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수막이 전하는 개인의 소식들
한때 나의 인생 목표는 ‘입신양명’이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이름을 널리 떨치는 것만을 중요한 일로 여기던 시기가 있었다. 그런데 ‘입신양명’의 구체적인 물적 증거는 무엇일까. 묘비명에 관직을 새기는 것? 뉴스에 내 인사이동 소식이 실리는 것? 내가 생각한 가장 가까운 예시는 바로 현수막이었다. 내가 대학 입시를 준비하며, 행정고시를 준비하며 상상한 영예로운 합격 뒤에는 늘 현수막이 걸린 풍경이 있었다.
지방선거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지금, 이곳에는 여기저기 당선 축하 현수막들이 나붙어 있다. 대학 합격은 물론이고 각종 고시, 전문 자격증 시험의 합격, 사무관 승진 그리고 이런저런 상의 수상 소식들도 현수막 소식통의 단골 소재다. 출생과 결혼처럼 보다 개인적인 경사들도 가끔은 현수막에 실리곤 한다. 출산 축하 현수막은 타 인구소멸지역에서도 가끔 볼 수 있는 모양이고, 우리 지역에서는 ‘자녀 결혼 알림’ 현수막이 걸린 적도 있다. 다들 웅성거렸지만(아니 결혼한다고 현수막씩이나 걸어?) 그걸 내건 사람이 광고사 사장이어서 그러려니 하고 넘기긴 했었더랬다.
지역슬롯에서 현수막은 중요한 정보 전달 통로 중 하나이다. 지방선거 개표방송에서 군의원 개표현황을 알려주지도 않는 소도시에서는 더욱 그렇다. 다음날 아침 출근길에 아파트 입구 현수막을 통해 바로 당선자를 알 수 있었으니까 속도도 꽤 빠르다. 나에게는 포털을 검색해 보면 바로 알 수 있는 정보지만, 어른들에게는 그렇지가 않으니까.
게다가 현수막에 실린 정보는 상당히 구체적이기까지 하다. 행간에 숨은 내용까지 포함하면 너무나 사적이라서, ‘아니 제가… 생판 남인 제가 이런 정보까지 알아도 될까요…?’싶을 때가 많다.
얼마 전 두 군데 정도에서 본 현수막을 하나 뜯어보자면 이렇다. ‘고ㅁㅁㅁ/ㅇㅇㅇ의 자 ㅁㄷㄷ 무슨 로펌 합격, 가족 일동’. 간단명료한 내용 속에 상당히 많은 디테일이 있다. 부모님 성함과 본인의 이름 석 자가 숨김없이 기재된 데다가 정확한 온라인 게임명까지 있다. 게다가 내 배경지식과 현수막의 위치를 종합해 볼 때 ㅁ씨는 그 동네 집성촌의 성씨라는 걸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아마 이전에는 변호사 시험 합격, 이런 현수막도 걸렸으리라. 심지어 이건 상세한 축에도 못 든다.
공무원 인사철이 지나면 여기저기에 사무관 승진 축하 현수막이 걸린다. 여기서 사무관은 과장•면장급으로, 각 면에는 그 마을 출신 사무관의 승진 현수막이 걸리게 되며 해당 시기에 지역 내를 한 바퀴 좍 돌면 조직도를 얼추 그려볼 수 있을 정도이다. 한 사람에 대해서 한 장의 현수막만 붙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종합해 보면 결국 부모님 성함에서부터 집안(무슨 성씨 무슨 파 종중), 당사자의 나이까지도 알게 되는 것이다(축하합니다, 계묘생 친구들 일동).
그 외에도 누가 한우경진대회에서 상을 탔다든가 장관상을 받았다든가 하는 수상소식도 현수막에 실려 동네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 그러다가 수상자의 부모 이야기, 자녀 이야기까지 화제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현수막이 쏘아 올린 작은 공이랄까. 한우경진대회 금상 수상자의 아버지는 싸움소 사육으로 유명했었는데 그 아들은 한우를 기르고 있으며, 형제들은 각자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식으로 이야기는 끊임없이 흘러간다.
이쯤 되면 현수막은 거들뿐, 이미 사람들이 남의 집 숟가락 개수를 꿰고 있는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출신 마을을 알고 부모님의 직업과 자녀 수는 알 지언정 정작 당사자의 이름 석 자는 현수막을 보기 전엔 모르는 걸 보면 시골의 개인정보라는 개념은 도시와는 어딘지 다르다고 할 수밖에.
애초에 부모님이 누구이고 어느 집안사람인지, 어디 마을에 사는지는 개인정보라기보다 배경지식의 일부로 취급되는 곳이다. 또한 누군가가 얻은 영예는 곧 그 집안의 명예이니까, 사소한 정보 노출쯤이야 감수할 만하다.
어찌 됐든 나같이 젊은 축에게는, 현수막이 미처 몰랐던 새로운 정보를 알려주는 통로임에 분명하다. 꼼꼼히 읽어보는 게 재밌기도 하고, 개인사 외에도 중요한 소식들이 오프라인을 통해 전해지는 경우가 많은 시골이기에 나는 항상 현수막을 눈여겨보며 다닌다. 입신양명의 꿈은 멀리 날아가 버린 지 오래이고, 지금의 난 유명해지더라도 아무도 나를 몰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말이다. 현수막을 걸 일도 이제 드물 테고.
그런데 글을 쓰다 보니 괜스레 그런 생각이 든다. 혹시 출간소식도 보통 현수막을 다나? 등단이나 문학상 수상이라면 걸 것도 같은데. 뭐, 그 이전에 출간을 할 수 있는지가 문제 아닐까? 꼬리를 무는 생각은 상상 속 어느 아주머니들의 대화로 이어진다. “거 현수막에 보니까 누가 바카라 냈다카든데 뉘 집 며느리라 카던데.” “그 시장 안에 있다이가, 그 전기집 옆에…”
아무도 나를 모르는데 유명해지기, 아무래도 여기서는 글렀지 싶다.
(개인정보가 들어가는 이야기는 일부 디테일에 각색을 거쳤고, 대표 이미지는 닉네임을 넣어 ai로 생성한 가상의 이미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