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

byGoodmorning

삶에서 쉼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고된 일상의 반복, 관계 속에서의 지침,

사람에 대한 실망의 *더께가 쌓여 마음이 뚱뚱해졌을 때, 바짝 말리고 싶은 순간이 있다.


필리핀 공항에서 경비행기를 타고 팔라완 인근의 작은 섬 파말리칸으로 가는 여정은 예상보다 거칠었다. 쉬러 가는 길이 고행이었다.


피곤이 기세 좋은 먹구름처럼 밀려올 즈음 창밖으로 작은 섬이 눈에 들어왔다. 기장은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이라고 극찬한다.


섬 크기는 길이 2.8km, 폭은 가장 넓은 곳이 600m, 섬 전체가 하나의 리조트이다. 투숙객들이 소비하는 대부분의 채소와 과일을 직접 재배한다. 제대로 된 쇼핑몰은 고사하고 편의점조차 없다.


식(食)과 주(住)를 해결할 기본 건물과 몇 개의 운동 시설이 있다. 방문객들이 즐길 오락거리는 액티비티와 웰 니스(wellness) 프로그램이 전부다.


체크인을 하고 나니 할 일이 없었다. 뭘 해야 할지 난감했다.


세 식구가 한참을 바다만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선택해 왔는데 그 시간이 주어지자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몰랐다.


우선 섬을 탐방하며 식당과 운동시설 등의 위치를 확인했다.

좁은 섬을 빙글빙글 돌며 리조트 스태프(staff) 들과 인사를 주고받았다. 스몰토크를 나누며 필요한 정보도 물어봤다. 마치 한동네 주민처럼.


그들은 대부분 필리핀 현지인으로 근처의 작은 섬에 거주한다. 개인 통통배로 같은 섬에 사는 사람들끼리 함께 출ㆍ퇴근을 한다. 그들의 퇴근시간엔 도로 위처럼 바다 위에 가늘고 긴 배들의 귀갓길이 열린다.


그들도 이 섬의 방문객이고, 관광객인 우리도 이 섬의 방문객이다. 우리 모두 방문객이기도 하고 이 작은 섬마을의 주민이기도 한 것이다. 좁은 섬에서 자주 마주치니 얼굴은 금세 익숙해졌다.


정보를 더 얻기 위해 로비(Lobby)로 갔다.

체험 가능한 프로그램을 물어보자 요가를 추천해 주었다.


"해보자"


섬 내에서 이동할 때 사용하는 카트를 주차시켜 놓고 낮은 언덕을 걸어올라 요가원으로 들어갔다. 미리 예약해야 하는 곳인데 지금 시간에 예약자가 없어 오늘 요가는 취소 됐단다. 응대가 친절하고 상냥해서 눈아래 보이는 풍경을 보며 차만 얻어 마시고 나왔다. 어딜 가나 느긋했고 누구도 계획에 집착하지 않았다. 우리 가족만 아직 조바심을 버리지 못했다.



다시 바다로 갔다.

다른 이들은 해변가에서 뭘 하는지 쳐다봤다. 썬베드에 누워 그냥 자거나 바카라을 본다. 풍경에 자연스레 녹아들어 자연의 일부가 된 듯했다. 그냥 고요히 거기에 있었다.


'아... 저렇게 쉬러 온 거였지. 우리도'.


그제야 우리도 무언가 할 생각을 접고 썬베드에 자리를 잡았다. 남편은 낮잠을 자고 아들과 난 바다에 들어갔다 나왔다 했다. 작은 소라게를 쳐다보고 칠게의 빠른 발걸음을 쫓아다녔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둘째 날이 되자 이제 좀 요령이 생겼다. 패들보드를 예약해 간단히 타는 법을 배우고 즐겼다. 그리고 먹고, 쉬고, 먹고, 잤다. 시간은 오롯이 내 소유였다.


파도소리 외에는 아무 기척이 없는 밤을 보내고 우리의 이야기로 아침을 맞았다. 느릿느릿 마치지 못한 어제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우리의 목소리만이 가득한 공간에서 웃음은 차고 넘쳤다.


지구의 모든 섬을 가보지 못해 기장의 말대로 '가장' 아름다운 곳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식구는 이곳에서 새로운 경험을 쌓았다.


세상의 시간을 잊고, 하지 않을 자유와 조우한 경험. 그 경험이 뚱뚱한 마음을 조금은 가볍게 해 주었을까.


돌아오는 길, 경비행기는 가뿐하게 날았다.



* 더께 ; 몹시 찌든 물건에 앉은 거친 때.

겹으로 쌓이거나 붙은 것,

또는 겹이 되게 덧붙은 것.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