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S대출신 대기업 과장 정훈(2)
회사에는 이상한 속설이 있다.
처음에 들었을 때는 웃어넘겼다.
하지만 연차가 쌓일수록 점점 이 말에 긁힌다. 긁혀서 난 생채기들이 진짜 일을 잘 못하게 만드는 것만 같다.
“아니, 그래서 이 타겟으로 가는 게 맞다는 거예요? “
“김바카라임은 이 모델에 확신이 없다는 거예요? “
또 시작이다.
‘나도 몰라요.. 연구에 확신이 어딨냐. 어디 라텍스도 안 껴본 인간들이 되냐 마냐 따지는 거야!!‘
라는 말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간신히 참아냈다.
한때 교수님의 애착인형이었던 정훈. 연애고자여도 연구만큼은 고수 중에 고수였다. 하지만 고수도 한 가지 못하는 것이 있었으니.
연구의 본질은 ‘해봐야 안다’는 것이다. 당연할 것 같았던 사실도 뒤집어질 수 있고,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우연히 이뤄지는 게 연구이다. 그렇기에 장담하는 순간 연구는 연구가 아니라 예언이 되어 본질에서 벗어나게 된다.
적어도 R&D의 수장이라는 사람들은 이러한 바탕을 알고 일에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정훈은 매 회의 때마다 회의감을 느낀다.
“그야 해봐야 알죠. 그래서 시간이 필요하고요. “
“시간이라면 얼마 나요?”
“생산해서 release* 분석 결과까지 나와야 하니.. 적어도 6개월?”
"더 땡겨봅시다. 3개월 안에 해보죠. “
*release: 제품이 정해진 품질 기준을 모두 만족함을 확인하고, 해당 물질 또는 제품의 사용을 공식적으로 승인하는 행위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훈을 뺀 모두가.
무려 수백억을 투자하는 프로젝트인데. 왜 ‘장’이 붙은 분들께서는 무조건 빠르게 결정하기를 바라는 걸까? 조급하게 진행했다가 말아먹은 저번 프로젝트를 까먹은 것일까?
“본부장님. 제 생각엔 (경쟁사)N사 물질과 구조가 매우 유사해서 충분히 저희도 빠른 시간 내에 합성해 낼 수 있을 것 같구요. 앞서 N사의 임상 결과들도 참고할 수 있으니 페이스메이커도 있는 셈이죠. 3개월 안에 해봄직 한 프로젝트 같습니다. “
또, 이바카라임이 껴들었다.
우리 회사 정치질의 대가 이바카라임. 자기가 맡은 미생물들은 다 죽이고 입만 살아남은 인간이다.
실험보다 회의를 잘하고, 데이터보다 보고서를 잘 만들고, 논문보다는 사람을 읽는.
정훈과는 정반대의 사람이다.
“역시 이바카라임이 정리를 해주니까 이해가 가네. PL(프로젝트 리더)을 이바카라임으로 바꿔야 하는 거 아냐? “
회사생활 5년 차. 이쯤이면 안다.
회사는 연구만 하는 곳이 아니라는 걸. 누군가는 실험을 하고, 누군가는 방향을 정하고, 누군가는 사람을 움직인다.
정훈도 안다. 자신이 첫 번째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배운 대로 정직하게 일을 했을 뿐인데.
연구와 일은 가지고 있는 본질이 달랐다. 연구는 항해를 하는데에 의의가 있지만, 일은 돈이 돼야 의미가 생긴다.
이 당연한 사실을 왜 입사하고 나서야 깨달았지? 차라리 교수가 되는 게 나았을까? 지금이라도 포닥(post-doctor) 자리를 알아봐야 할까?
정훈은 매일같이 이 질문을 하며 퇴근을 한다.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들과의 술자리. 지옥의 9호선을 뚫고 강남역 포차에 도착했다.
오늘의 주인공은 ‘하이닉스를 다니는 예비 신랑’이다. 결혼하는 것도 부러운데 하필 그 친구가 하이닉스까지 다닌댄다. 경사에 경사가 겹쳐 얼굴에 빛이 났다.
아 배 아파.. 정훈에게도 닉스통이 찾아오는 듯하다.
“야 너네 성과급 진짜 6억이야?”
“10억이라는 소리가 있던데.”
“아직 안 받아봐서 몰라.. 오랜만에 만나니까 반갑네. 한잔 하자~”
저 여유마저 살짝 재수 없다.
“정훈이는 회사 잘 다니지? 바카라임으로 입사했으니까 진급부담은 없겠다. “
“S대생이면 회사 본부장까지는 노려볼 수 있지 않아? “
본부장? 오늘 그 본부장한테 보란 듯이 깨졌다.
“나도 뭐 똑같은 월급쟁이지.”
“너도 잘 되겠지. 우리 중에 제일 공부 잘했는데.”
이 순수한 위로가 더 가슴 깊숙한 곳을 찌른다.
알렝드보통은 말했다.
불안은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동료가 나보다 잘 될 때 느끼는 감정이라고. 정훈은 불안했고 또 무력해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술기운에 혼자 읊조려본다.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지만... 여전히 난 걸어가고 있네...”
정훈이 바라왔던 건 돈이었을까? 아니면 명예..? 예쁜 와이프와 토끼 같은 자식들?
노래 가사처럼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길을 잃었다는 것은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