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의 족쇄 — 1등이 만든 고정관념, 몇 층을 허물 것인가
많은 2등이 1등보다 싸게 팔면 이길 수 있다고 여긴다. 1등이 프리미엄을 말하면 우리는 합리적 가성비를 말한다. 가장 흔한 선택이다. 그리고 가장 약한 선택이다. 2등이 스스로에게 하는 거짓말이다.
가성비는 1등이 만든 채점표에 답을 적는 일이다. 소비자 머릿속에서 1등은 이미 기준이 되어 있다. 그 기준에 맞춰 값만 낮추면 2등은 '싼 1등'이 된다. 그런데 1등이 값을 한 번만 내려도 게임은 끝난다. 뱁새가 황새를 쫓다 가랑이가 찢어진다.
크기가 작고 흠집이 났을 뿐, 맛은 똑같은 농산물이 있다. 한 대형마트는 이런 못난이 사과를 일반 상품보다 40% 싸게 특가로 팔았다. 준비한 물량이 일주일 만에 동났다. 그러나 그것은 과일값이 뛰거나 농가가 어려울 때 열리는 1등의 고객 행사였다.
어글리어스라는 스타트업은 못난이 농산물을 전혀 다르게 불렀다. 버려질 농산물을 '구출'한다고 했다. 슬로건은 '못생겨도 괜찮아'였다. 이 회사는 못난이 농산물을 정기구독으로 팔아 출시 2년 8개월 만에 누적 매출 100억 원을 넘겼다. 가성비로 판 못난이는 행사로 끝났다. 2등의 신념으로 판 못난이는 구독이 되었다.
1등은 이 말을 따라 할 수 없다. 대형마트는 농산물을 특품, 일반, 못난이로 나눠 판다. 그 등급표에서 못난이는 늘 맨 아래 칸이다. 못생겨도 괜찮다고 말하는 순간 자기가 만든 등급표를 부정하게 된다.
1등의 정체성은 3층짜리 건물이다. 옥상에는 1등의 한 단어가 간판으로 걸려 있다. 1층은 스펙이다. 도수, 당도, 원료처럼 광고에 적히는 숫자와 성분이다. 2층은 자리다. 이 제품이 무엇이고, 누가 언제 어디서 쓰는지다. 3층은 신념이다. 이 제품이 건강과 환경과 노동에 대해 약속해 온 말이다.
1층을 허물면 1등은 숫자를 바꿔 따라온다. 2층을 허물면 지금의 고객을 버려야 따라온다. 3층을 허물면 따라올 수 없다. 자기가 한 말을 부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2등이 공격하는 층의 높이가 1등에게는 곧 족쇄의 무게다. 두 도전이 이를 보여준다.
2006년 경남의 무학은 16.9도 소주 '좋은데이'를 내놓았다. 업계가 18.5도를 저도주의 마지노선으로 여기던 때였다. 무학은 순한 술을 찾는 입맛의 변화를 먼저 읽었다. 1등도 그 흐름을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움직일 수 없었다. 그 뒤로도 업계는 17도를 소주 정체성의 마지노선으로 여겼다.
국민소주에게 순한 소주는 소주답지 않은 소주였다. 1등은 본진을 두고 부산·경남 전용 제품이라는 별동대로 막았다. 주력 제품의 도수를 16.9도로 내린 것은 2020년이다. 뼈아프게 공격당한 뒤였다. 1층을 친 도전은 2등에게 14년의 시간을 벌어 주었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