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기준이 생겼다. 그래도 뒤통수는 맞는다

by지노아

“여보, 이번에 가는 곳은 독일이랑 기후가 달라서 필터에 에어컨을 꼭 걸으래.”


필터는 엑셀에만 걸리는 줄 알았는데 숙소를 찾는 앱에서도 여러 조건을 걸어 검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요긴하게 써먹고 있다.


여행 초반에는 숙소의 위치와 가격이 주된 결정 기준이었다. 관광하다가 집으로 돌아와 빠르게 허기를 채우거나 피곤함을 물리칠 수 있으니 관광지와 집이 가까울수록 좋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원하는 위치에는 우리가 원하는 가격대의 숙소가 없었다. 도심은 비쌌고, 차마저도 도심으로 진입하려면 도시마다 별도의 세금이나 비용이 따라붙었다.


파리는 환경 스티커를 발급받아 부착해야 했고, 암스테르담 도심 노상 주차는 유럽에서도 손꼽히게 비쌌다. 노상 주차임에도 시간당 최소 만 원, 하루 주차권을 끊어도 10만 원 이상이었다.


그러다 보니 조금씩 도심과 멀어지며 외곽을 선호하게 됐다. 차를 포기하고 대중교통을 택하니 주차 스트레스에서도 벗어나고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이면 여행지의 상쾌한 공기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었다.


대신 앞 좌석 선팅이 불법인 유럽은 차 안이 밖에서 훤히 들여다보이기 때문에 주차 가능 여부를 중요하게 따져봤다. ‘주차장 있음’이라고 해놓고 실은 집 앞 공영 주차장을 안내해 주는 호스트도 있었고, 철문으로 막힌 전용 주차장, 기계식 주차장까지 다양하게 겪어봤다.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지하철 노선도를 펼쳐 최대 30분 반경 안에서 숙소를 찾는 게 덜 지친다. 근처에 마트가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있으면 감사한 조건이지 필수는 아니다.


이렇게 숙소를 하나둘 다니다 보니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무료 주차 공간부터 세탁기, 다리미, 에어컨까지 숙소를 검색할 때 걸 수 있는 필터도 생각보다 다양했다. 지역으로만 검색하면 목록에 나오는 숙소가 너무 많아 시간도 오래 걸리고 눈도 아팠는데, 필요한 조건을 걸어두면 그 수고가 덜어졌다. 필터를 하나씩 들여다보다 보면 이 수많은 항목을 적어놓은 걸 보면, 개중에는 대충 작성하는 호스트도 있겠다 싶을 정도다.


그래도 경험이 쌓이면서 나에게 필요한 필터는 점점 분명해졌다.


이번 여름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를 다니면서는 에어컨과 주차장이 있는지를 꼭 확인하게 됐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독일 하우스에는 에어컨이 없다. 올여름 42도에 육박하는 무더위가 왔을 때도 우리는 밖보다 에어컨이 없는 집 안이 더 시원하다며 롤러덴을 내리고 집에 들어와 있었다. 무더위가 지속되고 정말 덥다 싶을 때 사흘 정도 선풍기를 틀었다.

독일에서는 없어도 괜찮았던 에어컨이,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에서는 꼭 필요한 조건이 됐다.


숙소를 다닐수록 필터가 늘어난다. 나만의 기준이 생기는 것이다.


그렇게 나름대로 숙소를 고르는 기준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예전처럼 사진 몇 장과 가격만 보고 예약하지 않는다. 위치를 보고, 주차장을 확인하고, 필요한 필터를 걸고, 후기도 살펴본다.


그런데 한 번은 장기 여행을 준비하면서 세탁기가 있는 곳으로 필터를 걸어 예약했다.

도착해서 빨래부터 할 생각으로 빨랫감을 수북히 꺼내놓고 세탁기를 찾기 시작했는데 아무리 찾아도 세탁기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결국 호스트에게 세탁기 위치를 물었다. 그러자 자신이 운영하는 코인세탁소 주소가 메세지 창에 띠롱하고 올라왔다. 심지어 숙소에서 길 건너에 위치하고 있었다. 세탁기가 있다던 필터는 다 뭐였을까.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


그런데 그렇게 웃어넘긴 ‘세탁기 없는 집’을 우리는 그 뒤로도 몇 번 더 만난다.


필터도 가끔 배신을 한다.




좋은 숙소 고르기가 이렇게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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