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이름 앞에서 나를 낮추다
“솔이네펜션 맞은편에서 가파른 숲길을 올라 저승봉 암장과 로프 구간을 지나 정상에 선다. 아름마을 삼거리와 학현야영장 삼거리를 거쳐 거친 북사면으로 내려온 뒤 학현소야로를 따라 원점으로 돌아오는 길.
자연을 인간의 기준으로 이름 붙이는 마음을 돌아보고, 산을 사랑하는 사람이 산을 지켜야 할 의무와 어떤 환경에서도 잃지 말아야 할 본성을 배운 산행이다.”
정상 : 저승봉 596m
출발 : 솔이네펜션 뒤편
거리 : 약 5.5km 원점회귀
주제 : 본성과 의무
산행일 : 2022. 12. 11.
01. 두려움 너머의 풍경을 만나다
“곧추선 바위를 몇 단계로 오르니 다리가 후들거린다.”
낙엽이 수북한 가파른 숲길과 나무뿌리가 드러난 비탈을 지나자 거대한 암벽이 앞을 막는다. 높이를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몸이 먼저 긴장한다. 두려움은 나약함의 표시가 아니라 위험을 알아차리는 마음의 감각이다.
“힘든 것만큼 멋진 풍광으로 보상받는다.”
로프를 단단히 잡고 한 발 한 발 바위에 올린다. 용기는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두려움을 품고도 앞으로 나아가는 태도다. 힘든 숨 끝에 열린 능선의 풍경은 쉽게 받은 장면보다 오래 마음에 남는다.
“산은 서두르는 사람보다 자신의 한계를 살피는 사람에게 길을 내어준다.”
암릉에서는 힘보다 중심이 중요하다. 손에 힘을 주되 몸에 힘을 더하지 않고, 앞사람의 속도를 따르기보다 내 발이 놓일 자리를 먼저 살펴야 한다. 산은 남보다 서둘러 가는 능력이 아니라 스스로를 바르게 아는 지혜를 요구한다.
삶의 험한 구간에서도 마찬가지다. 무작정 버티는 것이 용기는 아니다. 멈추어 숨을 고르고, 도움을 받을 줄 알며, 지나온 발판을 살피는 사람이 끝내 안전하게 앞으로 나아간다.
02. 자연의 이름 앞에서 마음을 낮추다
“위대한 자연의 티끌에도 못 미치는 인간이 어찌 자연을 인간의 기준으로 재단할 수 있을까.”
저승봉 정상석에는 본래의 이름 대신 미인봉이라고 새겨져 있다. 바위 능선을 사람의 아름다움에 비교하여 붙인 이름이다. 그러나 아름다움과 추함을 가르는 기준은 인간의 마음에서 나온 것일 뿐, 자연은 어느 쪽도 고르지 않는다.
“자연은 아름답거나 못난 것이 아니라, 그저 제 모습으로 있다.”
우리가 붙인 이름은 대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지만, 이름이 자연보다 앞서면 자연은 인간의 취향 속에 막힌다. 산 앞에서 마음을 낮춘다는 것은 이름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 그 이름으로 산의 본래 모습을 가리지 않는 일이다.
“인간이 접근하기 힘든 곳일수록 자연은 더 경이로운 모습을 간직한다.”
거친 암릉에는 여러 형상의 바위와 세월을 이겨낸 노송이 어우러져 있다. 사람의 손길이 쉽게 닿지 못한 곳에서 자연은 자신의 질서와 속도를 지켜왔다. 편리함이 닿지 않았기에 남을 수 있었던 아름다움이다.
모든 곳을 소유하고 이용하려는 마음을 거둘 때 자연은 비로소 우리와 함께한다. 가까이 다가가는 것만이 사랑은 아니다. 때로는 멀리서 바라보고, 자국을 남기지 않으며, 제자리에 있도록 두는 것이 더 깊은 사랑이다.
03. 산을 사랑한다면 산의 마음도 생각하다
“산이 좋아 산을 찾지만, 산이 나를 좋아해서 받아주는지도 생각해 본다.”
능선의 풍경을 즐기며 걷다가 길가에 버려진 쓰레기를 발견한다. 산을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산에 상처를 남기는 일은 모순이다. 나는 여러 곳의 쓰레기를 주워 배낭에 담으며 산을 찾는 사람의 의무를 돌아본다.
사랑은 마음속 감탄에 머물지 않는다. 머문 자리를 바르게 하고, 다른 생명의 자리를 침범하지 않으며, 다음 사람에게 온전한 길을 건네는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산을 좋아하는 것에서 산도 좋아할 사람이 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
“차디찬 얼음 속에서도 자신의 색깔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본다.”
북향의 하산길에는 흙과 낙엽이 얼어붙고, 바위에서 이어지던 물은 고드름이 되었다. 그 차가운 틈에서도 이끼는 제 빛깔을 간직한다. 환경은 자연의 모습을 바꾸지만 그 안의 생명까지 잃게 하지는 못한다.
삶에도 마음을 얼게 하는 계절이 찾아온다. 그때 필요한 것은 특별한 사람이 되는 일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지키고 싶은 나의 본성을 잃지 않는 일이다. 저승봉은 험한 길 끝에서 자연 앞에 마음을 낮추고, 머문 자리에 의무를 다하며, 차가운 시간에도 제 색을 잃지 말라고 일러준다.
산이 남긴 질문
나는 대상을 내 기준으로 이름 붙이며 본래의 모습을 가리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에 맞는 의무를 다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