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우리 이사 가는 거 아니지?

by지노아


숙소를 정하고 나면 본격적으로 짐을 싸기 시작한다. 여권, 독일 거주증(한국으로 치면 주민등록증), 보험카드, 그리고 국경을 넘을 나라의 고속도로 통행 방식 확인까지. 독일은 고속도로에 톨게이트가 없어서 마음이 편한데, 국경 하나만 넘으면 나라마다 통행료를 내는 방식이 달라진다. 이걸 미리 챙기지 않으면 몇 주, 심하면 몇 달 뒤 우편함이 “그때 그 고속도로, 기억나시죠?” 하며 세금 편지로 안부를 물어온다.


몇 번의 여행을 겪으며 우리 가족에게 새롭게 등장한 준비물이 생겼는데, 그중 하나가 멀미약이다. 한국에서는 2~3시간이면 어디든 도착했으니 멀미 같은 건 몰랐는데, 여기서는 이동 거리부터 기본 200km를 넘다 보니 둘째가 멀미를 시작했다. 속도 무제한 아우토반도 한몫하는 것 같다.


그렇게 시작된 멀미와의 전쟁에서 나는 온라인 약국이라는 신문물에 손을 댔다. 약사와 눈을 맞추며 증상을 설명할 필요 없이 번역기 하나로 원하는 약을 클릭 몇 번에 손에 넣을 수 있다니. 독일답지 않게 이 얼마나 편리한 세상인가. ‘키즈’라고 적힌 제품을 보며 ‘이제 알약 정도는 삼킬 수 있는 나이지’ 하고 자신 있게 주문 버튼을 눌렀다.


며칠 뒤 도착한 상자를 열었을 때 나를 반긴 건 총알 모양의 멀미약. 좌약이었다.

한국의 깔끔한 개별포장 시럽 멀미약까지 바라지도 않았다. 좌약으로 나오는 멀미약이 아직 존재하다니? 왼손에는 좌약을, 오른손에는 핸드폰을 들고 사용법을 찾아보고는 조용히 상자를 닫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약국으로 직접 걸어가 멀미약을 다시 샀다.


이번에는 두 눈으로 확인하고서.


시럽으로.


이런 실전 훈련을 몇 번 거치고 나니, 이제는 웬만한 유럽 숙소에 뭐가 없는지 눈 감고도 맞힐 수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결핍템이 주방가위와 집게다.


포크와 나이프로 우아하게 고기를 썰어 먹는 유럽 사람들의 문화에 녹아들어 보려 몇 번 시도했지만, 내 고기도 내가 썰고 애들 고기도 내가 썰어야 하는 나에게 그 우아함은 사치였다. 집게로 고기를 척 집어 들고 가위로 샥샥샥 잘라주는 게 훨씬 평화로운 저녁 식사로 가는 지름길이다.


그래서 한국에서 공수해 온 악어 이빨 집게 하나가 이제는 여권만큼이나 확실한 필수 캐리어 멤버다.

그러다 보니 캐리어 안은 점점 옷장이 아니라 살림 창고가 된다. 비상약 한 보따리, 도착해서도 여행을 함께해야 한다고 아이들이 강력히 주장하는 솜인형들, 주방가위, 집게, 며칠분의 쌀. 얼려 온 고기는 아이스팩과 함께 보냉팩에 실려 이동한다.


결국 우리에게 여행이란 며칠 치 살림을 통째로 들고 이동하는 일에 가까웠다.

이 모든 걸 챙기고 나면 남편이 차에 짐을 싣는다. 캐리어, 장난감 가득한 배낭, 식자재, 여름이면 물놀이 용품, 겨울이면 나무 썰매까지. 트렁크 앞에서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며 벌이는 그 테트리스 한 판을 옆에서 보고 있으면 숙소 예약한 사람 맞나 싶다. 짐만 보면 완전 캠핑족이다.


이제 출발만 하면 될 것 같지만 마지막 관문이 남아 있다. 집의 모든 롤러덴을 내려야 한다. 창문 바깥에 달린 블라인드를 하나씩 내려 창문을 모두 가리는 일이다. 그런데 롤러덴이 며칠씩 계속 내려가 있으면 온 동네에 “저희 집 비었어요, 여행 갔어요~” 하고 방송하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서 한국에서 우편물이나 우유가 쌓이지 않게 이웃에게 부탁하듯, 독일에서도 이웃에게 롤러덴을 부탁하거나 스마트 설비를 이용해 사람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방법을 쓰기도 한다고 한다.


여행을 준비할수록 캐리어는 점점 무거워진다. 처음에는 옷과 세면도구면 충분한 줄 알았는데, 이제는 우리 가족이 그 집에서 며칠을 무사히 살아내기 위한 물건들이 하나씩 자리를 잡는다. 무엇을 챙겼고 무엇을 빠뜨렸는지에 따라 어떤 집에서는 여유만만이었고, 어떤 집에서는 발을 동동 굴렀다. 그리고 아무리 완벽하게 쌌다고 자신해도 우리는 매번 꼭 하나씩은 놓고 떠난다는 것도 여행마인드에 장착시켜 놓는다.


이제 남은 건, 그 집의 문을 여는 일이다.





파라솔도 챙겼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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