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비봉

안개 너머에서 산을 다시 바라보다

by진경수
“장회나루 맞은편 탐방로에서 가파른 계단과 암릉을 올라 제비봉 정상에 선 뒤 같은 길로 돌아온다. 안개가 가린 풍경에서 기다림을 배우고, 바위와 고사목에서 생기 있게 늙어가는 법을 읽으며, 닳고 패인 탐방로 앞에서 아름다움을 누리는 사람의 바카라임을 생각한다.”



DSC_0111.JPG제비봉 정상/사진 진경수



정상 : 제비봉 721m

출발 : 제비봉 탐방로 입구

거리 : 약 5.8km 왕복

주제 : 기다림과 배려

산행일 : 2022. 11. 10.



제비봉 등산지도.png





01. 안개가 가린 자리에서 기다림을 배우다



DSC_0019.JPG거칠고 가파른 길을 오르다/사진 진경수




“가파른 계단과 철제 난간을 반복해 오르며, 나는 보이는 것보다 한 걸음 앞을 믿었다.”

탐방로 초입부터 계단은 가파르고 암릉은 거칠다. 멀리 보이지 않는 날에는 발 앞의 돌과 다음 난간에 마음을 모아야 한다. 삶의 길이 안개에 싸일 때도 마찬가지다. 먼 목적지가 보이지 않아도 지금 내디딜 한 걸음은 언제나 눈앞에 있다.


기다림은 멈추어 서 있는 일이 아니다. 시야가 열릴 때까지 성급히 결론짓지 않고, 자신의 속도로 길을 이어가는 일이다. 안개는 걷는 사람을 답답하게 하지만, 동시에 가까운 것부터 제대로 바라보게 한다.




DSC_0043.JPG운무 속으로 들어가다/사진 진경수




“오리무중의 신비함은 앞으로 펼쳐질 제비봉의 절경을 더욱 기대하게 한다.”

운무가 장회나루와 구담봉을 희미하게 가린다. 산세를 분간하기 어려운 날이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풍경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산은 서둘러 모든 것을 보여주지 않고, 걷는 이에게 기다릴 시간을 먼저 내어준다.



“운무 속에서 뻗어 나온 바위 줄기는 한 폭의 수묵화와 같았다.”

선명함만이 아름다움의 조건은 아니다. 흐릿한 능선은 빈자리를 상상으로 채우게 하고, 감추어진 풍광은 마음의 눈을 더 오래 머물게 한다. 삶도 앞날이 분명하지 않을 때가 있지만, 그 모호함 속에서 기대와 가능성은 조용히 자란다.




02. 바위와 나무가 들려준 생명의 문장



DSC_0053.JPG사랑받는 만큼의 아픔/사진 진경수




“아름다운 산은 사랑받는 만큼 몸살을 앓고 있었다.”

등산객의 발길이 쌓인 바위는 하얀 속살을 드러냈고, 손길이 거듭 닿은 소나무의 허리는 반질반질하게 닳았다. 사랑한다는 마음만으로 모든 행동이 정당해지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애정은 가까이 다가가는 기쁨과 함께 해치지 않으려는 절제를 품어야 한다.



“바위틈에 뿌리를 박은 소나무는 척박한 자리에서도 제 삶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

비스듬한 암반 위에서 소나무는 생명수를 찾아 사방으로 뿌리를 뻗는다. 좋은 조건을 기다리기보다 주어진 자리에서 살아갈 길을 만든다. 환경은 삶의 모양을 바꾸지만, 살아가려는 의지까지 대신 결정하지는 못한다.




DSC_0181.JPG고사목의 당당함/사진 진경수




“늙음은 세월 따라 힘없이 쇠하는 것이 아니라, 생기 있게 늙어가는 일이어야 한다.”

마지막 계단 끝에서 만난 고사목은 잎도 푸른 기운도 없지만 놀라울 만큼 당당하다. 죽음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가는 것이 생명의 이치라면,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래 사느냐보다 어떤 모습으로 시간을 통과하느냐일 것이다.


고사목 곁의 젊은 소나무가 오히려 애잔하게 느껴진다. 생기는 나이의 많고 적음에서만 오지 않는다. 자신이 지나온 세월을 감추지 않고, 마지막까지 제 모습으로 서 있는 존재에게서 삶의 깊이와 품격이 드러난다.





03. 정상보다 깊은 하산의 시선



DSC_0169.JPG제비봉 성채아(城砦岩)/사진 진경수




“오를 때 드러나지 않았던 암릉은 내려가는 길에서 비로소 모습을 펼쳤다.”

정상에 오른 뒤 같은 길을 내려오지만 풍경은 같지 않다. 오를 때에는 숨과 발걸음에 가려졌던 바위 능선과 청풍호가 하산길에서 한 폭의 그림으로 열린다. 지나온 길도 시선을 바꾸면 전혀 다른 의미를 건넨다.



“힘들게 올라오는 시간보다 아름다움 앞에 머무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하산은 정상의 감동을 서둘러 접는 과정이 아니다. 바쁘게 오르느라 놓친 것을 다시 보고, 성취에 가려졌던 주변을 살피는 시간이다. 삶에서도 목표를 이룬 뒤 잠시 돌아볼 때 비로소 함께한 사람과 견뎌온 시간이 선명해진다.




DSC_0213.JPG청풍호를 내려다보며 하산하다/사진 진경수




“제비봉 탐방로에도 이제는 잠시 쉴 시간이 필요하다.”

사람에게 쉼이 필요하듯 산에도 회복의 시간이 필요하다. 아름다운 풍경을 오래 누리고 싶다면, 우리는 산을 소비하는 방문자가 아니라 다음 사람에게 온전히 건네는 보호자가 되어야 한다.


제비봉 산행에는 절경의 기쁨과 훼손의 안타까움이 함께 남았다.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리는 마음, 고사목처럼 생기 있게 나이 드는 태도,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한 걸음 물러설 줄 아는 배려. 그 세 가지가 산에서 일상으로 가져온 제비봉의 가르침이다.




DSC_0313.JPG운무 걷힌 제비봉 능선/사진 진경수




산이 남긴 질문



나는 보이지 않는다고 너무 빨리 포기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사랑하는 것을 오래 지키기 위해 기꺼이 한 걸음 물러설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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