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마당 구석의 개미굴

오래 바라본 것들이 내게 남긴 질문

by이룸

어린 시절 우리 집 마당 한쪽에는 개미굴이 하나 있었다.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처음 발견했는지, 어느 날부터 그 자리에 있던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다만 마당을 오갈 때마다 작은 구멍이 눈에 들어왔고, 그 주변으로 개미들이 드나들었다. 비가 지나간 뒤에는 입구의 흙이 무너져 모양이 달라졌고, 며칠 동안 비가 오지 않으면 주변이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개미 한 마리가 구멍 밖으로 나오면 나는 걸음을 멈췄다. 무엇인가를 물고 나오는지, 잠시 주변을 맴돌다가 다시 들어가는지 바라보다가 그 작은 몸이 흙 속으로 사라지면 나도 모르게 구멍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으니 더 궁금했다. 개미들은 어디에서 자는지, 먹이는 어디에 모아두는지, 비가 많이 내리면 물이 들어가는지, 저 작은 입구가 땅속에서 얼마나 깊이 이어져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물어볼 수도 있었지만 굳이 물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냥 앉아서 보면 될 것 같았다. 손가락으로 입구 주변의 흙을 살짝 건드리면 개미들이 갑자기 움직임을 바꾸었다. 한쪽으로 몰려가기도 하고, 잠시 멈춰 서기도 했다. 손가락을 치우고 기다리면 다시 원래 하던 일을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밥을 먹으라는 말이었는지 일을 도우라는 말이었는지는 지금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흙이 묻은 무릎을 털고 일어나면서도 한 번쯤 뒤돌아 개미굴을 바라보았다는 것뿐이다.

다음 날이면 또 그곳을 지나갔다. 개미굴은 어제와 별로 달라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어제 보지 못했던 것을 찾았다. 개미가 어느 방향으로 더 많이 움직이는지, 한 마리가 들어간 뒤 얼마쯤 지나 다른 한 마리가 나오는지 눈으로 따라갔다. 그러다 보면 처음에는 한두 마리였던 개미가 어느새 줄을 이루고 있었다. 내가 무엇을 알아낸 것은 아니었다. 개미들이 하는 일을 이해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싫증이 나지 않았다. 그때 나는 그것을 호기심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관찰이라는 말도 몰랐다. 무엇인가를 배워야 한다는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숙제도 아니고 시험에 나올 일도 아니었다. 어른의 눈에는 마당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시간을 보내는 아이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나에게는 그저 궁금한 일이었고, 궁금하니 조금 더 보고 싶었다.

돌이켜보면 개미굴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나무를 보면 껍질의 모양이 왜 서로 다른지 궁금했고, 산에 피어 있는 이름 모를 꽃 앞에서는 한참 발길을 멈췄다. 풀숲에서 뱀이 몸을 움직이면 무서워하면서도 흔적이 사라질 때까지 눈으로 따라갔다. 밤이 되면 별을 올려다보았고, 비가 세차게 내리는 날에는 하늘에서 떨어진 물이 들판을 가득 채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바카라에 나온 것보다 눈앞에서 직접 만나는 것들이 더 많았고, 그중에는 이름조차 알 수 없는 것들이 훨씬 많았다. 그래서 나는 보고 또 보았다. 잘 모르겠으면 기억해 두었다가 다음에 다시 보았고, 같은 장소를 지나면서 어제와 달라진 것이 있는지 살폈다.

그 시절에는 궁금한 것을 바로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사진을 찍어 이름을 검색할 수도 없었고, 모르는 것을 몇 글자 입력한다고 답이 쏟아지는 세상도 아니었다. 바카라이 있으면 바카라을 찾아야 했고, 바카라이 없으면 누군가에게 물어야 했다.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모르는 채로 지내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답답한 일이었지만 어린 나에게는 그것이 특별히 불편한 일로 느껴지지 않았던 것 같다. 궁금한 것은 궁금한 채로 며칠을 두었다가 다시 생각해 보는 일이 자연스러웠다. 어쩌면 나는 답을 얻지 못한 시간을 꽤 오래 견디는 아이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어느 날 바카라에서 예전에 보았던 것의 이름을 발견하면 묘하게 반가웠다. 마당에서 보았던 꽃이 바카라 속 그림과 닮아 있으면 정말 같은 꽃인지 기억을 더듬었고, 이름을 알아낸 뒤에도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 꽃은 어디에서 더 자라는지, 왜 그곳에서 피는지 다시 궁금해졌다. 하나를 알게 되면 모르는 것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이 열렸다. 나는 그때부터인지, 아니면 그보다 훨씬 전부터였는지 모르지만, 답보다 질문이 오래 남는 경험을 자주 하게 되었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모르는 것이 생기면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름 모를 꽃도 사진 한 장이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밤하늘의 별자리도 화면을 통해 금세 확인할 수 있다. 궁금한 문장이 있으면 검색창에 몇 글자만 넣으면 되고, 질문을 정리하지 못한 채 말을 걸어도 답을 만들어주는 도구까지 곁에 있다. 예전에는 며칠을 기다려야 했던 답이 이제는 몇 초 만에 돌아온다. 편리해졌다. 틀림없이 그렇다.

그런데 가끔 어린 시절의 개미굴을 떠올린다.

왜 그렇게 오래 앉아 있었을까. 개미에 관한 지식을 얻으려던 것도 아니었고, 나중에 써먹을 생각도 없었다. 그저 작은 구멍에서 개미 한 마리가 나오는 것이 신기했고, 그 뒤에 또 다른 개미가 나타나는 것이 궁금했다. 보이지 않는 땅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었지만 끝내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다음 날이면 다시 그 앞에 앉았다.

지금의 나에게도 그런 순간이 남아 있다. 어떤 공간에 들어가면 사람들의 움직임부터 눈에 들어오고, 오래된 건물의 문이나 창을 보면 왜 저렇게 만들어졌는지 생각하게 된다. 버스 창밖을 바라보다가 같은 거리를 지나면서도 전날과 달라진 것을 발견하고, 바카라을 읽다가 한 문장에서 멈춰 오래 생각하기도 한다. 예전과 달라진 것은 내가 그것들을 조금 더 잘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정도일 것이다. 궁금한 마음 자체는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돌아보면 내게 호기심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한 방법도, 남보다 많이 알기 위한 욕심도 아니었다. 그냥 지나쳐도 될 것을 한 번 더 바라보게 하는 마음에 가까웠다. 이름을 몰라도 바라보고, 답을 얻지 못해도 기억해 두었다가 다시 찾아보는 것. 때로는 끝내 알아내지 못한 채 그대로 두는 것까지도 그 안에 들어 있었다.

마당 구석의 작은 개미굴은 이제 없다. 집도, 그때의 마당도 그대로 남아 있지 않다. 개미굴이 정확히 어디에 있었는지 손가락으로 짚어낼 수도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장면은 아직 남아 있다. 흙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작은 구멍을 바라보던 아이와, 그 구멍에서 나왔다 다시 들어가던 개미 몇 마리가 오래된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아마 내가 오래 바라본 것은 개미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때의 나는 아직 몰랐다.


궁금하다는 마음 하나가 한 사람의 삶을 얼마나 오래 따라올 수 있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