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산이 없다는 것은 결핍이 아니라 백지다

1등이 만든 표준을 따를 것인가, 백지에 다시 그릴 것인가

by조병묵


Make or Buy가 경영의 화두로 올라선 것은 1989년이다. 미국의 한 거대 필름회사가 자기 전산실을 통째로 외부에 넘겼다. 멀쩡히 돈을 벌던 대기업이 핵심 부서를 남에게 맡긴 첫 사례였고, 세상은 놀랐지만 곧 모두가 따라 했다. 그 뒤를 이은 이름들을 보라. 복사기 회사, 자동차 회사, 투자은행. 전부 다 가진 회사들이었다.


‘왜’라는 물음에 교과서의 답은 셋으로 정리된다. 첫째, 밖이 싸다. 둘째, 남이 더 잘한다. 만드는 자는 만드는 데, 파는 자는 파는 데 전념할 때 양쪽 다 세진다. 셋째, 감당이 안 된다. 회계와 법률과 노무처럼 쓰는 빈도는 낮은데 깊이는 깊은 일을 안에 두면 오히려 비싸다.


세 가지 모두 옳다. 그러나 이 답들이 누구의 문제를 풀기 위해 만들어졌는지를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전산실을 넘긴 그 회사도, 뒤를 따른 회사들도 이미 전부를 끌어안고 있던 기업이었다. 즉 이것은 다 가진 자가 군살을 덜어내며 효율을 높이는 빼기의 기술이다.


1등의 빼기에는 대가를 치러야 하는 딜레마가 있다.


하나, 빼야 할 것을 못 뺀다. 가동률이 절반으로 떨어진 공장을 어쩌지 못한다. 더 싸게 더 잘 만드는 공장이 어디 있는지 알면서도 옮기지 못하는데, 옮기는 순간 자기 공장이 서고 장부에 남은 설비 값이 손실로 찍히기 때문이다. 사람 문제로 번지고 품의와 법무를 거치면 1년이 간다.


둘, 빼지 말아야 할 것을 뺐다. 효율을 이유로 상담을 넘기고, 상세페이지를 넘기고, 광고를 대행사에 넘겼다. 원가는 분명히 내려갔다. 그리고 고객에게 무슨 말을 할지 정하는 자리에 남의 회사 직원이 앉았다.

오프라인 생활용품 매대는 여전히 유통을 장악한 대기업 브랜드의 것이다. 그런데 온라인에서는 다른 회사들이 매대를 가져가고 있다. 현장에서 만난 한 브랜드는 공장이 없다. 마케팅팀만 셋이다. 생산은 그 대기업 제품을 만드는 바로 그 공장에 맡기고, 대신 고객에게 무엇을 말할지, 얼마에 팔 지는 30분 만에 정한다.


1등은 빼야 할 것을 못 뺐고, 빼지 말아야 할 것을 뺐다.


백지를 손에 쥔 2등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대개 산업의 표준을 옮겨 그리는 것이다. 저 공장이 표준이니 저기에 맡기고, 저 유통이 표준이니 그 길로 간다. 그런데 그 표준을 누가 만들었는지 따져 보면 답은 하나다. 1등이 만들었다. 1등의 만드는 기술, 1등의 파는 기술, 1등의 운영 기술이 오랜 세월 굳어 업계의 상식이 된 것이다.


표준이 같으면 싸움의 성격이 정해진다. 같은 공장에 맡기고 같은 유통을 타고 같은 방식으로 판다면, 마지막에 승부를 가르는 것은 물량이다. 많이 사는 쪽이 단가를 깎고, 최소 주문량의 벽에 걸리지 않으며, 성수기에 먼저 라인을 배정받는다.


품질도 다르지 않다. 원가에서 밀린 회사는 검사에 쓸 돈에서도 밀린다. 같은 라인에서 나온 물건이라도 뒤에 서 있던 쪽이 더 자주 타협한다.


표준을 따르는 한 2등은 이길 수 없다. 재주가 없어서가 아니라 구조가 그렇다.


그래서 같은 이름의 결정이 두 회사에게 전혀 다른 문제가 된다. 1등에게 Make or Buy는 효율과 관리의 문제다. 이미 가진 것을 어떻게 덜 낭비할 것인가의 문제다. 2등에게는 전략의 문제다. 무엇으로 어떻게 싸울 것인가를 정하는 전략적 선택의 문제다.


백지의 가치는 싸게 조립하는 데 있지 않다. 남의 기준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데 있다.


정반대로 간 두 회사가 있다. 둘 다 이겼다. 한 화장품 회사는 아무것도 만들지 않는다. 제조는 전부 밖에 맡기고, 해외 유통채널 상세페이지에 현지 고객을 어떻게 랜딩 시킬지만 직접 정한다. 2025년 연결 매출은 1조 4,717억 원이고 그중 95%가 해외에서 나왔다.


대전의 한 빵집은 모든 것을 직접 했다. 1956년 대전역 앞 찐빵집에서 시작해 70년이 지나도록 가맹점을 내주지 않았고, 대전 밖으로도 나가지 않았다. 남들이 매장 수로 몸집을 불릴 때 혼자 굽는 자리를 지켰다. 2025년 영업이익은 643억 원, 영업이익률은 24.4%였다. 전국에 수천 개 매장을 둔 두 제빵 프랜차이즈 운영사의 영업이익을 합친 것보다 많다. 손님은 기차를 타고 가서 줄을 섰고, 거기서만 살 수 있는 빵을 받아 왔다.


한쪽은 전부 샀고 한쪽은 모든 것을 직접 했다. 정반대다. 그런데 공통점이 하나 있다. 둘 다 자기 업계의 표준을 따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백지 위에서 우리는 무엇을 사야 하는가. 정할 것은 넷이다. 무엇을 살 것인가, 얼마에 살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그리고 그렇게 사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


첫째, 물건을 사지 말고 기준을 사라. 우리 업계의 공급자는 1등의 표준으로 훈련된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맡기면 1등이 만들던 것을 조금 다르게 만들 뿐이다. 그래서 같은 문제를 더 높은 기준으로 푸는 다른 산업을 뒤져야 한다. 부산의 한 어묵 회사가 그렇게 했다. 어묵 산업의 표준은 봉지에 담아 대형마트 매대에 눕히는 것이었는데, 이 회사는 빵집처럼 팔았다. 갓 튀긴 것을 진열하고, 손님이 집게로 집어 쟁반에 담고, 계산대에 줄을 선다. 어묵 업계에서 사 온 방식이 아니라 제과점 업계에서 사 온 방식이다. 2013년 82억 원이던 매출은 2024년 964억 원이 되었다. 1등은 이 수를 둘 수 없었다. 매장을 열면 자기 유통망과 부딪치고, 어묵은 반찬 재료라는 정의를 스스로 만든 회사가 그 정의를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싸게 사지 말고 비싸게 사라. 경계 밖의 기준은 대개 비싸다. 우리 업계가 쓰지 않는 공정이고 우리 업계가 보지 않는 검사 항목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대부분이 물러선다. 단가표를 열어보고 포기한다. 계산을 바꿔야 한다. 그 차액은 원가가 아니다. 마케팅비다. 2등은 광고로 리더십을 살 수 없다. 돈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도 하지 않던 방식을 택하면 그 방식 자체가 이야기가 된다. 어묵 회사는 광고 대신 매장을 지었고, 그 매장은 백화점 식품관에서 매출 1위가 되었다. 1등은 이 계산을 할 수 없다. 1등의 구매 부서는 원가를 낮추라는 목표로 평가받는다. 비싸게 사겠다는 품의는 올라가지 않는다.


셋째, 주문하지 말고 동업하라. 경계 밖의 공급자에게 우리는 처음에 귀찮은 손님이다. 물량은 적고 요구는 까다롭고, 우리 업계 사람이 아니니 설명할 것도 많다. 그래서 순서를 지켜야 한다. 처음에는 사정한다. 비수기 한쪽을 얻고 단가는 높게 지불한다. 그다음 물량을 만든다. 브랜드가 팔리기 시작하면 그제야 전화를 받아준다. 물량이 계속 붙으면 장기 파트너가 되고, 그때부터 원가도 납기도 품질도 우리가 관리한다. 싸게 사서 브랜드를 키우는 것이 아니다. 브랜드를 키워야 싸게 살 수 있다. 순서가 거꾸로다. 앞에서 말한 그 온라인 브랜드가 대기업 공장을 상대로 원가와 납기를 관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공장을 가져서가 아니라 물량을 약속할 수 있어서다.


넷째, 표준을 따르지 말고 표준이 돼라. 경계를 넘어 사 온 것이 자리를 잡으면 그것은 더 이상 남의 기준이 아니다. 우리 기준이 된다. 그리고 손님이 그 기준으로 다른 회사를 재기 시작하면, 그때 그것은 새 표준이 된다. 어묵 회사가 만든 것은 매장 하나가 아니었다. 어묵 베이커리라는 이름의 카테고리였다. 지금 그 업계에서 매장을 여는 회사들은 모두 그 회사가 그어 놓은 선 안에서 움직인다. 1등이 뒤늦게 따라 들어와도 그 자리에는 이미 이름이 붙어 있다. 이것이 2등이 이기는 방식이다. 1등의 매출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1등이 들어올 수 없는 자리에 먼저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백지는 결핍이 아니다. 1등은 20년 전에 낸 답을 자산으로 굳혀 이제 고치지 못한다. 2등에게는 굳은 것이 없다. 뺄 것이 없다는 말은 더 뺄 것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아직 아무것도 짓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니 물음은 하나로 좁혀진다. 남이 만든 표준을 따를 것인가, 표준이 될 것인가.

사는 것은 실력이다. 그리고 무엇을, 어디서, 얼마에, 어떻게 사느냐가 전략이다.

natalia-blauth-0B7OQQtEuEI-unsplash.jpg


[우리 회사 진단을 위한 세 가지 시선]


CEO의 시선

1. 이 회사의 가치사슬을 아홉 칸으로 나눴을 때 직접 하는 칸은 몇 개이고, 그중 고객이 알아채는 칸은 몇 개인가.

2. 지난 3년간 밖으로 넘긴 일과 안으로 들인 일은 각각 몇 건인가.

3. 이 회사 원가에서 가장 큰 구매 항목의 이름은 무엇이고, 그 공급자는 1등에게도 납품하는가.


고객의 시선

1. 최근 리뷰 스무 건에서 가장 많이 나온 단어 하나는 무엇인가.

2. 우리가 돈을 더 주고 산 것 중 고객이 알아본 것은 무엇이고, 끝내 못 알아본 것은 무엇인가.

3. 고객이 우리를 사려고 감수하는 불편은 몇 분인가.


1등의 시선

1. 우리가 지금 하는 일 중 1등이 내일 당장 따라 할 수 있는 것은 몇 개인가.

2. 1등이 우리를 따라 하려면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가. 그 자산의 이름을 적어 보라.

3. 1등의 구매 부서가 우리 공급자에게 발주를 넣지 못하는 이유를 한 문장으로 쓸 수 있는가.


[운영 탁월성을 갖춘 조직의 월요일 실천과제]


1단계 · 월요일 오전 30분. 지난 1년 치 구매와 외주 내역을 금액 순으로 적는다. 각 항목 옆에 그 공급자가 우리 업계 소속인지 O와 X로만 표시한다. O가 몇 개인지 센다. 대부분 O일 것이다.


2단계 · 월요일 오후 두 시간. 금액 상위 다섯 개 중에서 고객이 알아채는 항목 하나를 고른다. 그 항목에서 우리 업계가 무엇을 확인하고 넘어가는지, 그 기준을 한 줄로 적는다. 그다음 같은 문제를 더 높은 기준으로 푸는 다른 산업 세 곳의 이름을 적는다.


3단계 · 주중. 세 곳 중 한 곳에 전화한다. 견적을 묻지 말고 기준을 묻는다. 그들이 무엇을 확인하는지 받아 적어 우리 기준과 나란히 놓는다.


숫자는 하나다. 우리 기준표에는 없는데 그들 기준표에는 있는 항목의 개수.


일요일 연재
이전 04화2등도 아무나 못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