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을 들어가서 나름 열심히 살았다. 적응하려고 매일 리포트 쓰냐고 목소리가 귀에 울릴 때도 죄송합니다를 입에 달고 살았다. 하지만 글발은 있었지만 보고서는 다른 글이다 보니 나름 시간이 필요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나도 나름 보고서가 익숙해질 즈음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초등학교 친구였다. 그것도 1학년 친구 그때가 내 나이 서른이 넘어서였다. 싸이월드가 한창일 때도 연락을 하지 못했는데 어쩌다 우리 집은 그대로 고향에 있으니 집 전화번호를 알아서 내 폰번호를 부모님께 물어서 연락을 했다는데 정말 반가웠다. 친구는 26살에 결혼을 했고 아이가 있었다. 나는 딸아이가 너무 귀여워서 이것저것 사주면서 인사를 했고 아웃백에서 밥을 먹었다.
친구는 자신의 이른 결혼은 남편과의 나이차이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내심 부러워서 같은 회사에서 만냤냐고 했고 그렇다고 해서 그건 인연이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했다. 친구는 나에게 "너 여전하다"는 말에 "뭐가?"
친구는" 아니 분위기가?"
나는 "내가 어떤 분위기인데?"
친구는 "너 중학교 때 내가 좋아하는 친구 있어서 대필 편지 네가 썼잖아. 기억나지? 그 친구 아버지 교감 선생님이었고.."
나는 "아..."
나는 다 지난 이야기에 웃음이 나왔다.
"야 결국은 그 친구 오락실에 있어서 내가 갖다 주고 나만 뻘쭘하고 아니 우리 엄마가 오락실에 가면 돈 뜯긴다고 절대 가지 말라고 했는데 네 편지 전해주겠다고 간 거 아니야"
친구는 깔깔 웃었고 나는 "진짜야"라고 강조를 하는데 친구는 "웃긴 게 그 남자애가 네가 자기를 좋아하는 줄 아고 나한테 편지를 줬어. 수신인이 몽접이에게"
몰랐던 비하인드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락실 사건 이후에 일주일 정도 친구가 나에게 "우리 다음에 보자" 하고 집에 들어간 시간이 있었는데 이유가 이거였나 보다.
그렇게 웃으며 커피를 앞두고 헤어지려는데 나에게 어렵게 말을 꺼낸 친구 "몽접아 나 돈 좀 빌려 줄 수 있어?"
나는 "무슨 돈?"
친구는 "아니 나 청약당첨 됐는데 돈이 부족해서 여기저기 부탁 중이고 사실 그래서 오늘 너한테 부탁하려고 만난 것도 있고.. 어떻게 안될까?.."
갑작스러운 제안에 "얼마나?"
친구는 "얼마까지 가능해?"
갑자기 스치는 적금통장들에 "글쎄 나도 많이는 안되고 천만 원 정도.."
친구는 갑자기 화한 웃음으로 "그럼 나 한 달만 쓰고 돌려줄게 이자도 붙여서"
우리 엄마는 절대로 돈관계 하지 말라고 했는데, 아빠의 보증 때문에 힘들었던 게 우리 집이라 엄마는 누군가에 돈을 주는걸 극도로 꺼리셨다. 그리고 우리 딸들에게도 말씀하셨다.
"친할수록 돈 거래 하지 말거라. 사람 잃고 돈도 잃는다"
어릴 때는 몰랐고 이때도 몰랐다.
나는 "그래 그럼 언제까지?"
친구는 "내일까지. 내 계좌번호야"
그렇게 나는 다음날 아침 친구에게 돈을 보냈고 한 달이 지나고 연락이 없었다.
사람이란 언제나 변수가 있는 법, 그렇게 3개월이 흘러서 친구에게 전화를 했는데 없는 번호가 되었고 찾을 길이 없어서 친구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왜 당신에게 전화를 했냐며 도리어 화를 냈고 내가 빌려주고 싶어서 빌려주었으면 내가 받아야지 왜 부모가 대신 주냐며 목소리를 높이셨고 결국은 우리 부모님은 화를 이기지 못하시고 친구네 집에 가서 약간의 돈이라도 받을까 하여 갔지만 빈손으로 돌아오셨다.
물론 난 엄청 혼났고 사정을 이야기했지만 아빠는 "내가 그렇게 힘들게 산 이유를 알고도 그렇게 했니?'라는 말씀을 하셨고 나는 그날 이후로 그 친구를 잃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친구는 나에게만 돈을 빌린 게 아니었다.
힘들게 돈을 잃고 지내는 동안 회사일은 바빴고 한통의 문자 메시지가 왔다.
친구 정희가 연락을 했다. 중학교 친구였다. 메일로 가끔 연락을 했는데 남편 회사로 서울에 왔다며 밥을 먹자고 제안을 해서 그 주 주말에 밥을 먹었다. 그리고 나는 돈을 잃었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정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혹시 순자(가명)?"
나도 갑작스러워서 커피잔을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희는 "야 이거 봐라 내 돈 2천이 아니네"
정희는 "야 이거 사기야"
갑자기 멈춰지는 시간들이 이걸 공간도 멈추었다고 해야 하나? 하는데 뒷머리가 아팠다.
나는 "다 잊었어. 못 받아"
정희는 "내가 그 돈 빌려주고 남편이랑 대판하고 아이고.. 머리야.."
나는 웃으며 "알고 보면 피해자 더 있는 거 아니야? 난 친구를 잃었다. 한방에. 웃기지 않아?"
정희는 "야 잊어야 괜찮아. 생각하면 부르르르"
그렇게 나는 사람도 잃고 돈도 잃은 첫 번째이자 마지막 사례를 남기고 내 삶은 왜 이리 꼬이지 라는 삶을 살았다.
그 이후로는 누가 내게 돈을 부탁하면 그 돈을 잃어도 좋다고 생각하면 돈을 주고 그도 아니면 절대 거래를 하지 않는다. 이게 원칙이다. 사람을 잃는다는 게 참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돈으로 잃다니 참 아이러니이다.
슬프다, 지독하게 슬펐다. 내 초등학교 시절을 싹 긁어 가버렸다.
순자는 나와 초등학교 1학년때부터 친구였다. 난 키가 꽤 커서 맨 뒷줄에 앉았는데 선생님이 꼭 나에게 청소를 지시하시면 친구와 나는 둘이 단짝이 되어서 청소를 했고 2학년 되었을 때 반은 떨어졌지만 늘 하굣길은 함께 했었다. 그리고 3학년때는 같은 반이 되었고 이후로 폴짝폴짝 같은 반 다른 반을 넘나 들면서 다녔고 중학교도 같았다. 우리는 같은 도서관을 다녔고 같은 독서실을 다니며 같은 문제집을 사서 서로 어려운 문제를 풀어주며 인생을 함께한 사이였고 고등학교는 달랐지만 중간고사 기말고사가 끝나면 지역에서 유명한 빵집에서 빵을 먹으며 20대 대학생활에서 연애를 하자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순자와 내가 다른 점은 순자는 연애를 좋아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일탈이라는 단어를 쓰자면 난 지극히 평범하게 살기를 원했고 순자는 가끔씩 일탈을 원해서 연애편지 대필사건을 이후로 순자는 끊임없이 지역동아리 가입을 핑계로 나에게 같이 들자고 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나는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20년 우정이 이렇게 한 번에 정리가 되다니.. 슬펐다. 돈이 문제지 사람이 문제겠는가 하면서 그렇게 머리를 정리할 때 즈음 친구들에게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순자는 이미 회사를 그만두고 어딘가로 떠났다고. 그래서 나는 그 이후 절대 돈관계를 하지 않고 번호도 없는 순자를 찾지 않았다. 만난다고 해도 물어볼 말도 들을 말도 없는 이 관계는 너무 아팠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