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오는 길에서 더 조심해야 했다

by진경수

정상에 도착하면 마음이 놓인다. 가장 힘든 일이 끝났다고 생각한다.


“이제 내려가기만 하면 되지.”


이 말이 산에서는 꽤 위험한 말이다. 내려가는 길이 오르는 길보다 쉬워 보이기 때문이다.


숨은 덜 차고, 힘도 덜 드는 것 같다. 그러나 몸은 이미 지쳐 있다. 다리에는 피로가 쌓였고, 집중력도 떨어진다. 내리막에서는 체중이 앞으로 쏠린다. 작은 돌 하나, 젖은 나뭇잎 한 장, 보이지 않던 나무뿌리 하나가 발을 흔든다. 그래서 나는 산을 오래 다닐수록 정상보다 하산을 더 조심하게 되었다.



‘다 왔다’는 마음이 가장 먼저 미끄러진다


하산에서 위험한 것은 돌만이 아니다. 마음이다. 정상에 올랐다는 성취감 때문에 긴장이 풀린다. 목적을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발끝의 주의도 느슨해진다.


삶에서도 그렇지 않을까. 일이 잘 풀렸을 때, 성과를 이루었을 때, 슬롯적으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을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생각한다.


‘이제 이 정도면 됐다.’


바로 그때부터 조심해야 할 것이 생긴다. 성공보다 성공 이후의 태도. 자리보다 그 자리에서 내려오는 모습. 가졌던 것을 어떻게 나누고, 경험을 어떻게 건네며, 내가 없는 자리에서도 다른 사람이 설 수 있게 하는가.


올라갈 때는 능력이 필요하지만, 내려올 때는 품격이 필요할 때가 있다.



내려가는 것은 실패가 아니다


우리는 ‘올라간다’는 말을 좋아한다. 승진한다. 성장한다. 상승한다. 도약한다. 반대로 ‘내려간다’는 말에는 어딘가 쓸쓸한 느낌이 묻어 있다. 퇴직, 은퇴, 물러남, 노쇠.


하지만 산에서는 아무도 하산을 실패라고 하지 않는다. 정상에 오른 사람이 내려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오히려 내려오지 않으면 산행이 끝나지 않는다. 이 단순한 사실이 어느 순간 마음을 건드렸다.


삶에서 내려오는 일도 반드시 패배는 아닐 것이다. 자리를 후배에게 내어주는 것. 내가 하던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 앞에서 끌기보다 뒤에서 지켜보는 것. 이것들은 작아지는 일이 아니라 삶의 역할이 바뀌는 일일 수 있다.



잘 내려오는 사람


산에서 능숙한 사람을 보면 하산할 때 오히려 서두르지 않는다. 보폭을 줄인다. 발을 디딜 곳을 확인한다. 몸의 중심을 낮춘다. 필요하면 스틱을 짚는다. 자신의 체력을 과신하지 않는다.


삶의 후반에도 그런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내 경험을 과신하지 않는 것. 몸의 변화를 인정하는 것. 예전과 같은 속도를 고집하지 않는 것. 도움이 필요하면 기꺼이 손을 빌리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끝까지 자기 발밑을 살피는 것.


나이가 들었다고 삶의 공부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섬세하게 배워야 하는 시간이 온다.



다음 사람에게 길을 내어주는 일


좁은 산길에서 뒤에서 빠른 사람이 오면 옆으로 비켜선다.


“먼저 가세요.”


예전에는 앞서가는 사람을 보며 나도 속도를 높였을지 모른다. 이제는 보내준다. 그 사람이 먼저 간다고 내 산행이 작아지는 것은 아니다.


삶에서도 언젠가는 그런 때가 온다. 젊은 사람이 더 빠르게 움직인다. 새로운 기술을 더 빨리 익힌다. 내가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일을 한다. 그때 해야 할 일은 길 한가운데 서서 내 속도를 따라오라고 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길을 조금 내어주는 것. 그리고 필요할 때 뒤에서 지켜보는 것. 그것 역시 먼저 걸어온 사람의 역할이다.


노자는 『도덕경』 제9장에서 말한다.


功遂身退, 天之道. (공수신퇴, 천지도)

공을 이루면 몸을 물리는 것이 하늘의 도라는 뜻이다.


젊은 날에는 ‘신퇴(身退)’라는 말이 쓸쓸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지금은 조금 다르다. 물러남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계절이 다음 계절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것처럼, 한 역할을 마치고 다른 역할로 옮겨가는 일일 수 있다. 봄이 여름에게 자리를 내주었다고 봄이 실패한 것은 아니다. 꽃이 진다고 꽃이 피었던 시간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잘 물러난 자리에는 다음 사람이 피어날 공간이 생긴다.



마지막 하산을 생각한다


산행에는 언제나 마지막 하산이 있다. 오늘의 산에서도 내려와야 하고, 언젠가는 내가 좋아하는 산을 더 이상 오르지 못하는 날도 올 것이다. 삶에도 마지막 하산이 있을 것이다. 그 생각이 예전처럼 무겁지만은 않다. 중요한 것은 언제 내려가느냐만이 아니라 어떤 모습으로 내려가느냐일 테니까. 끝까지 모든 것을 움켜쥐고 내려오는 사람보다, 하나씩 건네며 가벼워지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배운 것은 다음 사람에게 건네고, 내가 가진 기술과 경험도 남겨주고, 미안했던 사람에게는 미안했다고 말하고, 고마웠던 사람에게는 더 늦기 전에 고맙다고 말하는 것. 배낭을 조금씩 가볍게 만드는 것이다. 나는 이제 산 정상에서 하산길을 오래 바라본다. 올라온 길보다 내려갈 길에 마음을 둔다.


등산화 끈을 다시 확인하고, 배낭을 고쳐 메고, 첫발을 천천히 내딛는다. 정상에 올랐다고 산행이 끝난 것이 아니다. 어쩌면 그때부터 산은 더 중요한 것을 가르친다. 잘 올라왔는가 보다 잘 내려가고 있는가를.


삶의 후반을 걷는 지금, 나는 정상의 높이보다 하산의 자세를 더 생각한다. 서두르지 않고, 발밑을 살피며, 뒤에 오는 사람의 길을 막지 않고, 때로는 먼저 가라고 길을 내어주면서. 그리고 마침내 산 아랫사람 사는 곳에 도착했을 때, 오늘도 무사히 한 산을 다 걸었다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인생도 그랬으면 좋겠다. 정상에 얼마나 높이 올랐는지가 아니라, 마지막까지 얼마나 온전하게 걸어 내려왔는지가 한 사람의 삶을 완성하는 마지막 문장이 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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