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보는 사람의 눈 (호기심이 직업과 생활을 바라보는 방식이 되다)
공간에 들어가면 나는 물건보다 사람을 먼저 본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일을 시작하고 도면을 그리고 여러 공간을 경험하면서 조금씩 생긴 버릇이다. 어떤 공간에 들어서면 문이 어디에 달려 있는지, 벽이 어떤 재료로 마감되어 있는지, 가구가 어떻게 놓여 있는지를 보기 전에 그곳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어디에서 멈추고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는지가 눈에 들어온다.
설계를 시작하면 숫자가 먼저 나온다. 문 폭은 얼마인지, 복도의 폭은 어느 정도인지, 천장 높이는 얼마인지, 가구의 크기는 어떤지 정해야 한다. 사람의 몸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여러 치수도 참고한다. 평균적인 신장과 손이 닿는 높이, 사람이 움직일 때 필요한 공간 같은 것들이다.
숫자는 중요하다. 숫자가 틀리면 문이 열리지 않거나 사람이 지나가기 어렵고, 의자에 앉았을 때 무릎이 걸리기도 한다. 하지만 숫자만으로 사람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
키가 큰 사람과 작은 사람이 같은 세면대 앞에 서도 몸을 움직이는 방식은 다르다. 어린아이는 어른에게 맞춰진 스위치에 손이 닿지 않을 수 있고, 휠체어를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문 앞에서 몸을 돌리고 들어가기까지 필요한 여유 공간이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손의 힘이 약하거나 관절을 자유롭게 움직이기 어려운 사람에게는 손잡이의 모양과 위치도 단순한 디자인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치수를 정할 때도 이 숫자를 누가 사용하는지를 한 번 더 생각한다.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의 몸이 모두 같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설계에서 보이는 것이 조금 달라진다.
자동문이나 경사로도 그렇다. 누군가에게 자동문은 손에 짐을 들고 있을 때 편리한 문이고, 누군가에게 경사로는 계단을 대신해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길이다. 같은 시설이라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이런 생각은 장애인을 위한 시설을 따로 마련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처음부터 다양한 사람이 이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려는 유니버설 디자인과도 이어진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장벽을 없애려는 배리어 프리 운동이 확산되었고, 1980년대에는 미국의 건축가 로널드 메이스가 유니버설 디자인이라는 개념을 제안하면서 이러한 생각이 보다 넓게 다뤄졌다.
나는 그 역사를 공부하면서도 결국 눈에 들어온 것은 거창한 철학보다 문 하나와 경사로 하나였다.
특히 시각장애인이 공간을 이용하는 방식을 생각하면 설계자가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이 다시 보인다.
우리는 공간에 들어가면 눈으로 방향을 찾는다. 안내 표지를 보고 계단을 찾고, 엘리베이터 위치를 확인하고, 사람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서 어디로 가야 할지 판단한다. 하지만 앞을 볼 수 없다면 공간을 찾아가는 방법부터 달라진다. 발밑의 촉감, 지팡이에 전해지는 바닥의 변화, 소리의 방향, 주변의 움직임 같은 다른 정보가 필요하다.
점자블록도 단순히 바닥에 표시를 붙이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입구에서 점자블록을 따라가면 어디에 도착하는지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 길에 기둥이나 가구가 놓여 있지는 않은지, 중간에 방향이 끊기지는 않는지, 계단이나 엘리베이터 앞에서 다음 이동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지를 살펴야 한다. 표시가 있다는 사실보다 그 표시를 따라 실제로 이동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음성 안내도 마찬가지다. 안내방송이 있다고 해서 충분한 것은 아니다. 어디에서 어떤 정보가 필요한지를 생각해야 한다. 입구에서는 건물의 기본적인 방향을 알려주는 것이 필요할 수 있고, 엘리베이터 앞에서는 층이나 이동 방향에 관한 정보가 더 중요할 수 있다.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정보가 들려야 한다.
그래서 내가 공간을 살필 때는 먼저 발밑의 길을 본다. 입구에서 들어와 어디로 가는지, 점자블록이 끊기지 않는지, 안전하게 방향을 바꿀 수 있는지를 확인한다. 그다음 눈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부분을 음성 안내가 어디에서 보완할 것인지 생각한다. 시설을 많이 설치하는 것이 좋은 설계는 아니다. 사람이 움직이는 순서에 맞춰 필요한 곳에 필요한 것을 놓는 일이 중요하다.
이런 생각은 결국 내가 공간을 보는 방식과 연결되어 있다.
도면 위에서는 복도 폭이 숫자로 표시된다. 그러나 실제 공간에서는 그 복도를 걷는 사람이 있다. 누군가는 가볍게 지나가고, 누군가는 벽 쪽으로 몸을 붙인다. 누군가는 앞사람을 피해 잠깐 멈추고, 누군가는 방향을 찾느라 주변을 살핀다.
그래서 나는 설계를 하면서 머릿속으로 그 공간을 한 번 걸어본다.
문을 열고 들어간다. 어디가 먼저 보이는지 살핀다. 복도를 따라가고, 어디에서 멈출 것 같은지 생각한다. 처음 온 사람이라면 무엇을 모를지, 익숙한 사람이라면 무엇을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지도 떠올려본다.
같은 장소라도 이용하는 사람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다르다.
눈이 잘 보이는 사람에게는 쉽게 찾을 수 있는 안내가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을 수 있다. 어린아이의 눈높이에서 보면 어른에게는 당연한 위치에 있는 것이 너무 높을 수도 있다. 휠체어를 탄 사람에게는 의자 하나가 지나갈 길을 막는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도면을 보고도 실제 사람을 떠올린다.
어릴 때 마당의 개미굴 앞에 쪼그리고 앉아 개미가 어디로 가는지 바라보았다. 산길에서 이름 모를 꽃을 만나면 한 번 더 들여다보았고, 나무뿌리가 드러나 있으면 왜 그렇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버스를 타고 창가에 앉으면 사람들이 오르고 내리는 모습을 보았고, 같은 길을 지나면서도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풍경을 살폈다.
그때는 그것이 설계와 연결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궁금해서 본 것이었다.
그런데 일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 오래 바라보는 습관이 공간을 바라보는 눈에도 남아 있다는 것을.
도면에서는 문 하나가 문 하나일 뿐이다. 숫자로는 폭과 높이를 표시하면 된다. 하지만 실제 문 앞에는 사람이 서 있다.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여는 사람이 있고, 유모차를 밀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고, 뒤따라오는 사람을 위해 문을 잠시 잡아주는 사람이 있다. 누군가는 문 앞에서 방향을 바꾸고, 누군가는 좁은 공간 때문에 한 걸음 물러선다.
그 작은 움직임을 보고 나면 같은 문도 전과 다르게 보인다.
좋은 공간을 만드는 일이 반드시 특별한 것을 더하는 일은 아니다. 때로는 사람이 불편해하는 한 지점을 찾아내고 그것을 없애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문을 조금 넓히고, 손이 닿는 위치를 바꾸고, 이동하는 길에 놓인 것을 치우고, 필요한 순간에 정보를 전달하는 것처럼 작은 변화가 사람의 움직임을 바꾼다.
어릴 때 내가 궁금했던 것은 별것 아닌 것들이 많았다. 개미가 어디로 가는지, 비가 그친 뒤 물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나무뿌리가 왜 땅 위로 드러나는지 같은 질문이었다. 답을 바로 얻지도 못했다. 그래서 한참 바라보았다.
그 버릇이 오래 남았다.
공간에 들어가면 먼저 사람이 보인다.
누가 편하게 지나가는지, 누가 한 번 더 멈추는지, 누가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몸을 움직여야 하는지.
나는 그런 작은 움직임을 보고 나서야 벽과 가구의 위치를 다시 바라본다.
어릴 때의 호기심과 지금의 설계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작은 같았다.
한 번 더 보는 것.
그리고 그냥 지나치지 않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