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아홉

사람을 이해하는 일도 숏폼이 되어 간다

byWONA

요즘 사람들은 자신을 잘 설명한다.


누군가는 내향적인 사람이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회피형 애착을 가졌다고 설명한다. 완벽주의 성향이나 감각의 예민함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MBTI 네 글자로 자신을 소개하기도 한다. 우리는 자신을 해석할 수 있는 단어를 예전보다 훨씬 많이 갖게 되었다. 나 역시 그렇다.


그 언어가 반가웠던 때도 있다. 막연하던 어려움에 이름이 생기면 자신을 탓하던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기도 한다. '유난하다', '의지가 약하다'는 말로 넘겨지던 고통이 도움을 요청할 언어를 갖는 일은 중요하다.


그런데 요즘은 그 풍요로움이 조금 피곤하다. 사람을 이해하려고 꺼낸 말들이 너무 쉽게 사람을 다 안다는 말로 바뀌는 것 같아서다.


얼마 전 내가 좋아하는 한 배우가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모습을 보았다. 내 눈에는 낯을 가려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 모습을 두고 프로답지 못하다는 반응이 나왔다. 홍보를 위해 출연했으면서 그렇게 소극적이어도 되는냐는 것이었다.


연기 밖의 순간까지 잘 연출해야 하는 직업이라는 것은 안다. 인터뷰에서는 말을 잘해야 하고, 예능에서는 친근해야 하며, 짧은 영상 안에서도 호감을 남겨야 한다. 화면을 보면서 참 애쓰는 삶이라는 생각을 했다. 다만 성실하게 참여하는 것과 재치 있고 편안해 보이는 것은 다르다. 능숙하지 못한 모습이 곧 성의가 없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더 불편했던 것은 어색함에 대한 평가가 인성에 대한 판단으로 번지는 과정이었다. 그를 직접 만나 본 사람의 첫인상 한마디가 더해지면, 화면만 본 사람들의 추측도 힘을 얻는다. 말한 사람의 영향력이 클수록 그 인상은 더 믿을 만한 증언으로 받아들여진다. 낯가림으로 보일 수도 있었던 태도가 거만함으로 읽히고, 어느새 '원래 싸가지가 없다더라'는 말로 커진다.


처음 그 말을 한 사람은 특정한 자리에서 받은 인상을 전했을 뿐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말이 옮겨지는 동안 시간과 상황은 빠지고 성격에 대한 결론만 남는다. 직접 만난 경험은 참고할 만하다. 그렇다고 가까이서 보았다는 사실이 깊이 안다는 뜻이 아니다.


나 역시 그 배우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좋아하기 때문에 더 호의적으로 보았을 수도 있고, 내가 본 어색함이 반드시 낯가림 때문이라고 확정할 수도 없다. 내가 불편했던 것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큰 결론이 너무 쉽게 내려지는 일이었다.


전문적인 언어가 일상에서 쓰이는 모습을 볼 때도 비슷한 불편함을 느낀다. 거리를 두는 행동에서 특정한 애착유형을 읽어 내고, 그 유형에 관한 설명으로 어린 시절과 부모와의 관계를 짐작한다. 그렇게 상상한 과거를 바탕으로 앞으로의 관계까지 예측한다. 당사자에게 들은 적 없는 이야기가 그럴듯한 사연이 된다.


일반적인 경향을 설명하는 지식이 곧바로 한 개인의 이력을 증명해 주지는 않는다. 그런데 전문가의 용어가 더해지면 "나는 그렇게 느꼈다"는 말이 "이런 사람은 원래 그렇다"는 말로 바뀐다. 이해를 돕던 지식이 타인을 판단할 증거처럼 쓰이는 순간이다.


그 사람을 직접 안다는 말과 그 사람의 유형을 안다는 말은 서로 다르지만, 때로는 같은 확신에 이른다. 더 물어보지 않아도 된다는 확신.


그런 판단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부터 조심하게 된다.


이것은 연예인만의 일이 아니다. 회의에서 바로 대답하지 못한 침묵이 소극적인 성격으로 읽힐까 봐, 모임에서 일찍 돌아가는 일이 사람을 싫어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질까 봐 신경을 쓴다. 오늘은 지쳤을 뿐인데 의욕 없는 사람으로 남을까 봐 웃고, 아직 할 말이 정리되지 않았는데도 무언가를 말한다.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보다 이 모습이 어떤 사람으로 해석될지를 먼저 생각한다. 있는 그대로의 나와 보여 주는 나 사이가 조금씩 벌어진다.


물론 타인과 살아가려면 감정을 조절하고 태도를 가다듬어야 한다. 다만 예의를 갖추라는 요구와 누구나 사교적으로 행동하라는 요구는 다르다. 맡은 일을 해내라는 요구와 힘들어하는 기색조차 보이지 말라는 말도 다르다.


우리가 존중한다고 말하는 개성은 어디까지 허용되는 것일까. 내향적인 사람을 존중한다면서 외향적인 사람처럼 굴기를 바라고, 솔직한 모습을 원한다면서 정작 어색하고 서툰 모습에는 실망한다면, 우리가 반기는 것은 보기 좋게 다듬어진 자연스러움에 가까울 것이다.


자신을 능숙하게 소개하고 호감 가는 표정을 만드는 것도 하나의 능력이다. 그러나 그것이 다른 능력까지 판단하는 기준이 되면, 자신을 표현하는 데 시간이 필요한 사람은 할 수 있는 일을 보여 주기도 전에 불리해진다. 가면을 잘 쓰는 사람과 쓰는 데 힘이 많이 드는 사람 사이에도 격차가 생긴다.


그래서 나는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작은 행동 하나가 중요한 단서일 수는 있다. 하지만 하나를 보았다는 사실이 나머지 아홉까지 확인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다 문득,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만 보고 열을 판단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알았다. 나 역시 한마디를 근거로 사람을 분류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표현은 여전히 불편하다. 다만 그 불편함만으로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까지 결론 내릴 수는 없겠다. 내가 경계하는 태도를 나도 취하고 있는 셈이니까.


생각해 보면, 나 자신을 설명하려고 고른 말도 다르지 않았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라고 말할 때, 그 말은 나를 설명하는 동시에 그 자리에 붙들어 둔다. 달라진 날에도 예전의 설명에 맞춰 나를 해석하고, 설명과 어긋나는 모습은 예외로 치워 둔다. 타인을 작은 설명 안에 넣기 전에, 나는 이미 나에게 그렇게 하고 있었다.


이름을 붙이고 나면 마음이 편해진다. 나에게도 타인에게도 더 묻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 편안함 때문에 내가 놓치고 있는 모습은 없는지 돌아보게 된다.


개성이나 성향에 대한 존중은 모든 행동을 좋게 받아들이는 일이 아닐 것이다. 무례한 말에는 무례했다고 말하고, 약속을 어겼다면 바카라임을 물으면 된다. 그 행동을 지적하기 위해 그 사람의 어린 시절을 상상하거나 인격 전체를 결론 내릴 필요까지는 없다.


말이 적은 사람에게 말할 시간을 주고, 다른 모습을 보았을 때는 이미 내린 판단을 고칠 여지를 남겨 두는 것. 존중은 그런 구체적인 태도에 더 가까울 것 같다.


그날 그 배우를 보며 내가 바랐던 것도 대단한 이해는 아니었다. 조금 어색한 사람을 잠시 어색한 채로 두는 일. 그 몇 분만으로 그가 어떤 인간인지 결정하지 않는 일.


그럴 때는 잘 안다는 말보다 아직 다 알지 못한다는 말이 더 정직하다. 그 말이 조금 더 편해졌으면 좋겠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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