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삶이 불안하다면 당신은 잘 살고 있습니다.

by몽접

1. 에필로그


어떤 삶을 살아야 잘 사는 걸까? 난 초등학교 때 수우미양가, 절대적인 평가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서바이벌이었다. 그래서 수우미양가를 받을 때마다 하나라도 우가 나오지 않길 바라며 초등학교지만 매달 시험을 보는 학교에서 시험준비를 위해 무슨 생각이었는지 지기 싫어하는 마음에 밤 12시까지 공부를 하고 학교 시험을 치르면 5과목을 시험 보고 1개 정도 틀려서 반에서 3-4명 정도 받는 학교 시험에서 당당하게 대표로 받을 때는 그 잠을 포기한 걸 잘했다고 생각했다. 흰색 종이에 도장이 찍힌 우수상, 그래 그 우수상이 시작이다. 내 파멸의 시작.


하지만 우리 부모님은 우수상이 별거 아니라며 그냥 공부해서 받는 건데 뭐 그리 유난히 나며 말씀을 아끼셨고 어쩌다 동갑인 친구나 같은 학교 친구네 집에 놀러 가면 자랑처럼 붙여 놓은 상장을 보면서 속으로 '아니 나도 받았는데 우리 집은 뭐지' 하고 생각을 할 때 즈음 집으로 걸어가는 길 "아빠 우리는 왜 상장 안 걸어?"라고 물으면 돌아오는 답은 "상장이 일 년에 40장이 넘는데 그게 도배인데 어떻게 거냐?' 하시며 매우 쿨하게 "빨리 가자 춥다" 하고 우리에게는 상장이란 그냥 받는 거다,라고 말씀을 하셨다.


유명한 라면 받침대, 그날도 상장을 받고 "엄마 나 최우수상" 하고 기뻐서 엄마에게 자랑을 하는데 엄마는 "상장 바닥 바닥" 하는데 나는 "이 상장을?" 엄마는 "아 급해 "하시면서 "그래" 하시고 우리 집은 그날 아무렇지 않게 상장을 바닥에 놓고 라면을 끓여 먹는 일이 있었다. 물론 그 상장에는 라면 국물이 있었고 다 먹고 나서야 아빠는 무슨 상장인지 보셨고 여동생은 "언니 잘했네"라고 그날밤 마무리를 했다.


그리고 나는 중학교를 가서 현타를 받는다. 공부를 나름 잘했다고 생각을 했는데 잘하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어찌 보면 현타일 수 있다. 그래서 초등학교식의 공부 방식을 바꾸고 중간고사 시즌이면 독서실 한 달을 끊어서 거의 살았다. 그리고 반등수를 올리고 6개월 뒤 전교등수를 올려서 유일한 국립고등학교를 지원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의 생활은 너무 지루했다. 모든 게 지루했다. 아침 6시에 기상해서 기숙사 생활이란 그저 그런 이야기들이 나돌고 나도 다르지 않게 공부를 했고 인생이 이렇게 재미가 없으니 그냥 문제만 풀자라는 생각에 또 공부를 하고 사실 난 왜 공부를 하냐고 물으면 딱 국어국문과 하나였다.

처음에는 집안에서 반대가 심했다. 국어교육도 아니고 국어국문과라고 하니 굶어 죽는다고 부모님은 안된다고 하셨지만 나는 학작가 되고 싶다고 외쳤고 울기도 여러 번 결국 자식이 부모를 이겨서 국문과를 지원하고 대학을 가서도 현타를 받았다.


너무 성실하게 학교 생활을 한 탓에 대학교 때 사춘기가 와서 모든 게 삐뚤었다. 세상을 보는 시선이 달랐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이 별로 없었고 학교 수업이 끝나면 아르바이트하기 바빴고 자판기 커피는 밤을 새우고 마시는 새벽 6시 커피가 가장 맛있었다. 내 별명은 도서과, 유령. 홍콩아가씨. 였다. 나도 졸업하고 알았다.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하면 친구들은 내게 와서 조별과제를 해주어서 정말 고마웠고, 나는 나대로 살아야지 하면서 유럽을 가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고 막상 졸업을 할 때 즈음 친구들은 대학원 진학에 열을 올렸다. 하지만 나는 동대학원은 가고 싶지 않아서 다른 대학원을 수소문하고 있을 때 즈음 연락을 받았다.

교수를 하지 않을 바에는 대학원은 힘이 빠진다는 닳고 닳은 소문, 그래서 나는 시크하게 말했다.

"공부가 좋아서 가려고 하는 건데"

친구는 내게 "너 형편없다면서 가게?"

나는 웃으며 "장학생으로"

그렇다 나는 말도 안 되지만 어쩌면 되지 않을까 라는 헛된 꿈을 키우며 그렇게 대학원을 들어갔고 나는 이곳에서 다른 나라 사람으로 살면서 공부를 그만둬야겠다 생각에 박사는 접었다.


꽤 바르게 살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친구들은 내게 꿈을 따라가는 몽상가라고 했으며 작가 이상처럼 살아간다고 이야기했다. 빈정이는게 아니라 그냥 현실과 다르게 사는 게 한편으로는 부럽고 한편으로는 한심하다는 친구도 있었다. 그 어느 쪽도 답은 없었으나 선택은 내 몫이었다.


자 이제 취업해야지, 하고 세상에 문을 열었을 때 내가 갈 곳은 없었다.

문과라서 죄송합니다,라는 문장이 지배적이었다.

왜 문과가 죄송하지, 대학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 철학부터였는데... 세상이 그렇구나...

누군가는 그랬다.

"야 예상 못 했어?"

나는 "아니 그런데... 좀.." 하고 말끝을 흐리면 친구는

"찾아봐"

이때부터 나는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던 것 같다.

졸업을 하고 좀 쉬었다.

강제로 쉬는 거라 이건 뭐 말이 안 되는 삶이었다.


엄마는 예전부터 사람은 성실하면 어딜 가도 인정받는다고 하셨다.

놀고 있는 나 자신이 용납이 안 돼서 근처 편의점 알바를 알아봤는데 떨어졌다.

이유는 고학력자라서 라는데 나는 열심히 할 수 있다 어필했으나 탈락, 결국 지원한 곳 20여 곳에서 낙방을 하고 손을 놓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밖을 나가기 싫었다.

들어오는 바람도 싫어서 문을 닫고 살았다.

부모의 한숨은 늘었지만 난 모른 채 하고 살았다. 유일하게 내가 살 수 있는 곳은 서재, 바카라을 미친 듯이 다시 읽었다. 김유정작가의 봄봄을 시작으로 아나키스트 작품 그리고 중학교 때 가슴을 뛰게 했던 작가들을 찾아가며 사실 우리 집은 태어날 때부터 바카라이 많았다. 삼성출판사에 새로 줄로 되어있는 오래된 작가 장꼭도가 그렇게 유명한 작가인지는 고등학교를 가서 알았다. 넘치는 열정을 고등학교 때는 밤을 새워서 읽었다.

이때 동화도 다시 읽었다. 그래 그랬다.


나는 잘 살고 있는가? 내가 잡은 주제어였다. 어딘가에 묻고 싶었다.

흔들리는 배에서 겨우 버티는 느낌으로 살아가는 내 모습에서 일기를 쓰면서 늘 마지막 밑칸에는

내일은 다르기를 하지만 내일에 다른 건 없었다.

다른 게 있다면 지원서 한 장이라도 넣었어야 했는데 좀처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후회를 했다.

나도 남들처럼 그냥 경영 경제를 갔어야 했을까? 하지만 다시 생각을 해도 내 중학교 꿈이었던 국문과는 잘못이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 자존심은 지키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