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의 똥은 어디로 갔을까?

by크눌프

(아래의 글은 9.12일자 게시물을 온라인카지노북으로 재편집한 것입니다. 기본 내용은 같으니 이미 읽으신 분은 읽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람이 많이 사는 곳에는 똥도 많이 나온다. 조선시대 한양도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사람이 모여 살았으니 매일 상당한 양의 분뇨가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처럼 하수도가 있던 것도 아니고, 화장실에서 물을 내릴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한양에서 나온 똥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의외로 그 똥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누군가는 그것을 치웠고, 누군가는 그것을 거름으로 쓰기 위해 가져갔다. 연암 박지원의 《예덕선생전》에 등장하는 엄행수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엄행수는 한양 종본탑 동쪽에 살면서 날마다 마을의 똥을 치우는 일을 생업으로 삼았다. ‘행수’는 막일꾼 가운데 나이가 많은 사람을 부르는 말이었으니, 엄행수는 말 그대로 똥을 치우며 살아가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엄행수가 모은 것은 단순한 쓰레기가 아니었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 사람의 똥은 꽤 쓸모 있는 거름이었다. 박지원은 《예덕선생전》에서 당시 한양 주변의 채소밭을 구체적으로 소개한다. 왕십리에서는 무를 길렀고, 살곶이에서는 순무를 재배했으며, 석교에서는 가지와 오이와 수박을 길렀다. 연희궁에서는 고추와 부추를 재배했고, 청파에서는 미나리를, 이태원에서는 토란을 길렀다. 한양이라는 큰 도시가 먹고살기 위해서는 주변의 농촌에서 끊임없이 먹거리를 생산해야 했고, 농사를 위해서는 거름이 필요했다. 그렇게 보면 엄행수가 매일 치우던 똥은 도시에서 버려지는 쓰레기인 동시에 농촌에서는 기다리고 있던 자원이었던 셈이다.


한양 사람의 몸에서 나온 것은 화장실을 거쳐 엄행수의 손에 들어갔고, 엄행수는 그것을 지게에 져 한양 주변의 밭으로 날랐을 것이다. 밭에서는 그것을 거름으로 삼아 무와 순무와 오이와 미나리 같은 채소를 길렀고, 그렇게 자란 채소는 다시 한양 사람들의 밥상에 올랐을 것이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조금 묘한 순환이다. 사람이 먹고, 배설하고, 그것이 밭으로 돌아가고, 밭에서 다시 먹거리가 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농사를 짓던 사람들에게 거름은 농사의 중요한 밑천이었다. 그래서 사람의 똥은 한편으로는 버려야 할 물건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돈을 주고서라도 구하고 싶은 물건이었다. 한양에서 나온 똥이 다시 한양 사람들의 먹거리를 만드는 데 쓰였던 것이다.


엄행수의 일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는 것도 《예덕선생전》에서 엿볼 수 있다. 박지원은 엄행수가 해마다 6,000전을 벌었다고 적었다. 물론 이것을 당시 모든 분뇨 수거업자의 평균적인 수입으로 볼 수는 없다. 《예덕선생전》에 등장하는 엄행수라는 한 인물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기록은 똥을 치우는 일이 단순한 심부름이나 임시 노동이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생계를 꾸려갈 수 있는 직업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더구나 엄행수가 모은 것은 사람의 똥만이 아니었다. 《예덕선생전》에는 말·소·개·돼지·토끼 등의 분뇨까지 수거했다는 내용이 나타난다. 오늘날의 환경미화원과 농업용 자원 수거업을 합쳐놓은 것 같은 일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사람들에게는 더럽고 천하게 보이는 일이었지만, 도시에서 쓸모없어진 것을 농촌에서 필요한 자원으로 바꾸는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조선시대 한양의 분뇨 관리가 아주 잘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조선 후기 실학자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서울의 분뇨 처리 현실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사람들이 오줌을 날마다 뜰이나 거리에 내다 버려 우물물이 짜게 되고, 냇가의 다리와 석축 주변에는 똥이 더덕더덕 말라붙었다고 적었다. 농업에 필요한 거름이 부족한 상황에서 분뇨를 제대로 수거하고 활용하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한 것이다. 박제가에게 분뇨는 단순히 더러운 것이 아니었다. 농업 생산력을 높이는 데 활용할 수 있는 귀중한 자원이었다. 그래서 그는 분뇨를 버리는 것을 곡식을 버리는 것에 빗대어 비판했다. 흔히 더럽다고 생각하는 것에도 경제적 가치가 있고,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도시와 농촌의 생활이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이렇게 보면 조선시대 한양의 똥은 생각보다 복잡한 존재였다. 모두가 똥을 소중하게 여겼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모두 길거리에 내다 버렸던 것도 아니다. 누군가는 그것을 귀찮고 더러운 것으로 여겼고, 누군가는 돈을 벌기 위해 치웠으며, 농부들은 그것을 거름으로 이용했다. 한양이라는 도시에서 나온 분뇨가 주변 농촌으로 흘러가 농사를 돕는 순환이 있었던 동시에, 그 분뇨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길거리와 물가에 버리는 모습도 함께 존재했던 것이다. 역사에서 현실은 늘 이렇게 복잡하다. 좋은 제도가 있었다고 해서 모두가 그것을 잘 지킨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어떤 물건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고 해서 언제나 제대로 활용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박지원은 이 복잡한 현실 속에서 똥을 치우며 살아가는 엄행수를 아주 특별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엄행수를 단순히 가난한 막일꾼으로 묘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 ‘예덕선생(穢德先生)’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예(穢)’는 더럽다는 뜻이고 ‘덕(德)’은 덕을 뜻하니, 말 그대로 하면 ‘더러운 일을 하는 덕 있는 선생’이라는 뜻이다. 남들이 천하게 여기는 일을 하면서도 자신의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박지원은 오히려 존중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엄행수라는 인물은 단순히 한양의 똥을 치우던 사람으로 끝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천하다고 여기는 일에도 나름의 가치가 있고, 사람의 신분이나 직업만으로 그 사람의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까지 던지게 한다.


하지만 오늘은 그 이야기까지 깊이 들어가지 말자. 우리가 처음 궁금했던 것은 단순했다. 한양의 똥은 어디로 갔을까?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밭으로 갔다. 그리고 그 밭에서 무가 자라고, 순무가 자라고, 오이와 수박이 자라고, 미나리와 토란이 자랐다. 그렇게 자란 농작물은 다시 한양 사람들의 밥상으로 돌아왔다. 물론 모든 똥이 그렇게 순환한 것은 아니었다. 박제가의 기록처럼 길거리와 물가에 버려지는 분뇨도 많았다. 그럼에도 한양에는 도시에서 나온 분뇨를 모아 농촌의 거름으로 보내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 가운데 엄행수 같은 사람이 있었다.


생각해 보면 참 묘한 일이다. 사람이 먹고 남긴 것이 몸을 거쳐 똥이 되고, 그것을 누군가가 치워 밭으로 가져가고, 그 밭에서 다시 사람이 먹을 것이 자란다. 오늘날에는 너무 당연하게 분리되어 있는 도시와 농촌, 쓰레기와 자원, 노동과 소비가 조선시대에는 지금보다 훨씬 가까이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연결을 가능하게 만든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엄행수였다. 그러니 박지원이 그를 ‘예덕선생’이라 부른 것도 단순한 농담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남들이 더럽다고 외면하는 일을 하면서도 도시와 농촌을 이어주었던 사람. 어쩌면 엄행수는 조선시대 한양에서 꽤 중요한 일을 하던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박지원.jpg《예덕선생전》의 저자 박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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