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나에게 낮아지는 법을 가르쳤다

by진경수

정상은 높은 곳에 있다. 그런데 산을 오래 다닐수록 산에서 배우는 것은 이상하게도 높아지는 법보다 낮아지는 법이었다.


처음 산에 오를 때는 정상을 향해 고개를 든다. 하지만 길이 가팔라지면 자연스럽게 고개가 내려간다. 발밑을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돌을 딛고, 나무뿌리를 넘고, 미끄러운 흙을 피하며 걷는다. 높은 곳을 향해 갈수록 오히려 머리를 숙여야 한다. 산이 내게 보여준 작은 역설이다.



산은 내 명함을 묻지 않았다


산에 들어가면 세상에서 나를 설명하던 것들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어떤 직함을 가졌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얼마나 많은 경험이 있는지 산은 묻지 않는다.


가파른 오르막에서는 누구나 숨이 찬다. 비가 오면 누구나 젖는다. 돌에 발을 잘못 디디면 누구나 넘어질 수 있다. 산 앞에서는 사람의 직함보다 한 걸음을 제대로 내딛는 일이 중요하다.


그래서 산에 들어가면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다. 세상에서 붙이고 다니던 이름표 몇 개를 산 아래에 놓아두고 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높이 올라갈수록 몸은 낮아졌다


산에는 몸을 낮춰야 지나갈 수 있는 곳이 있다. 낮게 드리운 나뭇가지를 만나면 허리를 굽힌다. 가파른 바위에서는 손까지 땅에 댄다. 때로는 엉덩이를 낮추어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한다. 그때 체면을 차릴 사람은 없다. 넘어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삶도 그랬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높은 자리에 갈수록 오히려 몸과 마음을 세우려 할 때가 있다. 경험이 많아질수록 내 말이 맞다고 생각하고, 직바카라이 높아질수록 다른 사람이 내 말을 따라야 한다고 여기기 쉽다.


산의 이치는 반대였다. 높이 갈수록 더 낮추어야 안전했다. 이것이 삶에도 필요한 자세가 아닐까.


노자는 『도덕경』 제66장에서 강과 바다가 수많은 골짜기의 왕이 되는 까닭을 이렇게 말한다.

以其善下之. (이기선하지)

잘 낮추기 때문이다.


강과 바다가 많은 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스스로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다. 이 문장을 읽으면 사람의 마음도 그릇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 생각을 가장 높은 곳에 올려놓으면 다른 사람의 생각이 흘러들어올 곳이 없다. 내가 조금 낮아지면 비로소 들어오는 것이 있다. 젊은 사람의 새로운 생각. 직원의 솔직한 의견. 가족의 서운함. 내가 잘못 알고 있었다는 사실. 낮아짐은 나를 작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받아들일 공간을 만드는 일이었다.



정상에서도 하늘은 더 높았다


정상에 서면 높은 곳에 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고개를 들면 하늘은 여전히 한없이 높다. 산 하나를 올랐을 뿐인데 세상을 다 오른 듯 생각할 이유가 없다. 공부도 그렇다. 하나를 알면 모르는 것이 더 많이 보인다. 일도 그렇다. 경험이 쌓일수록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긴다. 사람은 더 그렇다. 오래 만났다고 그 사람의 마음을 다 안다고 할 수 없다.


그래서 경험이 쌓일수록 확신보다 질문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내가 놓친 것은 없을까?”


그 질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낮은 곳에서 올려다본 얼굴


산을 내려오면 다시 사람 사는 곳으로 돌아온다. 주차장이 있고, 작은 식당이 있고, 함께 걸었던 사람들이 있다. 정상에서 바라본 장대한 풍경도 좋지만 이상하게 오래 남는 것은 내려와 함께 먹는 따뜻한 밥 한 끼일 때도 있다.


결국 사람은 높은 곳에서 오래 살 수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곳은 대부분 낮은 곳이다. 일하고, 먹고, 이야기하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 곳. 삶은 거기에서 이어진다.


그래서 이제 산에 오르는 이유도 조금 달라졌다. 높아지기 위해 오르는 것이 아니라, 다시 낮은 곳으로 잘 돌아오기 위해 오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산은 말이 없다. 그런데 갈 때마다 비슷한 것을 가르친다. 고개를 숙여라. 발밑을 보아라. 너무 서두르지 마라. 높이 올라왔다고 오래 머물려하지 마라. 그리고 다시 사람 사는 곳으로 내려가라. 나는 아직도 그 수업을 듣는 중이다.


살아갈수록 더 높아지는 사람이 아니라, 높은 곳에 갈수록 마음을 낮출 줄 아는 사람. 그것이 산에서 배운 또 하나의 공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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