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령산

구름의 조각에서 마음의 빛을 보다

by진경수
“새벽어둠 속 용암사를 지나 운무대에서 일출을 맞고, 거북바위와 왕관바위가 이어지는 능선을 걸어 장령산 정상에 선 뒤 같은 길로 돌아온다.
완전하지 않은 풍경에 감사하고, 마음이 만들어내는 형상을 알아차리며, 소박과 평등을 품은 천년 산사의 문턱으로 귀환한다.”



DSC_0192.JPG장령산 정상/사진 진경수




정상 : 장령산 656m

출발 : 용암사 주차장

거리 : 약 5.75km 왕복

주제 : 감사와 인연

산행일 : 2022. 11. 27.



장령산 등산지도.png





01. 온전하지 않은 풍경에도 감사하다


DSC_0091.JPG운무대의 운해와 일출/사진 진경수




“운해의 조각만 볼 수밖에 없지만, 그저 감사할 뿐이다.”

운무대에 올랐지만 기대했던 절경은 온전히 펼쳐지지 않았다. 구름바다는 조각으로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부족한 풍경을 아쉬워하기보다 지금 허락된 만큼을 바라보니, 작은 구름 한 자락도 선물이 된다.



“완전한 순간을 기다리느라 지금 눈앞의 아름다움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삶은 언제나 기대한 모습으로 찾아오지 않는다. 조건이 모두 갖추어져야 행복할 수 있다고 믿으면 감사는 자꾸 뒤로 미뤄진다. 산은 온전하지 않은 새벽에도 빛을 내어주며, 지금 가진 것에서 충만함을 발견하라고 일러준다.




DSC_0122.JPG거북바위의 운해와 일출/사진 진경수




“갈라진 바위의 좁은 틈으로 아침 햇살은 더 선명하게 들어왔다.”

왕관바위의 틈새를 몸을 낮추며 조심스레 빠져나가자 어둡던 틈 사이로 햇살이 번진다. 막힘은 빛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한 줄기 빛을 더욱 또렷하게 드러내는 배경이 된다.


새벽의 어둠과 좁은 바위틈을 지나온 뒤라서 햇살은 더욱 따뜻하다. 어려움이 저절로 삶을 빛나게 하지는 않지만, 그 시간을 통과한 마음은 작은 빛도 알아보는 눈을 갖게 된다.




02. 마음이 만든 형상을 알아차리다


DSC_0276.JPG거북바위/사진 진경수




“세상의 모든 현상은 마음이 만드는 것임을 새삼 깨닫는다.”

커다란 바위 위에 놓인 작은 바위들은 보는 위치에 따라 거북이 되기도 하고 자라가 되기도 한다. 바위는 그대로인데 이름과 모습은 보는 사람의 마음에서 달라진다. 내가 확실하다고 믿는 판단도 한 방향에서 바라본 일부에 불과할 수 있다.



“대상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자리와 내 마음이 달라진 것이다.”

한 걸음 옮기면 익숙했던 형상이 흐트러지고 다른 모습이 나타난다. 사람과 세상을 이해하는 일도 이와 같다. 내 시선만을 진실이라 고집하지 않고 다른 자리에서 다시 바라볼 때, 판단은 부드러워지고 이해의 폭은 넓어진다.




DSC_0140.JPG왕관바위의 빛/사진 진경수




“왕관도 수행자의 얼굴도 결국 지금 내가 품은 생각이 빚어낸 형상이다.”

왕관바위라고 불리지만 어느 부분이 왕관인지 분명하지 않다. 나는 바위 끝에서 활구 참선하는 수행자의 얼굴을 발견한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바위는 친근해지지만, 그 이름을 절대적인 실체로 믿는 순간 마음은 다시 허상에 갇힌다.


산은 아무 말 없이 수많은 얼굴을 허락한다. 중요한 것은 무엇으로 보이느냐보다, 왜 그렇게 보았는지를 돌아보는 일이다. 마음의 습관을 알아차릴 때 비로소 우리는 대상뿐 아니라 자신을 함께 바라보게 된다.




03. 오는 사람 막지 않는 소박으로 돌아오다


DSC_0242.JPG수행자 얼굴바위/사진 진경수




“정상에 조망이 없어도, 장령산 능선을 제대로 걸었다는 것으로 충분했다.”

장령정에서 굴참나무 숲길을 지나 정상에 닿는다. 정상은 나무에 둘러싸여 시원한 조망을 내어주지 않는다. 그러나 산행의 가치는 정상에서 보이는 풍경만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새벽의 운해와 바위틈의 빛, 능선의 걸음이 이미 마음을 채웠다.



“정상은 얻는 곳이라기보다, 지나온 길이 충분했음을 확인하는 자리다.”

같은 길로 되돌아가는 것은 반복이 아니다. 오를 때 놓친 풍경을 다시 보고, 흥분 속에서 지나친 마음을 차분히 거두는 일이다. 목적지에 닿은 뒤 돌아갈 줄 아는 사람에게 산행은 성취가 아니라 온전한 순환이 된다.




DSC_0218.JPG장령정에서 바라본 옥천읍내 전경/사진 진경수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 산사의 고요를 배운다.”

새벽에는 운해와 일출을 향해 서둘러 지나쳤던 용암사를 하산길에 천천히 둘러본다. 사찰은 등산객에게 경내의 길을 내어주고 누구의 발걸음도 차별하지 않는다. 비워둔 길과 열린 문은 말보다 깊은 환대가 된다.


차별 없는 세상과 모두가 평등한 세상은 거창한 선언보다 소박한 마음에서 시작된다. 더 높아 보이려는 욕심을 덜고, 오는 이를 가리지 않으며, 떠나는 이를 붙잡지 않는 태도. 장령산에서 밝힌 무명의 등불은 결국 내 마음을 단순하고 넓게 만드는 일이었다.




DSC_0321.JPG용암사/사진 진경수




산이 남긴 질문


나는 완전한 순간을 기다리느라 지금의 아름다움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진실이라 믿는 모습은 마음이 만든 하나의 형상일 뿐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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