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서 놓아야 비로소 보이는 것

by진경수

산에 갈 때마다 배낭을 꾸린다. 물과 간식, 여벌 옷, 필요한 장비를 챙긴다. 혹시 필요할까 싶어 하나를 더 넣고, 이것도 있으면 좋겠다 싶어 또 하나를 넣는다. 집에서 배낭을 들 때는 견딜 만하다. 그러나 오르막을 한 시간쯤 걷고 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등을 짓누르는 무게가 또렷하게 느껴진다. 그때 생각한다.


‘이것을 왜 가져왔을까.’


산은 필요와 욕심을 꽤 정확하게 구별해 준다. 내가 가진 것은 평지에서 자랑이 될 수도 있지만 오르막에서는 모두 무게가 된다. 삶도 그랬다.



가지는 법은 배웠는데 놓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젊은 날에는 손에 쥐는 법을 많이 배웠다. 기회를 잡아라. 꿈을 놓치지 마라. 성공을 붙잡아라. 좋은 말들이다. 나 역시 그렇게 살았다. 한번 시작한 일은 쉽게 놓지 않았고, 부족한 것이 있으면 배우려고 했다. 자격 하나를 얻으면 또 다른 공부에 도전했다. 그런데 우리는 이상하리만큼 놓는 법은 배우지 않는다.


언제까지 붙들어야 하는지, 언제 손을 펴야 하는지, 무엇을 다음 사람에게 넘겨야 하는지는 잘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래서 가진 것이 많아질수록 손에 힘도 더 들어간다. 놓으면 잃을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손을 꽉 쥐고 있으면 새로운 것을 받을 수도 없다. 그 단순한 사실을 나는 오래 지나서야 생각하게 되었다.



오래된 서랍을 열었을 때


가끔 서랍을 정리하다 보면 오래전 물건이 나온다. 언젠가 필요할 것 같아 넣어둔 서류. 한동안 쓰다가 잊어버린 물건. ‘혹시 모르니 두자’며 보관했던 것들. 그런데 몇 년 동안 한 번도 찾지 않았다. 물건만 그런 것이 아니다. 마음속에도 그런 서랍이 있다. 오래전 들었던 서운한 말. 누군가에게 인정받지 못했던 기억. 내가 옳았다는 것을 아직도 증명하고 싶은 마음. 이미 끝난 일인데 마음속에서는 끝내지 못한 일. 그런 것들이 생각보다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물건은 눈에 보여 버릴 수라도 있다.


마음속 짐은 보이지 않으니 더 오래 들고 다닌다. 어쩌면 삶의 후반에 해야 할 정리는 옷장이나 서랍보다 마음속 묵은 짐을 골라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놓는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인가를 놓는 일이 어려운 까닭은 그것이 사라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 내 역할이 줄어드는 것 같고, 자리를 내주면 내 존재감도 작아지는 것 같다. 오래된 물건을 버리면 그 안에 담긴 추억까지 없어지는 듯하다. 그러나 꼭 그렇지는 않았다.


내가 하던 일을 후배에게 넘겼다고 내가 쌓은 경험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경험이 다음 사람에게 건너가면 다른 모습으로 살아남는다. 부모가 자식의 손을 놓는다고 사랑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손을 놓아야 그 사람이 자기 길을 걷는다. 놓음은 관계의 끝이 아니라 관계의 모양을 바꾸는 일이기도 했다.


노자는 『도덕경』 제48장에서 아주 흥미로운 말을 한다.


爲學日益, 爲道日損. (위학일익 위도일손)

배움은 날마다 더해가지만, 도를 따르는 일은 날마다 덜어낸다는 뜻으로 읽힌다.


공부를 좋아하는 나에게 이 구절은 묘하게 다가온다. 나는 지금까지 공부란 계속 더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식을 더하고, 경험을 더하고, 능력을 더하는 것. 그런데 노자는 한쪽에서 損, 덜어내라고 한다. 무엇을 덜어내라는 것일까.


나는 요즘 그것을 지식이 아니라 지식에 붙어 있는 자만, 경험이 아니라 경험에 붙어 있는 고집을 덜어내라는 말처럼 읽는다. 많이 배우되 많이 배웠다는 마음은 가볍게 하는 것. 오래 살되 오래 살았으니 내가 옳다는 생각은 덜어내는 것. 가진 것은 늘어도 그것에 붙잡히는 마음은 줄여가는 것. 그런 뺄셈이라면 나도 계속 배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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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으니


산길에서 쉬려고 배낭을 내려놓으면 순간적으로 몸이 가벼워진다. 어깨를 짓누르던 무게가 사라진다. 그제야 허리를 펴고 먼 곳을 바라본다. 참 묘하다. 배낭을 메고 걸을 때는 발밑만 보았는데 내려놓으니 풍경이 보인다.


삶에서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일을 잠시 내려놓으니 사람이 보였다. 결과에 대한 집착을 조금 놓으니 과정에서 얻은 것이 보였다. 내가 옳다는 생각을 내려놓으니 상대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가 보였다. 놓는 순간 손에서 사라진 것보다 눈앞에 나타난 것이 더 많을 때가 있었다.


그래서 놓음은 상실만은 아니었다. 때로는 시야를 되찾는 일이었다.



버려야 할 것과 남겨야 할 것


나이가 든다고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끝까지 붙들어야 할 것도 있다. 배우려는 마음. 사람에 대한 예의. 일에 대한 바카라임.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 고마움을 잊지 않는 마음. 그런 것은 오래 품고 싶다.


대신 조금씩 내려놓고 싶은 것이 있다. 남과 비교하는 마음. 이미 지난 일에 대한 서운함.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 내 방식이 가장 옳다는 고집. 필요 이상으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 삶의 뺄셈은 무작정 버리는 일이 아니라 무엇을 끝까지 남길 것인지 골라내는 일이었다.


나는 아직도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싶다. 하고 싶은 일도 있다. 그러니 삶의 후반을 ‘정리하는 시간’이라고만 부르고 싶지는 않다. 다만 예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채우고 싶다. 무엇인가 하나를 더 얻기 전에 물어보는 것이다.


‘이것이 정말 내게 필요한가.’


그리고 무엇인가를 오래 붙잡고 있을 때도 묻고 싶다.


‘이것을 이제 놓아도 되지 않을까.’


손을 펴는 연습. 어쩌면 그것도 나이 들어 배우는 새로운 공부다. 살아보니 놓는다는 것은 빈손이 되는 일이 아니었다. 손을 펴야만 만질 수 있는 바람도 있었다. 그리고 꽉 쥐었던 손을 펴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는 풍경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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