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잘 모르는 우리 엄마.
내 아이들을 바라보는 엄마의 눈빛은 나를 보던 그때의 것과 같다.
기억나는 어린 시절들은 엄마를 그리워하던 것으로 가득하다.
엄마가 회사숙소생활을 하던 탓에 떨어져 살던 때가 있었는데 그 당시 엄마에게 휴일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어쩌다 시간이 생기면 오랜만에 딸을 만나야 했고 나는 그 날들 중 하루가 또렷이 기억이 난다.
때는 크리스마스를 앞둔 시점의 어느 주말이었고, 집에 가기 전에 버스 정류장 근처 소품점에서
화려한 크리스마스 카드를 하나 골랐다.
선물을 사주면 다음에 만나기 전까지 잘 있어주겠거니 기대하는 마음으로 사줬을까-
엄마를 만난 것만으로도 신이 났는데 거기에 선물까지 얻은 나는 막바지에 한껏 들떠버렸다.
그렇게 같이 집으로 갔다면 완벽한 하루였을 테지만 엄마가 없는 일상으로 혼자 돌아가야 했고
기뻤다가 슬펐다가, 크게 요동치는 마음을 덤덤히 감당하기에 나는 너무 어렸다.
엄마의 뇌물 같은 선물을 손에 들고 꾸역꾸역 버스에 올랐다. 창 밖에 엄마를 보니 또 다가온 이별이 미워서 그렇게 서럽게 울었던 기억이 난다. 버스 안 어른들은 누구 하나 다그치지 않고 어린 내가 다 울기를 기다려주셨다.
나는 집에 돌아가 그때를 그림으로 그리며 속상한 마음을 혼자 달랬다.
버스 안에 그려진 나, 나를 보는 뒷모습으로 그려진 우리 엄마.
그때 엄마의 표정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슬픔은 너무 날카롭고, 어린 날의 슬픔은 생채기를 깊게 남기는 것 같다.
어린 줄도 모르고 여린 줄도 모르고, 그렇게나 깊게 베고 간다.
어렸던 나는 남처럼 지나가지 않았고 여전히 나이다. 이별의 순간은 이미 다 지나갔지만
나는 여전히 그때가 또렷해 서글프다.
우리 엄마는 내가 어떤 순간들을 기억하는지 알까,
우리의 기억은 얼마나 비슷할까.
나는 지금 엄마와 매우 가깝지만 예전의 그 젊은 우리 엄마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우리 모녀는 많은 대화를 하는 반면 서로의 온전한 감정까지는 잘 나누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어떻게 그때의 미안함을 달랬는지, 노력해도 당장 달라지지 않을 상황 앞에서 얼마나
무기력함을 느꼈을지, 애써 기운 낸 하루의 끝이 아이의 눈물이었으니 얼마나 마음이 무거웠을지는 앞으로도 묻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식과 진솔한 감정을 나눈다는 것은 부모에게 참 어려운 일이다.
특히나 어린 나이에 부모의 마음을 알아라- 하는 것은 아이에게 빨리 어른이 되라고 강요하는 일인 것 같다.
그래서 우리 엄마는 그 아픈 속을 내게 알려주지 않았다.
나는 자라면서 가끔, 엄마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하기도 했다.
어린 나는 엄마보다 겁이 없었고 익숙한 것보다는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자랐으니
엄마는 예상보다 과감한 내 선택들에 이따금씩 놀랐다.
성인이 되었지만 아직 독립하지 못한 학생이었을 때, 애매하게 보호자의 의무가 남은 엄마는 나를
대체로 믿었지만 그 믿음보다 큰 것은 나에 대한 걱정이었다.
그 걱정들이 내 선택들 중 몇 가지를 크게 바꾸기도 했다.
대학생 시절 엄마와 가장 크게 겪은 갈등은 전공 변경에 대한 선언에서 발생했다.
그때 나는 심리학과로 전과하기를 희망했지만 엄마는 완강히 반대했다.
나도 엄마도 그 분야에 대해 잘 몰랐고, 내딛지 않은 길 앞에서 엄마는 나에 대한 믿음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결국 나는 엄마의 의견대로 입학 당시의 전공으로 졸업을 했고 전공과는 관련이 없는 직업을 가지게 되었다.
결과론적이긴 하지만, 이럴 거였으면 그때 전과를 했어야 했다-라는 후회를 했고
결혼 후에까지도 심리학과로 대학원 진학을 할 수 있을지 여전히 고민하기도 했었다.
그만큼 간절히 바라던 것이었지만 끝내 이루지 못했던 까닭은, 잘 해낼 수 있다는
자만스러운 마음보다 엄마를 불안하게 하지 않아야 한다는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엄마의 걱정과 반대를 무릅쓰고 밀어붙였던 일도 있다.
25살 가을, 아르바이트 비용을 모아 혼자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해보지 않고서 후회하는 일이 더는 없어야 했고, 처음이자 마지막일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엄마는 공항버스 터미널로 배웅해 주면서도 떠나는 나를 심란하게 바라보았다. 네 뜻대로 하니 속이 후련하냐-고 말하는 듯 화가 난 얼굴 같기도 했다.
비록 걱정은 시켰지만 엄마는 주변에 딸 이야기를 할 때 그때의 나를 뿌듯하게 덧붙였다.
내가 이런 모습들을 좀 더 빨리 보여줬다면 어땠을까,
엄마는 바쁘고 외롭고 지쳐있었을 테지만 딸의 제법 단단한 내면을 좀 더 자주 들여다봐 줬다면 어땠을까,
나는 종종 자만스럽게 굴어볼 수 있었을까.
그러면서도 다소 도전적인 딸의 여러 선택들에 쉽게 그래라- 하지 못했던 것이 못내 미안할 엄마가 가여웠다.
내가 너무 천천히 철이 든 것 같아 미안했다.
우리 모녀는 어느 시절에나 엄마로서 딸로서 각자의 역할에 최선을 다 했지만
안타깝게도 오직 행복만이 따라오지는 않았다.
엄마는 그래도 늘 그 행복을 좇았다.
내가 자란 가정에는 오랫동안 숱한 고난들이 있었고 야속하게 닥쳐오는 고비들을 지금 내 나이보다 어렸던 엄마는 홀로 외로이 넘어가야 했다. 그 세월을 오롯이 견뎌내면서도 틈틈이 행복할 방법을 찾는 사람이었다.
그 인내와 희생을 감히 흉내라도 낼 수 있을까,
나는 우리 엄마의 딸로서 자란 것이 항상 자랑스러웠다.
우리 모녀는 여전히 서로에 대해 모르는 면이 많다.
내성적이라고 생각했던 엄마는 나보다 더 스몰토크에 능하고, 처음 보는 사람들이어도 금새
주변에 모으는 능력이 있었다. 엄마는 일머리가 굉장히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내가 일을 해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고 온라인 게임 상사로 만났다면 많이 존경했을 것 같다고 느끼기도 했다.
엄마는 내가 어느 나이만큼 자라길 기다렸다가 그때에 맞추어 새로운 모습들을 공개해 왔다.
우리 모녀는 여전히 서로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짐작하고, 적당한 때에 필요한 말로 서로를 위하는 방법을 택한 것 같다.
마냥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세상에 오직 부모뿐임을 엄마가 되어서야 깨닫는다.
부모의 길이 이토록 아득하고 먼 것인지 엄마가 되어서야 보게 되었다. 막연한 두려움 앞에서 여전히
나는 엄마를 찾게 된다. 이 길 앞에서 나를 이끌어달라고, 내가 가야 할 길을 헤매지 않도록 잡아달라고.
엄마가 계속 어른이시면 좋겠다. 엄마도 내가 계속 의지해주기를 바라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