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은 9.11일자 게시물을 온라인카지노북으로 재편집한 것입니다. 기본 내용은 같으니 이미 읽으신 분은 읽지 않으셔도 됩니다.)
조선시대에는 부모의 똥을 맛보는 것도 효도였다. 농담처럼 들리지만 실제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름도 있다. 상분(嘗糞)이다. 한자를 그대로 풀이하면 ‘대변을 맛본다’는 뜻인데, 단순히 똥을 먹는 이상한 행동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부모의 병세를 살피기 위해 대변의 상태를 확인하고 맛을 보는 행위로, 당시에는 지극한 효행 가운데 하나로 여겨졌다. 한편으로는 몹시 아첨하는 행동을 비유하는 말로도 쓰였다.
세종 16년인 1434년, 예조가 세종에게 한 사람의 효행을 보고했다. 한양 경행방, 지금의 서울 종로구 일대에 살던 학생 이백자(李伯孜)였다. 그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어머니가 병이 들자 약을 달여 드리며 정성껏 간호했다. 그런데 실록에는 뜻밖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백자가 어머니의 대변을 맛보았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대변의 상태나 맛을 살펴 병세를 짐작하기도 했는데, 이백자는 대변의 맛이 달고 미끄러운 것을 보고 어머니의 병이 심하다고 여겨 더욱 근심했다고 한다. 그의 효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밤에도 옷을 벗지 않고 어머니를 돌보았으며, 자신이 대신 병을 앓게 해달라고 하늘에 빌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무덤 곁에서 3년 동안 지냈다. 평소 어머니가 천둥을 무서워했다는 사실도 기억하고 있다가 천둥과 바람이 몰아치면 무덤으로 달려가 자신의 몸으로 무덤을 덮었다고 한다. 예조는 이 모든 행적을 세종에게 보고했고, 세종은 이백자를 관직에 등용하도록 했다.
그런데 이백자만 부모의 대변을 맛본 것은 아니었다. 6년 뒤인 1440년에도 박유의라는 사람이 아버지가 위독해지자 대변을 맛보며 병간호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무덤을 만들고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다. 조정에서는 그의 효행을 인정해 정문(旌門)을 세우고 여러 가지 특전을 주도록 했다. 상분은 부모에게만 한정된 행동도 아니었다. 중종 때에는 형의 병을 살피기 위해 대변을 맛본 사람이 등장하고, 명종 때에는 남편을 위해 상분을 한 여성의 이야기도 실록에 남아 있다. 지금의 감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가족의 병을 살피고 자신의 정성을 다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였던 셈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이런 행동까지 했을까? 상분은 조선에서 처음 생겨난 풍습이 아니었다. 중국에서는 오래전부터 효자 유검루가 아버지의 병세를 살피기 위해 대변을 맛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조선 세종 때 편찬된 《삼강행실도》에도 실렸다. 《삼강행실도》는 충신·효자·열녀의 특별한 행적을 그림과 글로 소개하고 백성들이 이를 본받도록 하기 위해 만든 바카라이다. 그러니 상분 역시 부모를 위해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는 지극한 효행의 한 사례로 받아들여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몇백 년 뒤에는 이런 효행을 조금 다르게 바라본 사람이 나타났다. 바로 다산 정약용이다. 정약용은 《여유당전서》의 「효자론」에서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이는 단지(斷指), 허벅지 살을 베어 부모에게 먹이는 할고(割股), 대변을 맛보는 상분과 같은 극단적인 효행을 비판했다. 정약용이 보기에 중요한 것은 얼마나 놀라운 행동을 했느냐가 아니었다. 대변을 맛보는 것 역시 본래는 부모의 병세를 살피기 위한 행위인데, 병의 상황과 관계없이 그 행동 자체를 효도의 증거로 삼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효도는 부모를 평소에 잘 봉양하는 데 있는데, 남들이 놀랄 만한 행동을 해야 효자로 인정받는 분위기가 만들어진다면 오히려 효의 본래 의미가 흐려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정약용이 이런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조선에서는 효행을 국가가 공식적으로 포상했기 때문이다. 효행이 인정되면 정문을 세워주거나 관직을 주는 등 여러 가지 혜택이 따르기도 했다. 그렇다면 효자가 되기 위해 남들이 쉽게 하지 못하는 특별한 행동을 보여주려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다. 부모를 평소에 잘 돌보는 것보다 손가락을 자르거나 대변을 맛보는 것처럼 극단적인 행동을 해야 효자로 인정받는다면, 효행이 자칫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동으로 변질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세종 때에는 칭찬받았던 상분이라는 행동을 정약용은 몇백 년 뒤 다시 바라보면서 ‘그것이 정말 효도의 본질인가’를 묻고 있었던 셈이다.
오늘날 우리가 상분 이야기를 들으면 먼저 황당하거나 우스꽝스럽게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에게 그것은 웃음거리가 아니었다. 아픈 부모의 병세를 조금이라도 살피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이었고, 조정 역시 그것을 지극한 효행으로 인정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정약용처럼 그 행동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같은 행동을 두고 시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 것이다.
상분이라는 작은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우리는 조선 사람들이 생각했던 ‘효도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까지 만나게 된다. 부모의 똥을 맛보았다는 기이한 기록 하나가 당시의 의료 지식과 가족관계, 효를 바라보는 슬롯의 시선, 그리고 국가의 포상 제도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역사에는 가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처음에는 그저 우스꽝스럽고 이상해 보였던 기록 하나가 오히려 그 시대 사람들이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를 보여주는 창이 되기도 한다. 내게 역사는 이래서 재미있는 보물창고다. 뒤져보면 생각지도 못한 것이 나오고, 그 작은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한 시대의 모습이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부모의 똥을 맛보는 것도 효도였다. 농담처럼 들리지만 실제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름도 있다. 상분(嘗糞)이다. 한자를 그대로 풀이하면 ‘대변을 맛본다’는 뜻인데, 단순히 똥을 먹는 이상한 행동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부모의 병세를 살피기 위해 대변의 상태를 확인하고 맛을 보는 행위로, 당시에는 지극한 효행 가운데 하나로 여겨졌다. 한편으로는 몹시 아첨하는 행동을 비유하는 말로도 쓰였다.
세종 16년인 1434년, 예조가 세종에게 한 사람의 효행을 보고했다. 한양 경행방, 지금의 서울 종로구 일대에 살던 학생 이백자(李伯孜)였다. 그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어머니가 병이 들자 약을 달여 드리며 정성껏 간호했다. 그런데 실록에는 뜻밖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백자가 어머니의 대변을 맛보았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대변의 상태나 맛을 살펴 병세를 짐작하기도 했는데, 이백자는 대변의 맛이 달고 미끄러운 것을 보고 어머니의 병이 심하다고 여겨 더욱 근심했다고 한다. 그의 효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밤에도 옷을 벗지 않고 어머니를 돌보았으며, 자신이 대신 병을 앓게 해달라고 하늘에 빌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무덤 곁에서 3년 동안 지냈다. 평소 어머니가 천둥을 무서워했다는 사실도 기억하고 있다가 천둥과 바람이 몰아치면 무덤으로 달려가 자신의 몸으로 무덤을 덮었다고 한다. 예조는 이 모든 행적을 세종에게 보고했고, 세종은 이백자를 관직에 등용하도록 했다.
그런데 이백자만 부모의 대변을 맛본 것은 아니었다. 6년 뒤인 1440년에도 박유의라는 사람이 아버지가 위독해지자 대변을 맛보며 병간호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무덤을 만들고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다. 조정에서는 그의 효행을 인정해 정문(旌門)을 세우고 여러 가지 특전을 주도록 했다. 상분은 부모에게만 한정된 행동도 아니었다. 중종 때에는 형의 병을 살피기 위해 대변을 맛본 사람이 등장하고, 명종 때에는 남편을 위해 상분을 한 여성의 이야기도 실록에 남아 있다. 지금의 감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가족의 병을 살피고 자신의 정성을 다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였던 셈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이런 행동까지 했을까? 상분은 조선에서 처음 생겨난 풍습이 아니었다. 중국에서는 오래전부터 효자 유검루가 아버지의 병세를 살피기 위해 대변을 맛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조선 세종 때 편찬된 《삼강행실도》에도 실렸다. 《삼강행실도》는 충신·효자·열녀의 특별한 행적을 그림과 글로 소개하고 백성들이 이를 본받도록 하기 위해 만든 바카라이다. 그러니 상분 역시 부모를 위해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는 지극한 효행의 한 사례로 받아들여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몇백 년 뒤에는 이런 효행을 조금 다르게 바라본 사람이 나타났다. 바로 다산 정약용이다. 정약용은 《여유당전서》의 「효자론」에서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이는 단지(斷指), 허벅지 살을 베어 부모에게 먹이는 할고(割股), 대변을 맛보는 상분과 같은 극단적인 효행을 비판했다. 정약용이 보기에 중요한 것은 얼마나 놀라운 행동을 했느냐가 아니었다. 대변을 맛보는 것 역시 본래는 부모의 병세를 살피기 위한 행위인데, 병의 상황과 관계없이 그 행동 자체를 효도의 증거로 삼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효도는 부모를 평소에 잘 봉양하는 데 있는데, 남들이 놀랄 만한 행동을 해야 효자로 인정받는 분위기가 만들어진다면 오히려 효의 본래 의미가 흐려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정약용이 이런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조선에서는 효행을 국가가 공식적으로 포상했기 때문이다. 효행이 인정되면 정문을 세워주거나 관직을 주는 등 여러 가지 혜택이 따르기도 했다. 그렇다면 효자가 되기 위해 남들이 쉽게 하지 못하는 특별한 행동을 보여주려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다. 부모를 평소에 잘 돌보는 것보다 손가락을 자르거나 대변을 맛보는 것처럼 극단적인 행동을 해야 효자로 인정받는다면, 효행이 자칫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동으로 변질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세종 때에는 칭찬받았던 상분이라는 행동을 정약용은 몇백 년 뒤 다시 바라보면서 ‘그것이 정말 효도의 본질인가’를 묻고 있었던 셈이다.
오늘날 우리가 상분 이야기를 들으면 먼저 황당하거나 우스꽝스럽게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에게 그것은 웃음거리가 아니었다. 아픈 부모의 병세를 조금이라도 살피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이었고, 조정 역시 그것을 지극한 효행으로 인정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정약용처럼 그 행동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같은 행동을 두고 시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 것이다.
상분이라는 작은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우리는 조선 사람들이 생각했던 ‘효도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까지 만나게 된다. 부모의 똥을 맛보았다는 기이한 기록 하나가 당시의 의료 지식과 가족관계, 효를 바라보는 슬롯의 시선, 그리고 국가의 포상 제도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역사에는 가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처음에는 그저 우스꽝스럽고 이상해 보였던 기록 하나가 오히려 그 시대 사람들이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를 보여주는 창이 되기도 한다. 내게 역사는 이래서 재미있는 보물창고다. 뒤져보면 생각지도 못한 것이 나오고, 그 작은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한 시대의 모습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