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속에서 본래의 나를 만나다
“옥순봉쉼터에서 청풍호를 바라보며 출발해 높낮이가 이어지는 숲길과
첫눈이 내린 암릉을 걷는다.
무영봉을 지나 조망 없는 가은산 정상에 닿은 뒤
전망대와 정오바위를 거쳐 돌아오는 길.
화려함을 벗은 숲에서 본래의 아름다움을 보고, 흐릿한 풍경 속에서 차별 없는 마음을 배우며, 정상보다 지나온 길이 더 깊은 기억으로 남는 산행이다.”
정상 : 가은산 575m
출발 : 옥순봉 쉼터 주차장
거리 : 약 7.1km 원점회귀
주제 : 비움과 본래
산행일 : 2022. 12. 3.
01. 화려함을 벗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다
“모든 빛깔을 떨구고 순수한 아름다움으로 돌아간 본래의 모습을 본다.”
한때 짙푸른 잎과 화려한 단풍으로 자신을 드러냈던 숲은 겨울 문턱에서 모든 치장을 내려놓았다. 남은 것은 나무의 몸과 길의 윤곽, 낙엽을 밟는 소리뿐이다. 덜어낸 풍경 앞에서 비로소 꾸밈없는 존재의 힘이 보인다.
“비운다는 것은 사라지는 일이 아니라, 본래의 나를 더 또렷하게 드러내는 일이다.”
삶에서도 우리는 무엇을 더 갖추어야 자신이 완성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산은 잎을 떨군 뒤에도 나무가 나무임을 잃지 않는다. 이름과 성취와 타인의 시선을 잠시 내려놓을 때, 가려져 있던 마음의 결이 모습을 드러낸다.
“암릉길에 내려앉은 첫눈이 바위를 뽀얗게 분칠하고 있다.”
깎아지는 암벽의 계단을 오르자 싸라기눈이 흩날린다. 눈은 거친 화강암의 표정을 부드럽게 바꾸고, 익숙한 산길을 처음 만나는 풍경으로 되돌려 놓는다. 자연은 큰 변화가 아니라 얇은 눈 한 겹으로도 세계를 새롭게 한다.
우리의 하루도 바라보는 마음에 따라 달라진다. 같은 길이라도 고단함만 헤아리면 오르막이고, 첫눈의 선물을 알아보면 축복이 된다. 새로움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익숙한 것에 다시 눈을 뜨는 데서 시작된다.
02. 흐릿해질수록 차별은 사라진다
“세상의 사물을 구별할 수 없으니 차별도 없고 갈등도 없다.”
눈과 운무가 청풍호와 산줄기의 경계를 흐린다. 가까운 것과 먼 것, 높은 곳과 낮은 곳이 한 빛깔 안에서 포개진다. 분명하게 나누어 보려는 눈을 잠시 쉬게 하자 풍경은 본래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온전히 간직한다.
“경계가 흐려진 자리에서 서로 다른 것들은 하나의 풍경이 된다.”
갈등은 대상을 구별하는 데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 차이에 우열을 매길 때 깊어진다. 산과 호수와 운무는 서로의 자리를 빼앗지 않고 함께 수묵화를 완성한다. 사람 사이의 다름도 판단보다 어울림의 눈으로 바라볼 때 삶을 넓히는 결이 된다.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드는 허상이니 그저 그러려니 한다.”
곰바위와 코끼리바위라 불리는 기암을 요리조리 살펴보지만 그 형상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바위가 틀린 것도, 내 눈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이름은 대상을 친숙하게 하지만, 때로는 보아야 할 모습을 미리 정해놓는다.
그저 그러려니 하는 마음은 무관심이 아니다. 내 판단을 절대적인 진실로 붙잡지 않는 여유다. 바위가 어떤 동물을 닮지 않아도 바위로서 충분하듯, 사람도 내가 기대한 모습과 다르다는 이유로 부족한 존재가 되지는 않는다.
03. 정상보다 지나온 길에서 충분해지다
“정상은 밋밋하고 조망도 신통치 않지만, 산행의 기쁨은 이미 길 위에 있었다.”
가은산 정상은 표식 하나와 숲뿐이다. 정상에서 장엄한 풍경을 얻으려 했다면 허탈할 수도 있다. 그러나 청풍호를 바라본 첫걸음, 첫눈을 맞은 암릉, 소나무와 바위가 만든 조화가 이미 마음에 차곡차곡 쌓였다.
목적지가 기대에 미치지 못해도 그곳에 이른 과정까지 초라해지는 것은 아니다. 삶의 성취도 마지막 장면 하나로만 평가할 수 없다. 정상은 무엇을 더 얻는 곳이라기보다, 지나온 길이 이미 충분했음을 알아차리는 자리다.
“해가 바위에 걸리면 사람들은 일손을 멈추고 점심을 먹었다.”
정오바위는 시계가 귀하던 시절, 상천리 사람들의 하루에 쉼표를 찍어주었다. 해의 움직임과 바위의 위치를 살피며 일하고 쉬었던 삶에는 자연의 시간과 사람의 시간이 나뉘지 않았다.
오늘 우리는 시간을 정확히 재지만 제때 멈추는 일에는 서툴다. 산이 건네는 지혜는 단순하다. 오를 때가 있으면 쉬어갈 때가 있고, 얻을 때가 있으면 내려놓을 때가 있다. 첫눈 속 가은산을 걷고 돌아오는 길, 나는 더 빨리 가는 법보다 내 삶의 정오를 알아보는 법을 배운다.
산이 남긴 질문
나는 무엇을 더해야 나다워진다고 믿고 있는가.
오늘 내 삶에서 일손을 멈추고 마음을 돌아볼 정오바위는 어디에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