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넨 사랑, 닿은 사랑
아이는 부모라는 우주를 믿고 태어난다.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알기 전까지, 부모의 말과 표정은 세상을 이해하는 첫 번째 방법이 된다. 그러다 자라면서 그 우주의 경계를 발견하고, 사춘기를 지나 자기만의 궤도를 찾아간다. 그리고 언젠가 부모와는 별개의 세계가 된다.
나는 그 과정을 생각하다가, 한 사람의 우주가 만들어지는 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참여하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장남인 아버지와 장녀인 어머니 사이에서 막내로 태어났다. 유교적 관습과 남아선호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던 1980~90년대였다. 부모님은 맏사위와 맏며느리에게 기대되는 역할을 성실히 해냈다. 우리 집이 언제나 넉넉했던 것은 아니지만, 두 분은 그 역할을 무거운 의무로만 여기지 않았던 것 같다. 양가를 챙기고 가족 모임을 도맡으면서도, 대체로 기꺼운 마음으로 해내려 했다.
한두 달에 한 번씩 제사가 있었고, 일주일에 한 번은 대가족이 모여 밥을 먹었다. 명절이면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음식을 준비했고, 손님이 오기 전에는 집 안을 대청소했다. 분명 누군가에게는 고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린 내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어른들의 고단함보다 함께 차린 상과 북적이는 집, 서로의 안부를 묻는 목소리였다. 나는 그것들을 가족의 사랑과 우애, 행복의 모양으로 받아들이며 자랐다.
오랜 뒤 친척들과 그 시절을 이야기하다 놀란 적이 있다. 같은 제사에 참석하고 같은 상에서 밥을 먹었는데, 각자가 기억하는 가족은 같지 않았다. 다른 어른들이 자기 몫을 다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내 기억 속 그분들도 함께한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고, 행복한 시간을 나누었다. 다만 같은 집안에 모였다가도 우리는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마주한 일상과 부모의 말투, 사랑을 주고받는 방식은 저마다 달랐을 것이다. 아이들의 기질도 제각각이었다. 같은 말이라도 누구에게는 위안이, 누구에게는 부담이 될 수 있다.
우리는 같은 가족에 속했지만, 저마다 다른 우주에서 자라고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부모가 된다는 일이 새삼 어렵게 느껴진다. 아이가 잘못될까 두려워 자기 생각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어른도 있다. 그 마음은 기본적으로는 사랑과 바카라임감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하는 방식이 일방적이면, 아이에게는 사랑보다 압박으로 닿는다. 그렇다고 그런 어른을 미성숙하다거나 ‘어른아이’라고 한마디로 부르고 싶지는 않다. 많은 어른이 누군가의 아이로 살면서 상처를 받았고, 자신이 아는 방식 안에서 애쓰며, 때로는 달라지려고 노력한다.
나 역시 관계 안에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을 뒤늦게 본 적이 있다. 오랜 세월 함께한 온라인 게임 상사가 있었다. 존경하고 동경했으며, 내 인생의 귀인이자 좋은 사람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고 주변의 말과 서로의 불안이 쌓이면서 관계도 달라졌다. 서로에게 기대했던 것과 실제로 주고받을 수 있었던 것이 어긋났고, 나는 애정과 원망 사이에서 몇 번이나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 과정에서 잘못된 선택들이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한때 소중했던 인연은 그렇게 끝났고, 당시에는 미움과 아쉬움만 남은 것 같았다.
처음에는 그 시간을 아팠던 일로만 기억했다. 그 기억은 자바카라이 되었다가 후회가 되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새로운 환경에서 다른 경험을 쌓으면서, 뜻밖에도 감사했던 순간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힘들었던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 때문에 좋았던 일까지 거짓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때 속해 있던 세계를 벗어나 더 넓은 곳에서 바라보니, 그 사람에게서 받은 것과 내가 그 안에서 한 선택이 함께 보였다. 우리 둘 다 조금은 다르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었을 것이다.
관계는 끝났어도, 그 관계를 이해하는 방식은 바꿀 수 있었다.
과거의 일을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다. 다만 지금의 삶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 가면서, 같은 기억이 나를 붙드는 힘은 달라졌다. 어떤 장면은 희미해졌고, 어떤 장면은 예전만큼 아프지 않다. 이제 내게 용서란 누군가의 잘못을 지우는 일도, 다시 가까워지겠다는 결심도 아니다. 과거의 상처에 현재의 모든 판단을 맡기지 않는 일에 가깝다. 눈앞의 사람이 지금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고, 내가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지도 함께 살피는 일이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우리는 내 발에 편한 신발을 상대에게도 신기려 한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건넨 신발이라도 상대의 발에는 아플 수 있다. 관계를 오래 이어가려면 서로의 발이 어디가 아픈지 묻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렇다고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을 끝없이 이해하고 받아들이자는 뜻은 아니다. 그에게도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사정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내가 허용할 수 없는 선은 알아차릴 수 있다.
상대를 악인으로 만들어야만 나를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스스로 완전한 우주가 될 수 없다. 부모도, 아이도, 그 밖의 어떤 어른도 불안과 상처 없이 다른 사람을 만날 수는 없다. 하지만 아이가 자기만의 우주가 되어 가는 동안 우리가 건넨 말과 보여준 태도는 그 안에 오래 남는다. 그 아이는 다시 누군가의 친구가 되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어른이 되어 또 다른 세계에 닿을 것이다. 그 영향이 어디까지 이어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래서 적어도, 내가 건넨 것이 상대에게 어떻게 닿았는지 물을 바카라임은 있다. 내 최선이 사랑이었는지만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도 사랑으로 느껴졌는지 듣는 일.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기 우주가 완성되었다고 믿는 대신, 다른 우주와 만날 때마다 그 질문을 놓지 않는 일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