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8학군 전교1등 출신 파이어족

2화. K대출신 개발자 한수(1)

by비니스

“한수씨는 아이 생각 없어요?”


또 시작이다.


‘결혼’ 다음은 결국 ‘아이‘까지.

대체 이 인생 퀘스트는 언제 끝나는 걸까?


“어느 대학 갈거야?“

“전교 1등이면 의대 가야지~”


질문인 척하는 답정너의 굴레들에서 겨우 벗어났더니.. 5년마다 새로운 질문들이 다시 사람을 가둔다.


첫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는 말이 참 싫다.

하필 첫단추를 잘못 끼운 나에게는 너무 가혹한 문장이다. 앞으로 잘하면 되지 싶다가도 먼저 풀이 죽는다. 마치 지금까지의 모든 선택이 잘못 끼워진 시작을 만회하기 위해 존재했던 것처럼 느껴진다. 괜히 혼자 눈치를 보게 된다.


첫단추는 2019년도 입시였다.

역대급 불수능. 강남8학군 전교1등도 피해 갈 수 없던 불바다의 현장이었다.


태어나 처음 봤다. 2등급이 끼어있는 성적표.

그의 성적은 유명세를 타고 빠르게 퍼졌다. 무려 전교 1등의 실패라니. 본인만 빼면 모두에게는 희소식이었다.


그때 다짐을 했다. 재수는 하지 않겠다고. 모두의 기대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싶다는 삐딱한 고집이 생겼다.


‘첫수능은 망했지만 재수해서 S대 간 사람들' 중 하나가 되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수능은 망했지만 S대보다 성공한 전교1등'이 되고 싶어졌다.


그렇게 재수를 포기하고 K대 컴퓨터공학과에 현역으로 입학을 했다.


지금까지 깬 퀘스트들 중 유일하게 자랑스러운 건 결혼이다.


아내와는 대학시절 소개팅으로 만났다. 첼로를 전공한 그녀는 첼로의 저음처럼 조용하지만 단단한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아내 앞에만 서면 이상하게 무장해제가 된다. 수다스러워지고 투정 부리고 싶어진다. 안정적인 척 삐그덕 대던 내 삶은 그녀를 만나고 나서야 조금씩 편안해지고 긴장을 풀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은 두 번째 결혼기념일이다.

다이아몬드 반지 하나 없이 프러포즈했던 게 계속 마음에 걸리던 차에, 연말 인센티브가 두둑이 들어왔다. 구실이 참 좋은 시즌이었다.


결혼기념일 겸 크리스마스 선물로 비싼 걸 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티는 안 냈지만 한수는 아내보다 더 들떠있었다.


압구정 현대백화점 1층.

적어도 오늘만큼은 지하1층이 아닌 1층에서 쇼핑을 하는 날이었다. 한사코 비싸다며 거절하던 아내도 작고 반짝이는 것들이 가득한 분위기에 조금씩 스며들고 있었다.


출처: 티파니 앤 코


“먼저 티파니 앤 코부터 가볼까?"


브랜드명도 잘 모르지만 가장 읽기 쉬운 매장부터 기웃거려 본다.


백화점은 기세다! 괜히 어깨 펴고 우쭐대며 매장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가는데


"어, 한수야."


낯익은 얼굴이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이름이 기억이 났다.


"지원이?"


만년 전교2등 우지원.

익숙한 얼굴을 보자마자 10여년 전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잘 지냈어? 여기서 다 보네."

"그러게. 나야 뭐 일하고 있지. 너도 졸업한 지는 꽤 됐겠네?"


대충 알고 있었다. 어떻게 살고 있는지.


불수능에 같이 휩쓸린 쪽과 달리 혼자 방화복을 입고 있던 사람. 같은 해에 S대에 입학했고, 26살에 졸업을 하고 서른 살에 결혼을 했다.


성적만큼이나 인생도 묘하게 닮아 있었다. 적어도 겉보기에는.


“어 맞아. 나 이제 곧 애아빠 된다. 시간 진짜 빠르지? “


인생 퀘스트는 한수보다 더 빠르게 깨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얼굴이 참 좋아졌다. 딱히 성형을 한 것 같진 않은데 얼굴에 이상하게 광이 돈다.


“축하한다 야. 다음에 애들이랑 한 번 모이자. 정우가 동창회 하자고들 하던데.”

“그래. 진짜 꼭 다시 보자.”


기약 없는 약속을 남기고 얼른 자리를 뜨려는데 지원이 명함까지 챙겨 건넨다.


S전자?

결국 너도 공돌이의 정석대로 길을 가고 있구나. S대 출신이 S전자를. 학교를 주름잡던 전교 1,2등이 둘 다 결국 회사원이라니.


씁쓸하지만 묘한 위로를 받으며 고개를 드는데


“고객님, 결제 도와드리겠습니다. “


직원이 결제가 끝난 카드를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건넨다.


근데 카드가 조금 이상했다. 새까만데 번쩍이는 금빛 테두리가 둘러져 있었다. 게다가 점장 포스를 풍기는 직원이 갑자기 나타나 매장 밖까지 직접 배웅을 한다.


싸했다.


이상하게 이런 촉은 늘 틀린 적이 없었다. 방금 본 건, 소문으로만 듣던 ‘블랙카드’였다.


그렇다. 지원은 이 백화점 VIP가 분명했다.


대체 일개 온라인 게임인이 어떻게 백화점 VIP가 될 수 있지? 집안이 부자이거나, 본인이 부자이거나. 어느 쪽일까 싶어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확실한 건 지원이 그렇게 소문난 부잣집 도련님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결혼을 잘한 걸까? 그런 얘기는 딱히 못 들었던 것 같은데..


“오빠, 무슨 일 있어?”


아 맞다. 옆에 아내가 있었다.


“어. 뭐부터 볼까? 자기 목걸이는 차잖아. 이거 어때?”

“오빠 나 아무래도 체한 것 같아. 우리 다음에 다시 오자. “


체할 것 같은 건 이쪽인데, 아내 속이 먼저 안 좋아졌다. 이래서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걸까.


머릿속이 온통 ‘쟤가 어떻게 VIP 지?’라는 생각으로 가득 차서, 더 이상 쇼핑이고 뭐고 다 귀찮아졌다.


아내가 화장실을 간 사이 인친들을 타고 타고 지원이의 인스타그램을 들어가 본다.

출처: 블라인드


#파이어족

그의 부캐였다. 지원답지 않았다. 기사에서나 보던 파이어족. 코인으로 한방을 노리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백화점에서 본 지원은 그런 이미지와는 조금 달랐다. 묘하게 품격이 있었다.


그럼 그 명함은 뭐지?

파이어족 지망생이라는 뜻인가?


질문이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얼마를 번 걸까?

언제 은퇴할 생각인 걸까?

무슨 주식을 산 걸까?


올림픽대로를 달려도 머릿속은 여전히 티파니 매장 안이었다.


그러다 문득 한수 자신에게 질문이 던져졌다.

”무료하지만 착실히 퀘스트들을 깨오던 나의 삶의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더 이상 인생의 과제가 남지 않는 것.

그래, 자유를 갈망해 왔던 것 같다.


지원에게서는 그 자유가 보였다. 단순히 돈이 많아 보이는 느낌이 아니었다. 여유롭고 자주적인 사람 특유의 분위기. 마치 더 이상 누구의 평가도 신경 쓰지 않는 사람 같았다.


“자기야.”

“응?”

“내가 자기 백수 만들어줄게. “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다만, 나와 비슷했던 어쩌면 나보다도 뒤처진다고 생각했던 친구가 걸어간 길이라면.. 나도 갈 수 있을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겼다.


마음속에 어딘가에 아주 작은 불씨가 피어났다. 이것이 열정일지 열등감인지 확인해보고 싶어졌다.


한수는 처음으로 스스로 퀘스트를 설정했다.


“파이어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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