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로그

돌아오면

by천시록

《신의 로그》

PART 3 — 〈몽골〉


제11화 〈돌아오면〉



환주를 떠난 뒤에도 전쟁은 계속됐다.


성 하나를 차지했다고 해서 군대가 오래 머무르는 일은 없었다. 부상자를 추슬러 말과 수레에 나누어 태우고, 식량과 전리품을 정리한 뒤 새로운 명령이 떨어지면 다시 천막을 걷었다.


어제까지 사람의 피가 마르지 않던 땅도 아침이면 빈 말뚝과 불 꺼진 화덕만 남았고, 수부타이의 천호는 남쪽과 서쪽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또 다른 성과 들판을 향해 움직였다.


에센도 언제나처럼 그 뒤를 따랐다.


열다섯이던 소년이 열여섯이 되어가는 동안 세월은 날짜보다 길과 말로 기억됐다. 들판이 황금빛으로 익어가던 곳에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곡식 냄새 대신 연기 냄새를 맡았다. 겨울에는 눈이 녹지 않은 산길을 넘었고, 날이 풀린 뒤에는 말 배까지 잠길 만큼 불어난 강을 건넜다.


전투가 벌어지면 에센은 뒤에 남아 예비마의 고삐와 짐을 맡고 다친 말을 받아냈다. 싸움이 끝나 수부타이가 돌아오면 사람보다 먼저 그가 타고 온 말의 다리와 발굽을 살폈으며, 발굽 가장자리가 갈라진 말은 며칠씩 안장을 벗겨 쉬게 하고 가죽에 쓸려 살이 벌겋게 오른 자리에는 직접 으깬 약초를 기름에 섞어 발랐다.


전투에서 말 한 필을 잃으면 새 말을 골라 성질과 걸음을 먼저 살폈다. 수부타이가 올라탄 뒤에도 며칠 동안 곁을 지키며 고삐와 다리의 신호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지켜봤다.


그렇게 털을 빗고 발굽의 진흙을 긁어내는 동안 초원의 풀은 다시 짙어졌고, 낮의 햇볕도 뜨거워졌다.


군대가 며칠 이상 한곳에 머물면 그 주변에는 어김없이 장터가 생겼다.


사람 수천 명과 그보다 많은 말이 한자리에 모이면 필요한 것도 끝이 없었다. 곡식과 술을 실어온 행상인, 찢어진 가죽을 꿰매는 장인, 말굽에 쓸 쇠와 칼을 갈 숫돌을 파는 사람까지 천막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몽골군이 다니는 길이 넓어질수록 상인들의 얼굴도 다양해졌다. 낙타 등에 비단과 향료, 말린 과일과 낯선 장신구를 싣고 서쪽에서 찾아오는 상단도 차츰 눈에 익어갔다.


1212년 여름, 에센은 그런 장터에서 마리암을 처음 만났다.


그날도 시작은 말이었다.


수부타이가 아끼는 예비마 한 필을 끌고 천막 사이를 지나던 에센은 손에 쥔 고삐가 갑자기 옆으로 팽팽하게 당겨지는 것을 느꼈다. 돌아봤을 때에는 이미 말이 길가에 놓인 바구니 쪽으로 목을 길게 뻗어 커다란 주둥이를 처박고 있었다.


“야, 너 뭐 해!”


에센이 고삐를 잡아당기기도 전에 작은 손 하나가 먼저 튀어나왔다.


“안 돼!”


손바닥이 말의 콧등을 힘껏 밀었다.


놀란 말이 콧김을 뿜으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굵은 입술 사이에는 갈색으로 쪼글쪼글하게 마른 열매 하나가 물려 있었고, 그 앞에는 에센보다 한 살쯤 어려 보이는 여자아이가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서 있었다.


머리를 덮은 엷은 천 아래로 검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흘러내렸고, 짙은 눈썹 아래의 커다란 눈은 화가 잔뜩 난 탓인지 유난히 더 또렷해 보였다.


에센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예쁜 얼굴이 아니었다.


저 작은 사람이 자기보다 몇 배나 커다란 말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소녀가 에센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놔.”


몽골어 발음은 조금 서툴렀지만 뜻은 분명했다.


에센이 말의 입가로 손을 가져갔다.


“잠깐만 기다려. 아직 다 먹지는 않았으니까 꺼내볼게.”


말이 고개를 휙 돌렸다.


에센이 반대편으로 손을 뻗자 이번에는 목을 반대쪽으로 비틀었고, 소녀까지 달려들어 주둥이를 붙잡으려 하면서 셋이 길 한복판에서 우스운 씨름을 벌였다. 입 밖으로 반쯤 나와 있던 열매는 그사이 조금씩 말의 입 안으로 사라졌다.


“네 말이잖아! 제대로 잡아!”


“잡고 있으니까 네가 손부터 빼! 손가락까지 먹히겠다!”


마침내 말이 몇 번 우물거리더니 열매를 꿀꺽 삼켰다.


두 사람의 손이 동시에 멈췄고, 에센이 말의 입술을 벌려 안을 들여다봤지만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없는데.”


뒤쪽 천막에서 굵은 웃음소리가 터졌다.


수염이 짙은 중년 남자가 팔짱을 낀 채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가 홱 돌아서더니 에센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억울함을 빠르게 쏟아냈지만, 남자는 딸의 화난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오히려 더 크게 웃었다.


“마리암.”


남자가 웃음을 누르며 딸의 이름을 불렀다.


에센은 그 이름을 속으로 한 번 따라 했다.


마리암.


소녀가 다시 돌아보자 에센이 물었다.


“내 욕 했지?”


마리암은 잠시 눈을 굴리다가 입꼬리를 올렸다.


“말도둑.”


에센의 얼굴이 굳었다.


“열매를 훔친 건 말인데 왜 내가 말도둑이야?”


“네 말이 훔쳤고 너는 말 주인이잖아. 그러니까 네가 갚아.”


반박할 말을 찾는 동안 마리암의 얼굴에서 화가 먼저 사라졌다. 조금 전까지 눈을 치켜뜨고 있던 아이가 입을 가린 채 웃기 시작했고, 그 웃음이 커질수록 에센은 괜히 자기 말의 고삐만 짧게 고쳐 잡았다.


마리암은 바구니를 뒤적여 말이 삼킨 것과 똑같은 열매 하나를 꺼냈다.


“말이 먹은 것은 네가 갚고, 이건 네가 먹어봐.”


에센이 열매를 받아 들었다.


“이게 뭔데?”


“살구.”


말린 살구를 입에 넣자 먼저 새콤한 맛이 혀끝을 건드렸고, 몇 번 씹는 사이 그 안에서 생각보다 진한 단맛이 배어 나왔다. 초원에서 흔히 씹던 육포나 굳힌 젖과는 전혀 다른 맛이었다.


마리암은 에센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맛있지?”


솔직하게 대답하면 왜인지 지는 것 같았다.


“별론데.”


마리암의 손이 바로 앞으로 나왔다.


“그러면 뱉어. 내가 먹을게.”


에센은 남은 살구를 급히 입 안으로 밀어 넣었고, 마리암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에는 뒤에 있던 아버지까지 함께 웃자 에센은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말의 고삐를 당겼다.


“가자.”


“말도둑!”


등 뒤에서 목소리가 따라왔지만 에센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날 저녁 물을 마실 때에도 입안 어딘가에는 살구의 단맛이 남아 있는 듯했고, 눈을 감으면 이상하게 그 맛과 함께 마리암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



그 뒤로 몇 해 동안 두 사람은 만나지 못했다.


금나라와의 전쟁은 해를 넘겼고, 수부타이의 천호도 한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성을 포위하다가도 적의 보급로를 끊으라는 명령이 떨어지면 수십 리를 달렸고, 다른 부대와 합쳐져 거대한 군세의 일부가 되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갈라졌다.


에센은 열일곱이 되고 열여덟이 되어갔다.


그동안 수많은 상단이 야영지를 드나들었다. 처음에는 신기했던 낙타도, 코를 찌르던 향료 냄새도, 서쪽 상인들이 펼쳐놓은 화려한 천도 차츰 평범한 장터의 풍경이 되었다.


그런데 말린 살구만은 달랐다.


길가 바구니에 갈색 살구가 소복이 쌓인 것이 보이면 에센은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늦췄다. 처음 몇 번은 단지 그때 먹었던 맛이 생각나서 그러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좌판 뒤에 앉아 있는 사람이 수염 난 늙은 남자뿐인 것을 확인하고 나면 묘하게 마음이 가라앉았고, 그제야 자신이 살구를 보고 있던 것이 아니라 사람을 찾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뒤로는 굳이 다른 이유를 붙이지 않았다.


살구가 보이면 주변을 한 번 훑어보고, 없으면 지나갔다.


1215년에는 금나라의 수도 중도가 함락됐다.


거대한 도시 위로 연기가 며칠 동안 떠 있었고, 성 밖으로 이어진 길에는 피란민과 군대, 짐수레가 뒤엉켰다. 수부타이의 천호에도 곧 새로운 이동 명령이 내려졌고, 에센은 다시 말의 안장을 조이며 다음 길을 준비했다.


사람의 몸은 몇 해 사이 눈에 띄게 자랐지만 기억 속의 마리암은 이상하리만큼 그대로였다.


손바닥으로 말의 코를 밀어내고, 살구를 내놓으라며 화를 내다가 금세 웃어버리던 여자아이.


그러던 어느 늦여름 오후였다.


몽골군이 며칠째 머물던 야영지 외곽으로 큰 상단 하나가 들어왔다. 긴 목을 흔드는 낙타들이 줄지어 언덕을 넘어왔고, 등에 실린 가죽 꾸러미와 색색의 천이 햇빛 아래 흔들렸다. 짐을 내리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진한 향료 냄새가 퍼졌고, 천막 앞에 놓인 바구니 하나에는 말린 살구가 가득 담겨 있었다.


에센의 걸음이 저절로 느려졌다.


사람들 사이를 한 번 훑어봤지만 찾는 얼굴은 없었다. 낙타들 사이를 다시 살펴봐도 보이지 않았다.


몇 년 전 장터에서 잠깐 마주친 여자아이였다. 이름과 얼굴을 아직 기억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우스운데, 상단이 올 때마다 찾고 있는 자신의 모습은 생각할수록 더 우스웠다.


에센은 고개를 저으며 몸을 돌렸다.


그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날아왔다.


“말도둑.”


발이 멈췄다.


몇 년 동안 한 번도 듣지 못한 말인데도 이상할 만큼 즉시 알아들을 수 있었다.


에센은 천천히 돌아섰다.


마리암이 서 있었다.


처음 한순간에는 기억 속의 여자아이와 바로 겹쳐지지 않았다. 키가 훌쩍 자랐고 둥글었던 얼굴에는 조금 더 또렷한 선이 생겨 있었다. 머리를 덮은 천 아래로 검은 머리카락이 길게 내려왔고, 햇볕에 그을린 피부는 기억보다 한층 짙었다.


그러나 짙은 눈과 상대를 놀릴 때면 한쪽이 먼저 올라가는 입꼬리는 그대로였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에센은 몇 년 동안 살구 바구니 앞에서 자신이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었다.


그런데 막상 입을 열자 나온 말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많이 컸네.”


말이 입 밖으로 떨어진 순간 에센은 스스로를 때리고 싶었다.


마리암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그녀는 에센의 얼굴부터 넓어진 어깨까지 천천히 훑더니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


“너도 많이 늙었네.”


에센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바라보자 마리암은 몇 걸음 지나쳐 가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웃었다. 그 웃음소리를 듣자 에센도 따라서 웃음이 터졌다.


몇 년 만에 다시 만난 두 사람이 나눈 말은 고작 그것뿐이었다.


그런데도 에센은 그날 장터의 다른 소리들을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



상단은 야영지에 며칠 머물렀다.


에센은 그동안 마리암이 더 이상 아버지의 뒤를 따라다니며 잔심부름을 하던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녀는 작은 놋쇠 저울로 물건의 무게를 직접 달았고, 장부를 펼쳐 거래한 수량을 확인했으며, 천과 말린 과일과 장신구의 값을 스스로 정했다. 능청스럽게 값을 깎는 손님에게는 웃으며 받아쳤지만 자신이 정한 선 아래로 내려가면 얼굴에서 웃음부터 사라졌다.


“그 가격에 사고 싶으면 저쪽 좌판으로 가세요. 대신 돌아와도 지금 부른 값으로는 못 드립니다.”


흥정하던 남자가 혀를 차며 물러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왔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에센이 웃음을 흘리자 마리암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남의 장사 구경할 만큼 한가하면 짐이라도 옮겨줘. 할 일이 있으면 가서 하고.”


“할 일은 있는데, 지금은 이쪽이 더 재미있어.”


“그러면 방해하지 말고 조용히 있어.”


에센은 가지 않았다.


마리암의 아버지도 그 모습을 보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몇 년 전보다 흰 수염이 늘어난 남자는 에센을 알아봤고, 딸의 천막 주변을 별다른 용건도 없이 오가는 이유 역시 모를 리 없었다.


그래도 내버려두었다.


천막 한쪽에는 작은 장신구들이 늘어져 있었다.


금속 고리와 색유리 구슬, 여러 빛깔의 돌을 꿴 목걸이와 팔찌 사이에서 에센은 유난히 붉은빛이 짙은 팔찌 한 쌍을 발견했다.


작은 홍옥수 구슬들이 같은 방식으로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손바닥 위에서 돌려보자 햇빛이 구슬 안쪽까지 스며들며 어두운 붉은빛을 맑게 밝혔다.


“이 돌은 뭐야?”


마리암이 에센의 손에 들린 팔찌를 힐끗 봤다.


“홍옥수. 남쪽에서 온 돌이야.”


마리암이 값을 덧붙였지만 에센은 제대로 듣지 않았다.


매끈한 구슬을 엄지로 문지르다가 문득 마리암의 손목을 내려다보았기 때문이다.


붉은색이 저 손목에 있으면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다시 팔찌를 보았다가 고개를 들었는데 마리암과 눈이 마주쳤다.


“왜 내 손을 봐?”


“안 봤어.”


“지금 봤잖아.”


에센은 황급히 팔찌를 내려놓고 바로 옆의 목걸이를 집어 들었다.


“이건 어디서 왔는데?”


마리암은 대답하면서도 에센이 조금 전 홍옥수 팔찌와 자신의 손목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챈 듯 입가에 웃음을 걸었다.


에센은 다른 물건을 보는 척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날 저녁 장사를 마친 뒤, 천막에서 조금 떨어진 곳을 지나던 에센은 마리암이 장신구를 정리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의 손에는 낮에 에센이 만졌던 홍옥수 팔찌 두 개가 들려 있었다.


마리암은 똑같이 생긴 두 팔찌를 잠시 나란히 놓고 바라보더니 다른 상품들과 섞지 않고 작은 가죽주머니에 함께 넣었다.


에센은 자신이 보았다는 사실을 들키기 전에 조용히 그곳을 지나갔다.



───



상단이 떠나는 아침, 에센은 부탁받지도 않은 마리암의 말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네 발을 차례로 들어 발굽을 살피고 안장끈까지 당겨본 뒤에야 몸을 일으키자, 말 위에 앉아 기다리던 마리암이 웃으며 물었다.


“내 말도 훔치려고 그렇게 자세히 보는 거야?”


에센은 말의 목을 툭 두드렸다.


“생각 중이야. 말 상태가 좋으니 훔칠 만하네.”


“훔쳐가면 끝까지 따라가서 잡을 거야.”


“그럼 꼭 훔쳐야겠네. 그래야 다시 만날 테니까.”


마리암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에센도 웃었지만 상단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 웃음은 오래 남지 않았다.


말과 낙타가 조금씩 멀어지고 방울소리마저 작아질 때까지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번에는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게 될지 알고 있었다.



───



그 뒤로 두 사람의 길은 묘하게 자주 겹쳤다.


봄에 헤어졌다가 찬바람이 부는 가을에 다시 만날 때도 있었고, 계절이 두 번이나 바뀌도록 아무 소식도 듣지 못할 때도 있었다. 전쟁을 따라 움직이는 에센과 장터를 따라 움직이는 마리암에게 다음 만남의 날짜를 정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한번은 서쪽에서 큰 상단이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에센이 야영지의 천막 사이를 거의 모두 돌아본 적도 있었다.


말린 살구를 파는 사람은 있었다.


마리암은 없었다.


에센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돌아와 수부타이의 말에 안장을 얹었지만, 그날 저녁에는 낙타 방울이 들릴 때마다 고개를 들었다.


그런 시간이 쌓이면서 방울소리는 어느 순간부터 단순한 장터의 소리가 아니게 됐다. 멀리서 낙타의 작은 방울이 울리면 에센의 손이 먼저 멈췄고, 수부타이도 그것을 알아차렸다.


어느 날 에센이 말의 털을 빗다가 야영지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있자, 수부타이가 곁으로 다가와 그의 손에서 빗을 빼앗았다.


에센이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자 수부타이가 말의 목덜미를 대신 빗어내렸다.


“말은 내가 보고 있을 테니 가봐라. 기다리던 상단이 들어온 모양 아니냐.”


에센은 모르는 척하려다가 수부타이의 눈을 보고는 포기했다.


처음에는 천천히 걸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티를 내지 않으려는 듯 말의 등을 한 번 쓸고, 주변의 말뚝도 괜히 확인했다.


그러다 자기 행동이 더 우습다는 생각이 들자 결국 웃음을 흘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수부타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뛰다가 얼굴부터 땅에 박지 마라!”


에센은 돌아보지도 않고 손만 한 번 흔들었다.


언덕을 넘어온 상단의 첫 줄이 보였고, 천막 사이로 뛰어가던 그의 시야 끝에 익숙한 색의 천이 들어왔다.


마리암도 에센을 발견한 듯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가 멈췄다.


에센도 몇 걸음 앞에서 멈춰 섰다.


에센은 가쁜 숨을 골랐고, 마리암은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막상 마주 서자 둘 다 바로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결국 에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왔네.”


마리암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것뿐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충분했다.



───



그날 저녁 에센은 강가에서 마리암을 발견했다.


마리암은 얕은 물에 손과 얼굴을 씻은 뒤 머리에 두른 천을 고쳐 매고 조용히 기도했다. 낮 동안 장터에서 쉬지 않고 움직이던 사람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움직임이 차분했다.


에센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마리암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초원에서 자신이 보아온 의식과도 달랐지만, 붉은 저녁빛 아래 고개를 숙인 그녀를 보자 굳이 가까이 다가가 말을 걸고 싶지는 않았다.


잠시 뒤 기도를 마친 마리암이 몸을 돌리다가 그를 발견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기도하고 있다고 부르지도 않고.”


에센은 어깨를 으쓱했다.


“조금 전에 왔어. 끝날 때까지 기다리면 되는데 굳이 방해할 필요는 없잖아.”


마리암은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강을 따라 걷기 시작했고, 에센도 자연스럽게 곁으로 붙었다.


둘은 낮 동안 있었던 일을 띄엄띄엄 이야기했다. 장터에서 누가 터무니없는 값을 불렀다는 이야기, 수부타이의 말이 또 안장끈을 끊었다는 이야기처럼 특별할 것 없는 말들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대화가 끊겼다.


강물이 얕은 돌 사이를 흐르는 소리와 풀잎이 바람에 부딪치는 소리만 남았고, 두 사람의 어깨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끔 스쳤다.


에센은 오른손을 조금만 옆으로 움직이면 마리암의 손에 닿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몇 번이나 손가락이 움직였다가 다시 주먹 안으로 들어갔다.


마리암은 모르는 척 앞만 바라봤다.


갈림길에 도착하고 나서야 에센이 물었다.


“이번에는 언제 다시 올 수 있어?”


마리암은 한동안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몰라. 아버지가 어느 길로 갈지, 다음 장터가 어디에서 열릴지도 아직 정해지지 않았어.”


그 말이 싫었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에센은 더 묻지 않았다.


마리암도 돌아서기 전에 잠시 그를 바라봤지만 결국 아무 말 없이 손만 한 번 흔들었다.



───



그렇게 계절이 바뀌는 동안에도 두 사람은 만나고 헤어졌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헤어질 때마다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됐다. 상단은 다시 올 것이고, 수부타이의 천호가 다른 곳으로 떠났다면 언젠가 또 길이 겹칠 것이다.


서로 보고 싶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낙타 방울이 들릴 때면 에센의 시선은 먼저 야영지 입구로 향했고, 상단이 들어오는 날이면 마리암 역시 사람들 사이에서 그를 찾았다. 몇 번의 만남이 거듭되면서 에센도 이제 그 눈길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 알아볼 수 있었다.



───



1218년.


에센은 스물두 살이 되었고 마리암은 스물한 살이 되었다.


둘이 처음 만났던 여름에 비하면 세상의 모양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몽골의 세력은 계속 서쪽으로 넓어졌고, 카라키타이의 지배가 무너지면서 몽골이 장악한 지역과 호라즘의 영역은 마침내 서로 맞닿았다.


호라즘은 에센에게 아직 먼 서쪽의 나라였다.


마리암에게는 달랐다.


부하라는 그녀가 태어나 자란 도시였고, 어린 시절부터 익숙했던 시장과 길, 친척들이 남아 있는 고향이었다.


두 세력 사이를 먼저 오간 것은 군대가 아니라 상인들이었다.


칭기즈 칸은 호라즘과의 교역을 위해 대규모 상단을 꾸렸고, 서쪽 길과 언어에 익숙한 무슬림 상인 약 사백오십 명이 그 행렬에 참여했다. 비단과 모피를 비롯해 여러 지역에서 모인 상품이 수많은 낙타 등에 실렸고, 칭기즈 칸과 왕족, 여러 장수가 장사에 내놓은 재화도 그 안에 섞였다.


마리암의 아버지도 그 상단에 참여했다.


그리고 이제 자기 몫의 상품과 장부를 바카라임질 수 있는 상인이 된 마리암도 함께 가기로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뒤 에센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마리암은 발끝으로 땅만 문지르는 에센을 지켜보다가 먼저 물었다.


“아까부터 왜 그러고 있어? 내가 호라즘에 간다는 말이 그렇게 싫어?”


“싫은 게 아니라…… 갔다 돌아오는 데 얼마나 걸릴지 궁금해서 그래.”


“나도 정확히는 몰라. 길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 장사가 얼마나 걸릴지는 가봐야 알 수 있으니까. 그래도 장사를 마치면 돌아올 거야.”


에센은 입을 다물었다.


가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말은 할 수 없었다.


자신은 수부타이의 뒤를 따라 몇 달씩 어디로 갈지도 모른 채 전쟁터를 돌아다니면서, 마리암에게만 길을 떠나지 말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날부터 상단의 출발 준비가 시작될 때마다 에센의 시선은 자꾸 그쪽으로 향했다. 낙타의 등 위에 짐이 하나씩 높아질수록 남은 시간이 줄어드는 것 같았다.



───



출발을 사흘 앞둔 저녁, 두 사람은 야영지에서 조금 떨어진 낮은 언덕에 나란히 앉았다.


아래에서는 상단의 준비가 한창이었다. 상인들이 상품을 종류별로 나누었고, 짐꾼들은 낙타 양옆의 무게를 맞춰 매듭을 조였다. 짐승들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목에 달린 방울이 가볍게 흔들렸고, 사람을 부르는 목소리와 가죽끈을 잡아당기는 소리가 저녁바람을 타고 올라왔다.


평소 같으면 둘 중 하나가 먼저 별것 아닌 말을 꺼냈을 것이다.


그날은 그렇지 않았다.


에센은 무릎을 세우고 앉아 아래만 바라봤고, 마리암도 곁에서 아무 말이 없었다.


사흘 뒤면 저 아래의 낙타들이 모두 서쪽을 향해 떠난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머리로만 알고 있던 사실이 그날은 이상할 만큼 가까이 느껴졌다.


에센은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마리암이 곁눈질했다.


“할 말이 있으면 해. 아까부터 입만 열었다 닫았다 하잖아.”


에센은 하고 싶었던 말을 머릿속에서 하나씩 떠올렸다.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래 있지 마라.


다치지 마라.


보고 싶을 거다.


그러나 막상 하나를 고르려 하자 모두 어딘가 부족했다.


에센은 결국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만 말했다.


“돌아오면…… 나랑 살자.”


마리암의 움직임이 멎었다.


아래에서 낙타 한 마리가 길게 울었고, 에센은 대답을 기다리며 손가락으로 무릎의 천을 괜히 문질렀다.


마리암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아주 천천히 웃었다.


“응.”


짧은 대답이었다.


그런데 그 한마디를 듣고 나자 조금 전까지 아래에서 들리던 소음이 모두 멀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에센도 따라 웃었다.


더 말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다시 나란히 앉아 저녁이 어두워질 때까지 상단의 불빛을 내려다봤다.



───



다음 날 마리암은 작은 가죽주머니 하나를 가지고 왔다.


에센이 받아 열자 팔찌 두 개가 손바닥 위로 미끄러져 나왔다.


둘 다 홍옥수로 만든 팔찌였다.


작고 둥근 구슬을 꿴 방식도 같았고, 양 끝을 묶은 매듭의 모양도 똑같았다. 햇빛이 닿을 때마다 어두운 붉은빛 속에서 맑은 빛이 배어 나왔다.


에센은 두 팔찌를 번갈아 봤다.


“이건 전에 팔지 않고 따로 넣어두었던 거잖아.”


“봤어?”


“우연히.”


“거짓말.”


마리암은 웃으며 팔찌 하나를 집어 자신의 손목에 둘렀다. 홍옥수 구슬이 햇빛을 받아 붉게 빛나자 에센은 한동안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봤다.


자신이 오래전 잠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잘 어울렸다.


마리암이 남은 팔찌를 들었다.


“손 줘.”


에센은 망설이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마리암의 손가락이 굵어진 손목을 감쌌다. 붉은 구슬이 한 바퀴 돌아가고, 그녀가 매듭을 단단히 묶는 동안 에센은 손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마리암이 손을 놓았다.


에센은 자기 손목을 내려다본 뒤 마리암의 손목을 보았다.


똑같은 홍옥수 팔찌가 두 사람의 손목에 하나씩 묶여 있었다.


“왜 두 개를 다 남겨뒀어?”


마리암은 자기 손목의 붉은 구슬을 한 번 만졌다.


“그래야 멀리 있어도 다른 하나가 누구에게 있는지 알 수 있으니까.”


에센은 더 묻지 않았다.


다만 자기 손목의 홍옥수 구슬을 엄지로 천천히 쓸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마리암의 아버지가 상단에 실을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는 딸과 에센의 손목을 잠시 번갈아 바라보다 에센과 눈이 마주치자 천천히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에센도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



이틀 뒤, 출발하는 아침은 맑았다.


수백 명의 상인과 말, 낙타가 초원 위로 긴 행렬을 만들었다. 비단과 모피, 여러 지역에서 모여든 상품들이 짐승의 등에 높이 실렸고, 사람들은 출발을 알리는 신호가 나기 직전까지 가죽끈을 당기고 물통의 마개를 확인했다.


에센은 마리암의 말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앞발을 하나씩 들어 발굽을 살핀 뒤 뒷발까지 확인했고, 안장끈과 복대를 손으로 직접 당겨보았다. 전날 이미 본 곳이었지만 그래도 다시 봤고, 마지막에는 물통의 끈까지 잡아당겨 풀리지 않는 것을 확인했다.


말 옆에서 기다리던 마리암이 물었다.


“어제부터 몇 번째 확인하는 건지 알아?”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이야. 밤사이에 끈이 느슨해졌을 수도 있잖아.”


“그러면 이제 됐어?”


에센은 말의 다리와 안장, 물통을 차례로 훑어본 뒤에야 몸을 일으켰다.


“이제 됐어. 그래도 중간에 쉴 때마다 안장 아래를 확인해. 살이 쓸리기 시작하면 바로 알 수 있으니까.”


마리암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마리암의 아버지가 자신의 말고삐를 잡고 다가왔다.


그는 에센을 잠시 바라보다 손을 내밀었다. 에센이 그 손을 잡자 거친 손바닥에 힘을 주어 한 번 맞잡은 뒤 놓았다.


별다른 말은 없었다.


상단 앞쪽에서 출발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낙타들이 하나둘 무릎을 펴고 일어섰다. 목에 달린 방울들이 동시에 흔들리면서 이제는 에센에게 너무나 익숙해진 짤랑거림이 길게 이어졌고, 앞줄의 짐승들이 걸음을 떼자 뒤에 있던 말과 낙타도 차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리암이 말에 올랐다.


에센은 그녀를 올려다봤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조심해.


다치지 마.


기다릴게.


빨리 와.


보고 싶을 거야.


그러나 결국 입 밖으로 나온 것은 하나뿐이었다.


“다녀와.”


마리암이 웃었다.


“응.”


말이 움직였다.


에센은 몇 걸음 따라갔다가 멈췄고, 마리암은 서서히 긴 행렬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다 낙타 몇 마리를 지나고 나서 결국 고개를 돌렸다.


에센은 아직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마리암이 손을 들었다.


손목의 홍옥수가 아침 햇빛을 받아 붉게 빛났다.


에센도 손을 들어 보였다.


굵어진 손목 위에서 같은 홍옥수가 빛을 받았다.


똑같은 두 팔찌가 멀리 떨어진 두 사람의 손목에서 잠시 같은 햇빛 아래 반짝였다.


마리암은 그것을 확인한 뒤 다시 앞을 향했다.


이번에는 돌아보지 않았다.


에센은 오랫동안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처음에는 마리암의 얼굴이 보였고, 조금 더 멀어지자 머리에 두른 천만 구별할 수 있었다. 마침내 수많은 말과 낙타 사이에서 어느 것이 마리암인지 알아볼 수 없게 된 뒤에도 방울소리는 한동안 들려왔다.


그 소리마저 바람 속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에센은 손을 내렸다.


손목의 홍옥수 구슬을 엄지로 한 번 쓸었다.


호라즘은 아직 그에게 멀고 낯선 나라였다.


마리암에게는 고향이었다.


장사를 마치면 돌아올 것이다.


돌아오면 둘은 함께 살기로 했다.


에센은 팔찌의 매듭을 한 번 확인한 뒤 수부타이의 천막을 향해 걸어갔다.



제11화 끝

keyword
월, 화, 수, 목, 금 연재
이전 10화신의 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