금도 그 믿음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다. 다만 세월을 살아보니 마음먹는다고 모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몸에는 분명 시간이 흐르고 있었고, 어떤 기회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무엇보다 인연은 나 혼자의 의지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좋은 사람을 만나 사랑하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다. 마음이 통하는 누군가와 일상을 나누고, 서로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어 주고 싶다. 이 사람이다 싶은 사람을 만난다면 결혼도 하고 싶다.


하지만 이제는 사람을 만나는 일에도 나이라는 숫자가 따라붙는다. 누군가를 소개받는 자리에서는 나이와 조건이 먼저 이야기되고, 마음이 가는 사람과는 서로 살아온 시간의 차이를 의식하게 된다. 그렇다고 일부러 인연을 찾아 나서는 일은 여전히 내키지 않는다. 좋은 인연을 바라면서 정작 인연을 만들기 위한 노력에는 거부감을 느끼는 나 자신이 때로는 우습기도 하다.


아마 나는 아직도 사랑이 자연스럽게 시작되기를 바라는 모양이다. 서로의 조건을 먼저 확인하기보다 한 사람을 알아가다 문득 마음이 움직이고, 그 사람의 사소한 이야기가 궁금해지고, 별것 아닌 하루를 나누고 싶어지는 일.


그런 사랑을 여전히 꿈꾼다.


돌이켜 보면 내가 가장 아름답고 예뻤던 순간들은 언제나 어떤 형태로든 사랑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를 사랑하기도 했고, 이루고 싶은 꿈을 사랑하기도 했다. 친구들을, 가족을, 내가 살아갈 날들을 사랑했다. 그때의 나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일에도 설렜고, 누군가의 기쁨에 진심으로 기뻐할 줄 알았다. 마음을 다해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평범한 하루가 특별해지기도 했다.


물론 사랑이 언제나 나를 행복하게 만든 것은 아니었다. 상처받았고, 실망했고, 잃어버린 것들도 있었다. 어떤 인연은 차라리 만나지 않았더라면 좋았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 시간들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사랑하면서 나는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감정들을 배웠다.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 애썼고, 때로는 나의 한계를 마주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기도 했지만, 누군가를 위해 얼마나 큰 사람이 될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이별은 상실을 가르쳤고, 그리움은 한때 내 곁에 있었던 것들의 소중함을 뒤늦게 깨닫게 했다.


그래서인지 요즘 사람들이 사랑을 이야기하는 방식이 조금 쓸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연애를 하면 돈이 많이 들고, 시간을 빼앗기고, 감정적으로 피곤해진다고 한다. 혼자 사는 편이 자유롭고 편하다고도 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혼자 살아가는 삶이 더 행복할 수 있고, 사랑이나 결혼이 반드시 필요한 것도 아니다.


다만 모든 것을 효율과 손익의 문제로 바라보는 데 익숙해진 것은 아닐까.


누군가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어 보고, 또 누군가를 세상에서 가장 특별하게 여겨 보는 경험. 기꺼이 자신의 시간을 내어주고, 때로는 상처받고 상실을 견디면서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되어 가는 과정. 그런 경험이 우리 삶에 남기는 것들이 돈이나 시간으로 환산할 수 있는 것일까.


사랑은 언제나 효율적인 선택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래서 더욱 인간적인 경험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 역시 어느 순간부터 계산하기 시작했다. 이 나이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나이 차이는 얼마까지 극복할 수 있을까. 또다시 상처받을 만큼의 마음과 에너지가 남아 있을까.


사랑을 효율과 손익으로 판단하는 것이 쓸쓸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나 역시 현실적인 이유들을 앞세워 사랑의 가능성을 미리 가늠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린 나에게 미안했던 것도 어쩌면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꿈을 잊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그 꿈을 떠올릴 때조차 설렘보다 걱정이 앞섰으니까.


이제는 나에게 조금 잘해주고 싶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해보고, 쉬고 싶을 때는 마음 편히 쉬게 해주고 싶다. 그동안 미뤄 두었던 나의 바람에도 조금은 귀를 기울이고 싶다.


혼자 살아갈 가능성을 생각하다 보면 앞으로의 삶을 좀 더 단단하게 준비해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가꾸고, 누구에게 기대지 않아도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일상을 만들어야겠다고.


그러다 피식 웃음이 났다.


쉬어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에도 나는 또다시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구나.


어쩌면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더 완벽한 삶을 설계하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조금 부족해도 괜찮고,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괜찮고, 가끔은 아무것도 이루지 않은 하루를 보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여전히 사랑하고 싶다. 누군가와 함께 추억을 쌓고, 때로는 다투고 화해하며 살아가고 싶다. 사랑이 언제나 행복한 결말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렇다고 그 소중한 마음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 인연이 언제 찾아올지는 모른다. 어쩌면 끝내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아직 오지 않은 인연 때문에 지금의 나를 외롭게 내버려 두고 싶지는 않다.


돌아보니 내가 그리워했던 것은 단지 젊었던 시절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온 마음으로 사랑하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기대하던 나 자신이었다.


그때의 운동장과 교실은 작아졌고, 골목도 변해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보고 싶은 것이 많고, 해보고 싶은 것이 많다.


그때의 나에게 무엇을 꿈꾸었느냐고 물었던 것처럼, 이제는 지금의 나에게도 묻는다.


나는 지금 무엇을 사랑하고 있을까.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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