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만 더 자라고 이사할게요

by지노아


독일에서 물건을 살 때면 가끔 필요 이상으로 오래 고민한다. 마음에 드는지 본 다음에는 한국에 가져갈 만한지 생각한다. 가져간다면 그곳에서도 잘 쓸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함께. 냄비 하나를 앞에 두고 머릿속에서는 귀국 이삿짐 견적을 내고 있다.


독일집 창고에 놓인 철제 선반은 처음부터 쓰다가 처분하고 갈 생각으로 샀다. 다시 한국의 아파트로 돌아가면 이런 선반을 둘 창고가 없을 것이 뻔하니 말이다. 몇 년 동안만 쓸 물건이니 아주 좋은 제품을 고를 필요도 없었다. 아마존에서 추천해 주는 적당한 것을 주문했고, 선반은 지금 제 역할을 잘하고 있다.


그런데 가끔 창고에 가서 선반을 보면 마음이 좀 그렇다. 줄자로 이리저리 재서 창고에 딱 맞는 크기를 골랐고, 필요한 것을 올려두기에도 불편함이 없다. 다만 살 때부터 ‘여기에서만 쓸 것’이라고 정해놓았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린다.


이 집도 마찬가지다. 여권에 독일 도장이 쾅 찍히던 순간에도, 컨테이너 짐이 도착하지 않아 텅 빈 집에 들어서던 날에도 우리는 언젠가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여행 숙소처럼 예약 화면에 체크아웃 날짜가 적혀 있지는 않지만 이 집에도 끝이 있다. 짤그락거리는 무거운 열쇠 꾸러미도 집주인에게 돌려줘야 한다.


컨테이너 짐이 도착하던 날을 생각하면 박스 테이프를 자르는 소리와 이 방 저 방을 뛰어다니던 아이들의 발소리가 먼저 떠오른다. 나는 뭘 먼저 풀어야 할지 몰라 상자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여행 가방 몇 개를 열어 며칠 쓸 물건만 꺼내놓던 때와는 달랐다. 옷도 그릇도 바카라도 앞으로 지낼 자리를 찾아줘야 했다.


아직도 그때의 이삿짐 상자 몇 개가 창고에 남아 있다. 가끔 서랍을 정리하다 보면 이렇게 자리를 잡은 물건들도 결국 다시 상자에 담기겠구나 싶다. 한국에 가져갈 것과 두고 갈 것을 나누고, 처분할 방법을 생각하고, 마지막에는 집을 비워야 할 것이다.


그러다가도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 되면 몇 년 뒤의 이삿짐 걱정은 잠시 접어두고 오늘의 엄마 역할로 돌아온다. 언젠가 떠날 집이라고 일상생활까지 미뤄둘 수는 없다.

한인마트에서는 유통기한이 살짝 지난 상품을 반값에 집어 오고, 반품할 택배는 우체국까지 직접 들고 간다. 택배 도착 예정 시간이 두 시에서 여섯 시 사이라고 하면 그날의 외출은 일찌감치 접는다. 남편의 퇴근을 맞이하다 보면 오늘도 이 집에서 하루가 지나간다.


몇 년만 산다고 집에 정을 안 붙일 수는 없었다. 오히려 그럴수록 안정감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화분을 들였다. 냄비보다 한국에 가져가기 훨씬 어려운 물건이었지만, 생기를 담고 있는 무언가를 나와 함께 집에 두고 싶었다. 때때로 꽃을 피우는 모습을 보면 기특하기도 하고 ‘반려식물’이라는 단어가 왜 생겨났는지도 알 것 같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그렸다며 가져온 그림도 벽에 붙였다. 다른 벽 한쪽에는 아이들의 키를 잰 자리마다 연필로 날짜와 이름을 적기 시작했다. 매일 볼 때는 잘 모르다가도 차곡차곡 쌓여 가는 선을 보면 그동안 아이들도 열심히 자라고 있다는 게 눈에 들어온다.


한국에서도 아이들이 작고 귀여운 두 발로 땅을 딛고 설 수 있게 됐을 때부터 문틀에 키를 표시했다. 처음에는 한참 아래에 있던 선이 조금씩 올라갔고, 둘째의 키도 더해졌다. 그렇게 선이 늘어나던 중에 우리는 독일로 왔다. 살림은 컨테이너에 실었지만 키가 표시된 문틀은 사진으로 남기고 와야 했다. 그리고 다시, 벽에 연필을 대고 키를 재기 시작했다.


짧게 머문 유럽의 집들을 오가는 동안에도 우리는 조금씩 자랐다. 아이들은 숙소를 고를 때 자기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나는 류블랴나성 전망대에서 사진만 찍고 내려오는 대신 잠시 머물며 바람과 햇빛을 느끼고 그 감정을 가족과 나눌 수 있었다.


아이들의 키는 벽에 표시해 두었지만 나와 남편에게는 그런 눈금이 없다. 늘어 가는 흰머리가 그 역할을 대신한다고 생각하면 그나마 덜 서운할까? 만약 이삿짐을 풀던 그날의 우리와 지금의 우리가 마주 보고 설 수 있다면 제법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다.


언젠가 집을 비울 때는 벽에 붙여둔 그림을 한 장씩 떼고 연필 선도 하나씩 지워야 할 것이다. 다음 집의 벽에도 연필을 대게 되겠지?

아마 지금보다 더 높은 곳에.


그때까지는 저녁을 먹고, 빨래를 개고, 벽에 선을 하나씩 더 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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