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에 들어온 계절, 생활의 기준이 되다
이번 장날 내 쇼핑리스트 맨 위에는 산딸기가 있었다. 마트에서 산 딸기가 절반만 살아남은 뒤로, 신선도가 생명인 제철 과일은 시장에서 사야겠다고 맘먹은 참이다.
6월 초 오일장의 풍경은 이런저런 식재료들로 매우 화려했다. 이맘때 좌판은 빨강 주황 초록으로 알록달록 보는 맛이 있다. 산딸기는 물론 마트에서는 보기 힘든 오디며 보리수 같은 열매들과 고구마순과 머위줄기, 쑥갓과 호박 이파리. 비 온 뒤 솟아난 죽순, 꾸물꾸물 다슬기에 미꾸라지까지. 시장바닥 곳곳에는 초록색 망에 담긴 연초록 매실 포대도 놓여 있었다.
문득 2주 전쯤 어머님에게 걸려온 큰어머님의 전화 한 통이 떠올랐다. “장에 매실 나왔드나?” 당시에는 아직이던 매실이 이번 장부터 여기저기서 모습을 드러냈다. 큰어머님은 장에 나오셨을까, 매실들은 지금쯤 켜켜이 쌓인 설탕 속에서 재워지고 있으려나.
가시가 적고 색이 연한 백오이도 요즘 많이 보이는 품목이다. 우리 어머님의 이번 장날 일정은 백오이로 오이지 담그기. 제철에 박스채로 사서 담가두면 일 년을 두고 먹을 수 있다. 어른들의 일정은 장날에 맞춰 움직인다.
매실청에 오이지 같은 일 년 치 음식 장만 외에도, 계절에 따라 장날이 돌아오면 할 일이 산더미이다. 열무가 나오기 시작하면 여름 내내 열무김치 담그기, 생멸치가 나오면 멸치 지져서 상추랑 멸치쌈밥 해 먹기. 김장철이 다가오면 시장 곳곳에서 말린 고추가 담긴 비닐포대를 내놓는다. 몇 포대 사다가 방앗간에서 빻는 걸 지켜보는 것까지 끝내야 고춧가루 준비가 마무리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날이 풀리기 시작하면 밭에 심을 모종들을 장날에 맞춰 사 두어야 한다.
시장 안에서 가게를 운영하면서 나의 일상도 어느새 그 흐름을 따르게 되었다. 특정 품목을 장날에 구입하는 루틴이 생겼고, 살 물건을 정해두고 장이 서는 날짜를 헤아리곤 한다. 장날마다 살 수 있는 것들이 있는 반면, 특정 시기의 장날에만 구할 수 있는 것들도 있다.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시장에서 원하는 물건을 구하려면 달력 체크는 필수다.
지난 3월에는 매 장날마다 가게 앞 화분을 하나씩 사 모아 왔다(꽃피는 봄이 되면 그리 크지도 않은 시장인데도 대 여섯 군데에서 화초류, 약용식물, 모종들을 판다). 지지난달 우리 가게 맞은편 떡집에서는 쑥을 팔러 온 할머님들을 자주 목격할 수 있었는데, 그 쑥들은 장날에 두 가지 고물로 무친 쑥인절미와 쑥절편과 쑥설기가 되어 가판대 위에 올라왔다. 그 덕에 올해는 쑥떡도 원 없이 먹었다.
지역의 자연을 이만큼 한눈에 볼 수 있는 장소도 없다. 매실이 언제부터 익기 시작했는지 밭의 고구마 순은 얼마나 자랐는지. 올해 미꾸라지는 좀 잡히는지. 수확시기, 자연의 생태, 기후와 작황조차 미루어 짐작 가능하다. 심지어 지네약까지 계절에 맞춰 등장한다. 엄마가 지네에 물리셨던 게 몇 주전이더라?
겨우내 쪼그라든 시장은 3월 두릅과 쑥과 나물들의 향연을 지나 6월부터는 알록달록 다채롭게 융성한다. 난데없는 상상이지만 만약 타임슬립을 하게 되어 시장 한복판에서 깨어난다면 연도는 몰라도 몇 월인지는 알 수 있지 않을까?
농부들은 몸으로 계절을 느낄 수 있지만 시골에 사는 사람이 모두 농사를 짓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장에만 가도 계절은 생산물의 모습으로 우리를 매번 찾아온다. 주로 다섯 날마다. 철에 따라 풍경을 달리하는 장날은 생활의 기준이 된다.
돌아오는 장날은 토요일. 이번 토요일에 어머님은 열무김치를 담그실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