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시작될 조건

덜 애썼어도 괜찮았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았다

byWONA

‘갓생’이라는 말이 생기기 전부터 나는 갓생을 살았다.


하루를 길게 쓰려면 새벽 다섯 시에는 눈을 떠야 했다. 일어나자마자 오늘 할 일을 나열하고, 어제 끝내지 못한 일을 마저 손봤다. 커피를 하루에 일곱여덟 잔씩 들이켜며 내 일과 남의 일을 가리지 않고 살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자정이 넘었다.


평균 수면 시간은 네 시간 남짓이었다. 피곤하다는 생각보다 뿌듯하다는 생각이 앞섰다. 남들보다 일찍 하루를 시작하고, 남들이 쉬는 시간에도 무언가를 해내는 삶. 부족한 잠은 내게 일종의 훈장이었다.


그때의 나는 잘 사는 것과 그저 많이 쳐내는 삶을 구분하지 못했다.


바쁜 사람은 필요한 사람이고, 필요한 사람은 쉽게 버려지지 않는다고 믿었다. 누군가 어려움을 겪고 있으면 먼저 나섰고, 문제가 보이면 내 일이 아니어도 해결하려 했다. 끊임없이 쓸모를 증명해야 사랑과 기회가 내 곁에 머무를 것 같았다. 내 마음이 편안한지보다 내가 제 역할을 하고 있는지가 더 중요했다.


가만히 있으면 어딘가에서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 같았다. 하루를 빽빽하게 채우지 못하면 시간을 낭비한 것 같았다.


그런데 요즘은 일하는 마음이 편해졌다.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대단한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다만 요즘 나의 하루는 이렇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창문을 연다. 환기를 하고, 하늘을 한 번 보고, 몸이 개운해질 때까지 스트레칭을 한다. 아버지와 마주 앉아 아침을 먹는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건강을 위해 가볍게 몸을 움직이고 나면 아홉 시나 열 시가 된다. 일은 그때부터 시작한다. 오후 다섯 시나 여섯 시쯤이면 대개 마무리되고, 그다음 시간은 나에게 쓴다.


예전의 나였다면 하루의 절반을 버렸다고 자바카라했을 시간표다.


해야 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바카라임이 가벼워진 것도, 돈에 대한 걱정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일을 하다가 쉬고, 오늘 끝내지 못한 일은 내일로 넘기기도 한다. 그렇게 일해도 생활은 굴러간다.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덜 애쓰고, 조금 덜 불안해하고, 때로는 적당히 살아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았다. 그동안 쏟아부은 시간과 마음에 비해 지금 손에 쥔 것이 특별히 많다고도 할 수 없었다. 오히려 덜 애썼다면 건강과 여유,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할 시간이 더 많이 남지 않았을까.


그 생각이 들자 조금 억울해졌다.


나는 언제나 아직 오지 않은 삶을 기다렸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찾으면, 이 문제만 해결하면, 조금 더 안정되면 그때부터 제대로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삶은 늘 곧 시작될 예정이었고, 오늘은 그 삶에 들어가기 위해 치러야 하는 비용처럼 지나갔다.


돌이켜보면 내가 찾던 것은 불안이 끝나는 지점이었다. 하지만 하나를 이루면 또 다른 조건이 생겼다. 아무리 많은 일을 해내도 이제 이만하면 됐다는 생각은 좀처럼 들지 않았다. 행복해지기 위한 노력이 정작 행복을 뒤로 미루고 있었다.


그 모든 시간을 성장이라는 말로 미화하고 싶지는 않다.


물론 그 시절에 배운 것도 있다. 견디는 힘과 일을 끝까지 끌고 나가는 능력은 그 시간을 통과하며 생겼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고생이 반드시 필요했던 것은 아니다. 덜 힘들게 배울 수 있었던 것들이 있었고, 굳이 상처받지 않아도 알 수 있었던 것들도 있다. 그 사이 놓친 시간을 생각하면 여전히 아깝다.


지금의 내가 편안한 이유는 삶의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타인의 기대를 먼저 살피던 자리에서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묻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끊임없이 고치고 몰아붙여야 할 대상으로만 보지 않게 되었다.


이제는 나와 편하게 마주 앉아 있을 수 있다.


많은 것을 이루지 못한 날에도 나를 비난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알아봐 주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가진 것의 가치까지 의심하지 않는다. 여전히 일하고 돈을 벌지만, 그 일을 위해 내 하루를 전부 내어주지는 않는다.


예전에는 아버지와 아침을 먹고 하늘을 바라보는 시간도 일을 시작하기 전의 준비에 불과했을 것이다. 지금은 그 시간 역시 내가 살고 싶은 삶의 일부다. 일을 다 끝낸 뒤에야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덜 애썼어도 괜찮았을지는 끝내 알 수 없다. 다만 지금은 나를 그만큼 몰아붙이지 않아도 하루가 지나가고, 생활이 이어진다는 것을 안다.


더는 삶이 시작될 조건을 갖추느라 오늘을 전부 쓰고 싶지 않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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