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산

바위와 낙조 사이에서 본래의 나를 만나다

by진경수
“무암사 입구에서 남근석 암릉을 올라 성봉과 남근와석, 중봉을 지나 동산 정상에 선 뒤 새목재와 무암사로 내려온다.
직벽에서 떨리는 몸을 다스리고, 자연이 빚은 형상 앞에서 인간의 상상을 돌아보며, 낙엽길과 수인, 저녁 낙조에서 번뇌를 내려놓는 법을 배운다.”



DSC_0279.JPG동산 정상/사진 진경수




정상 : 동산 896m

출발 : 무암사입구

거리 : 약 8km 원점회귀

주제 : 용기와 무념

산행일 : 2022. 11. 20.




동산 등산지도.png





01. 떨리는 손으로 다음 바위를 붙잡다



DSC_0082.JPG남근석을 지나 암릉을 오르다/사진 진경수




“다리가 후들거리고 손아귀에 쥐가 날 만큼 긴장하면서도, 나는 로프를 놓지 않았다.”

남근입석을 지나자 완만하던 암릉은 곧추선 직벽으로 바뀐다. 몸은 먼저 두려움을 알아차리고, 손은 본능처럼 로프를 움켜쥔다. 용기는 떨림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떨리는 몸을 데리고도 다음 바위를 붙잡는 마음이다.



“고도가 높아진 만큼 시야도 열리고, 힘겨운 오름은 넓은 풍경으로 돌아왔다.”

직벽 위에 서자 지나온 암릉과 무암사, 청풍호의 푸른 물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높이는 저절로 얻어지지 않는다. 숨이 차고 손아귀가 아팠던 시간이 있었기에, 멀리 바라볼 수 있는 자리가 내 것이 된다.




DSC_0113.JPG직벽을 오르다/사진 진경수




“험한 길은 나를 위협하는 벽이면서, 동시에 더 넓은 세상으로 오르게 하는 사다리였다.”

지그재그로 걸린 로프에 의지해 또 하나의 직벽을 오른다. 아래에서는 막막한 벽이었던 바위가 위에 서면 조망을 내어주는 발판이 된다. 삶의 장애물도 어느 순간에는 나를 가로막지만, 넘고 난 뒤에는 이전보다 높은 시선의 바탕이 된다.


청풍호가 멀리 산자락의 끝을 품고 있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면 거친 암릉과 포근한 산사, 푸른 물과 마른 능선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한 풍경 안에 머문다. 서로 다른 것들이 함께 있을 때 세상은 더 깊어진다.





02. 자연의 형상에서 이름 너머를 보다



DSC_0152.JPG직벽을 오르며 바라본 청풍호/사진 진경수




“자연의 조화는 인간의 상상을 가볍게 넘어선다.”

성봉에서 학현리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에는 눈여겨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쉬운 나무와 바위가 숨어 있다. 사람은 익숙한 형상을 발견하면 곧 이름을 붙이지만, 자연은 그 이름보다 오래전부터 제 모습으로 존재해 왔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가까워지지만, 이름에 갇히는 순간 본래의 모습은 멀어진다.”

서 있는 바위와 누운 바위, 여성과 남성의 형상을 닮은 나무를 바라보며 자연의 유희를 느낀다. 그러나 형상은 자연이 건네는 첫인상일 뿐이다. 그 너머에는 비바람을 견딘 시간과 말없이 자리를 지켜온 생명의 깊이가 있다.




DSC_0217.JPG남근와석/사진 진경수




“낙엽 밟는 소리 속에서 무명에서 벗어나는 무상무념의 시간을 갖는다.”

중봉에서 동산으로 향하는 육산에는 굴참나무 낙엽이 수북하다. 바삭거리는 소리에 발걸음을 맞추자 머릿속을 채우던 생각이 하나씩 잦아든다. 특별한 수행이 아니라 걷고 듣고 숨 쉬는 단순한 일이 마음을 본래 자리로 돌려놓는다.


무상무념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공백이 아니다. 지나간 일과 오지 않은 일을 잠시 내려놓고, 지금 밟는 낙엽과 지금 쉬는 숨에 온전히 머무는 일이다. 정상에 이르기 전, 마음은 먼저 불필요한 짐 하나를 내려놓는다.





03. 낙조 앞에서 삶의 마지막 빛을 생각하다



DSC_0355.JPG쇠뿔바위/사진 진경수




“번뇌를 멈추고, 자신이 본래 맑은 존재임을 곧바로 알아차리라는 뜻일까.”

무암사 경내로 들어서기 전 두 바위가 만든 석굴에서 손 모양의 수인을 만난다. 자연이 새긴 손은 무엇을 더 붙잡으라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쥐고 있던 생각과 욕심을 잠시 놓고 지금의 나를 바로 보라고 말하는 듯하다.



“깨달음은 멀리 있는 답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있던 것을 알아보는 순간이다.”

산행 내내 정상과 기암을 찾아 걸었지만, 마지막에 남은 것은 바깥의 형상보다 내 마음의 움직임이다. 두려워하고 감탄하고 이름 붙이며 걷던 내가 고요해질 때, 산은 비로소 말없이 나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DSC_0392.JPG자연적으로 형성된 수인(手印)/사진 진경수




“언젠가 저 낙조처럼 세상을 밝히고 조용히 사라져야 할 텐데.”

극락보전에서 삼배를 올리고 나오니 해가 뉘엿뉘엿 산 너머로 기운다. 지는 해는 사라지는 순간에도 산사와 나무와 사람의 얼굴을 따뜻하게 밝힌다. 삶의 마지막은 빛을 거두는 시간이 아니라 남은 빛을 나누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동산에서 얻은 것은 정상의 높이보다 살아갈 자세였다. 두려움 속에서도 손을 놓지 않는 용기, 이름 너머의 본질을 바라보는 시선, 번뇌를 내려놓고 지금에 머무는 마음, 그리고 마지막까지 누군가의 길을 밝혀주는 삶. 낙조를 등지고 돌아오는 길에 그 문장들이 오래 남았다.




DSC_0396.JPG무암사의 노을/사진 진경수




산이 남긴 질문


나는 두려움 때문에 다음 바위를 붙잡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 삶의 마지막 빛은 누구의 길을 따뜻하게 밝혀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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