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포로에 갈까요. 멍을 덮으러, 열을 덮으러, 삿포로에 가서 쏟아지는 눈발을 보며 술을 마실까요. 술을 마시러 갈 땐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스키를 타고 이동하는 거예요. 전나무에서 떨어지는 눈폭탄도 맞으면서요.
(중략)
삿포로에 갈까요.
이 말은 당신을 좋아한다는 말입니다.
<이병률;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
삿포로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추위와 눈은 자신이 없었다. 쏟아지는 눈폭탄을 맞으며 여행할 자신이. 그럼에도 겨울의 삿포로는 느끼고 싶었다.
궁리를 거듭하고 일기예보를 확인한 후 11월 초로 일정을 잡았다. 아오모리에서 시작해 하코다테, 오타루를 거쳐 삿포로로 들어갔다.
삿포로의 공기는 차고 바람은 제법 쌀쌀했다. 그래서인지 하루 일정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오면 몸은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샤부샤부로 속을 데우고 온천으로 몸을 녹인 후, 나른한 몸과 발그레진 얼굴로 창가에 앉았다. 붉은 단풍을 눈에 담으며 쏟아지는 잠을 밀어냈다.
바림이 이루어진 붉은색에 시린 찬바람이 스치는 광경은 시야까지 시원하게 했다. 아직은 건재한 초록의 잎과 기온차로 빛깔이 다른 옷을 입고 있는 단풍은 서로를 돋보이게 했다. 그렇게 늦가을이 남겨놓은 조화로움도 눈의 계절만큼 아름다웠다.
모든 것이 계획한 대로 완벽했다. 지금까지는.
온천을 하고 푹 자고 일어난 귀국 당일. 새벽에 일어나 호텔방 커튼을 거두니 세상이 하얗게 변해있었다. 첫눈인데 적설량이 우리나라와는 비교불가였다. 소리도 없이 쏟아지는 굵은 눈송이는 여전히 기세가 좋았다. 당분간 그칠 기미는 없어 보였다.
오전 반나절 느긋하게 시내를 관광할 예정이었는데 마음이 급해졌다. 공항 가는 길이 차단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래도 아쉬우니 홋카이도 구청사와 시계탑, 오도리 공원만 들르기로 했다.
<홋카이도 구청사의 첫눈>
차에서 내려 발이 푹푹 빠지는 눈 속을 걸어 들어갔다. 아무도 들이지 않은 순백의 눈 위에 내 발자욱을 남기며 서둘러 사진을 찍었다. 사람도 드문 하얀 도심은 화려한 중심가의 모습을 모두 눈 속에 감추고 있었다.
같은 장소처럼 느껴지지 않는 생경한 마음도 눈 속에 묻어둔 채 우린 공항으로 향했다. 도로는 이미 온갖 차들로 옴짝달싹 못했다. 커다란 주차장이 된 듯했다. 시간에 맞춰 공항에 도착할 수 있을지, 비행기는 예정대로 출발할지, 눈발이 무성한 하늘만 멍하니 올려다봤다.
'에휴,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마음을 접고 그제야 찍은 사진을 돌려봤다. 어제 만났던 빨간 단풍나무 위에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대문사진). 보기 드문 광경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가을이 머문 자리에 겨울 손님이 미리와 있는 풍경은 신기한 선물을 받은 느낌이었다.
피하려고 애쓰다 맞닥뜨린 풍경이 오히려 못 잊을 추억이 되었다.
사진을 들여다보며 스스로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리 피하려 했을까. 만나보면 다른 세상이 열리는 걸. 눈축제의 고장이니 눈을 한껏 즐겨볼걸. 이렇게 아름다운데...
미리 가늠해 보고 피하느라 마주치지 못했던 것들이 사는 동안 얼마나 많았을까. 마주치지 못했던 많은 것들은 또 얼마나 빛나는 원석이었을까.
이병률 시인의 문장처럼 전나무에서 떨어지는 눈폭탄은 아니지만, 단풍나무에서 떨어지는 눈송이를 맞으며 삿포로의 색다른 경치를 마음에 담았다.
이번엔 작은 원석 하나를 지킨 듯하다.
<눈 오기 전 날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