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문
《신의 로그》
PART 3 — 〈몽골〉
제10화 〈성문〉
검은 화살비가 쏟아졌다.
하늘을 덮었던 검은 점들이 한꺼번에 아래로 꺾이며 금군의 선두를 덮쳤다. 화살을 맞은 군마 한 필이 목을 뒤틀며 옆으로 쓰러지자 바로 뒤에서 달리던 말이 그 몸을 피하지 못하고 들이받았고, 질주의 힘을 고스란히 떠안은 사람과 말이 흙바닥 위를 뒤엉켜 굴렀다.
앞에서 무엇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한 후속 기병들은 갑자기 생긴 장애물을 피해 좌우로 고삐를 틀다가 서로의 옆구리를 들이받았다. 말이 앞발을 들고 울부짖었고, 안장에서 튕겨 나간 병사가 뒤따르던 말발굽 아래로 사라졌다.
조금 전까지 환주를 등지고 한 방향으로 뻗어 있던 금군의 대열이 순식간에 굽고 갈라졌다.
장수들이 깃발을 휘두르며 목이 터져라 외쳤다.
“대열을 유지해라! 흩어지면 모두 죽는다!”
그러나 말발굽과 비명, 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 사이에서 명령은 멀리 가지 못했다.
선두의 병사들이 창을 세우고 다시 모이려는 동안 왼쪽 구릉에서는 몽골 기병들이 비탈을 타고 내려왔고, 오른쪽의 말라붙은 물길에서도 기다리던 말머리들이 연이어 솟아났다. 무엇보다 조금 전까지 등을 보이며 달아나던 수부타이의 천호가 정면에서 방향을 틀어 다시 다가오고 있었다.
세 방향에서 번진 발굽의 진동이 흙바닥을 타고 하나로 합쳐졌다.
금군도 물러서지만은 않았다.
앞줄의 기병들이 창끝을 낮추고 수부타이의 천호를 향해 맞달려갔지만, 도망치는 적을 붙잡겠다는 욕심에 길게 늘어진 대열은 이미 서로를 지켜줄 수 없는 거리까지 벌어진 뒤였다. 선두가 정면의 몽골 기병과 부딪치는 동안 양옆에서는 새로운 기병대가 틈을 파고들었고, 후미의 병사들은 앞쪽에서 무엇이 벌어지는지도 모른 채 계속 밀려들어 스스로 퇴로를 좁혔다.
수부타이의 천호는 그 혼란 속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선두가 금군을 한 차례 강하게 흔든 뒤 옆으로 흘러 빠져나가자 그들이 지나가며 벌려놓은 틈으로 다른 몽골 기병대가 들어왔다. 뿔나팔의 음이 바뀔 때마다 공격하던 부대가 물러나고 기다리던 부대가 앞으로 나왔으며, 금군이 겨우 한쪽을 향해 몸을 돌릴 즈음이면 이미 다른 방향에서 새로운 말 떼가 밀려들었다.
하나였던 대열이 여러 덩어리로 갈라진 순간부터 몽골군은 금군 전체를 상대하지 않았다. 떨어져 나간 무리 사이를 끊어 서로 돕지 못하게 만든 뒤, 고립된 병력을 차례로 압박하면서 전장의 넓이를 조금씩 자신들의 것으로 바꾸어갔다.
그때 금군의 후미에서 누군가 환주로 돌아가는 길을 바라봤다.
성벽은 구릉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조금 전 넘어온 길은 아직 눈에 들어왔다.
한 기가 말머리를 돌리자 곁에 있던 두 기가 뒤따랐고, 잠시 뒤에는 수십 기가 전장을 벗어나 성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장수들이 칼을 들어 길을 막고 돌아오라고 고함쳤지만, 살 수 있을 것 같은 길을 한 번 바라본 사람들의 눈은 좀처럼 다시 전장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도주는 빠르게 번졌다.
패잔병을 뒤쫓던 몽골 기병들이 속도를 높이려는 순간 수부타이가 팔을 들었다. 뒤이어 신호가 전해지자 앞선 기병들이 고삐를 당겨 속도를 줄였고, 조금 전까지 금군의 등을 삼킬 듯 몰아치던 추격이 평원 한복판에서 멎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다가온 보로는 성을 향해 달아나는 패잔병과 수부타이를 번갈아 바라봤다.
“저대로 살려 보내면 성안에서 다시 무기를 들 겁니다. 지금 따라붙으면 성벽에 닿기 전에 대부분 잡을 수 있습니다.”
수부타이는 달아나는 병사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살아서 돌아가야 문을 열어달라고 외칠 것 아니냐. 우리가 쫓지 않으면 성벽 위의 병사들도 안심할 테고.”
그제야 보로의 눈길이 환주로 이어지는 길을 향했다.
수부타이가 낮게 덧붙였다.
“저놈들이 우리 대신 성문을 열어줄 것이다.”
───
환주의 성벽 위에서도 구릉을 넘어 돌아오는 패잔병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성 밖으로 나설 때에는 수백 기가 깃발 아래 질서 있게 움직였지만, 지금 평원을 가로지르는 사람들은 작은 무리로 흩어져 있었다. 군복은 흙과 피로 색을 잃었고, 말의 목에 엎드린 부상병과 활도 창도 버린 채 빈손으로 달리는 자들이 뒤섞여 누가 어느 부대였는지조차 구별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의 뒤에는 몽골군이 보이지 않았다.
적이 바짝 뒤쫓고 있다면 문을 닫아두어야 했다. 문제는 몽골군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성벽 아래로 달려오는 사람들은 조금 전 자신들이 내보낸 병사들이었고, 거리가 좁아지면서 얼굴이 보이기 시작하자 살려달라는 고함까지 바람을 타고 올라왔다.
“문을 열어라!”
“우리를 버리지 마라!”
성가퀴에 몸을 붙인 수비병들이 서로를 바라봤다.
문을 열면 적을 끌어들일지도 몰랐고, 닫아두면 눈앞까지 돌아온 동료들을 성벽 아래에 버려야 했다.
성을 지키던 금군 장군은 섣불리 명령을 내리지 않고 서쪽 평원을 살폈다. 여러 병사가 성가퀴 밖으로 몸을 내밀어 구릉의 능선과 그 아래 들판까지 훑었으나, 흩어진 금군 패잔병 뒤로는 새로운 말 떼도 추격의 먼지도 나타나지 않았다.
몽골군은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북소리가 울렸다.
“성문을 열어 아군을 들여보내라! 보이지 않는 적을 두려워해 우리 병사들을 밖에 버릴 수는 없다!”
여러 병사가 굵은 빗장에 달라붙어 그것을 들어 올리자 나무와 쇠가 맞물려 비비는 낮은 소리가 성문 안쪽을 울렸다. 이어 무거운 문짝이 안으로 밀리기 시작했고, 틈 사이로 들어온 바깥의 빛이 어두운 통로 바닥을 가늘게 갈랐다.
기다리던 패잔병들은 문이 충분히 열릴 때까지 참지 못했다.
말 두세 필이 비좁게 드나들 만큼 틈이 벌어지자 앞선 기병들이 서로 먼저 들어가겠다고 고삐를 당겼고, 뒤에서는 사정을 알지 못한 사람들이 계속 밀어붙였다. 다리에 상처를 입은 군마 한 필이 문 안쪽에서 주저앉으면서 흐름이 막히자 말들이 앞발을 들고 울부짖었고, 좁은 통로는 순식간에 사람과 짐승의 몸이 뒤엉킨 병목으로 변했다.
수비병들이 욕설을 퍼부으며 쓰러진 말을 끌어내고 길을 만들었다.
그동안 성벽 위 사람들의 시선은 서쪽 평원에 붙잡혀 있었다.
북쪽의 낮은 지형에서 움직이기 시작한 사람들을 처음부터 보고 있던 이는 거의 없었다.
───
수부타이는 패잔병을 풀어준 순간부터 이미 다음 움직임을 시작하고 있었다.
북쪽 성벽 가까이에는 거짓 철수가 시작될 때부터 따로 움직인 공격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밤을 틈타 사다리를 옮겨놓은 병사들은 낮은 지형에 몸을 숨긴 채 성문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었다.
수부타이는 천호의 기병대를 보로에게 맡겨 서쪽 구릉 뒤로 물리고, 일부 병력만 이끌고 북쪽 공격대로 향했다. 패잔병들이 성벽 아래에 모여 문을 열어달라고 외치는 동안 그는 낮은 지형을 따라 접근해 말에서 내렸다.
백호장 하나가 달려왔다.
“패잔병을 들이기 위해 성문이 열렸습니다. 아직 우리 군의 접근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합니다.”
수부타이는 성문보다 먼저 성벽 위를 살폈다.
서쪽의 패잔병을 살피느라 금군 병사들이 한쪽으로 몰려 있었고, 북쪽 구간에서는 뒤늦게 빈자리를 메우려는 사람들이 뛰어다녔다. 성문이 열린 것보다 더 중요한 변화는 그 문 하나 때문에 성벽 위의 시선과 병력이 함께 움직였다는 사실이었다.
“사다리를 당겨와라. 궁수들은 병사들이 벽에 닿을 때까지 성가퀴 위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게 해.”
백호장이 고개를 숙이자 뒤에서 기다리던 병사들이 긴 사다리들을 들어 올렸다.
그제야 성벽 위에서 고함이 터졌다.
“북쪽에 적이다!”
금군 병사가 성벽 아래를 가리키자 성가퀴 사이로 활과 쇠뇌가 모습을 드러냈고, 조금 전까지 서쪽을 향하던 북소리도 급박하게 박자를 바꾸었다.
첫 쇠뇌살이 날아와 사다리를 들고 뛰던 병사의 어깨를 꿰뚫었다.
사람이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사다리 한쪽이 땅을 긁었지만, 뒤따르던 병사들이 곧바로 그 자리를 메웠다. 흙먼지를 일으키던 나무 끝이 다시 솟아오르는 사이 두 번째와 세 번째 쇠뇌살이 날아와 방패와 사람의 몸에 박혔다.
몽골 궁수들도 성벽을 향해 시위를 당겼다.
위에서 떨어지는 화살이 병사들의 방패와 어깨를 두드리는 동안, 아래에서 솟구친 화살들은 성가퀴 너머로 몸을 내밀던 금군을 뒤로 밀어냈다. 그 짧은 틈을 이용해 첫 사다리가 성벽에 부딪쳤고, 둔탁한 충격음이 다져진 흙벽을 울리기도 전에 조금 떨어진 곳에서 두 번째 사다리가 세워졌다.
다시 그 옆에서도 긴 나무가 성벽을 향해 일어섰다.
수부타이는 가장 가까운 사다리 앞으로 갔다.
백호장이 급히 앞을 막아섰다.
“사다리는 걸렸습니다. 병사들을 먼저 올리고 천호장께서는 아래에서 전체를 지휘하십시오. 벽 위의 상황도 모르는 채 직접 오르실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먼저 올라간다. 병사들을 바로 뒤에 붙여라.”
수부타이는 백호장을 지나쳐 사다리를 잡았다.
“천호장께서 올라가시면 아래의 지휘는 누가 맡습니까?”
“네가 맡아라. 벽 위에 올라설 자리가 생기면 나팔을 불고, 다른 사다리의 병사들도 한꺼번에 밀어 올려라.”
성벽 위에서 날아온 화살 하나가 수부타이의 어깨 옆을 스쳐 흙바닥에 박혔다. 흔들리는 깃대와 성가퀴 사이로 금군의 창날이 햇빛을 받아 번쩍였지만, 수부타이는 잠시 위를 올려다본 뒤 발을 사다리에 올렸다.
“뒤따라와라.”
그리고 먼저 올라갔다.
───
사다리는 사람의 몸이 한 칸씩 높아질 때마다 성벽에서 떨어졌다 붙으며 휘청거렸다.
수부타이는 가슴을 나무에 바싹 붙인 채 위로 올라갔다. 성가퀴 사이로 금군 병사들의 발과 창끝이 어지럽게 오갔고, 위에서 떨어진 돌 하나가 그의 곁을 스쳐 내려가자 아래쪽에서 짧은 비명과 함께 나무가 세게 흔들렸다.
손바닥에는 거친 나무의 가시가 파고들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선명한 것은 흔들릴 때마다 발바닥을 밀어내는 사다리의 탄력과 바로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숨소리였다.
창 하나가 아래로 내리꽂혔다.
수부타이는 몸을 성벽 쪽으로 붙였고, 쇠날은 어깨의 갑옷을 긁으며 미끄러져 내려갔다. 금군 병사가 다시 창을 끌어올리려고 몸을 내민 순간 아래에서 쏘아 올린 화살이 성가퀴를 때리자 그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 짧은 빈틈이면 충분했다.
수부타이는 남은 몇 칸을 빠르게 올라 성가퀴의 가장자리를 붙잡았다. 손가락 아래에서 굳은 흙이 부서져 작은 알갱이가 손등을 타고 떨어졌고, 한쪽 무릎을 성벽 위에 걸치자 기다리고 있던 금군 병사가 칼을 휘둘렀다.
몸이 완전히 올라오지 않은 상태에서는 피할 공간이 거의 없었다.
수부타이는 상체를 비틀어 첫 칼날을 흘려보낸 뒤 발로 벽을 밀어 몸을 끌어올렸다. 두 발이 성벽 위를 딛는 순간 허리의 칼이 검집을 빠져나와 이어진 공격을 받아냈다.
쇠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귓가에서 터졌다.
등 뒤의 사다리가 다시 크게 흔들렸다.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가 자신을 따라 올라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금군 병사 둘이 수부타이에게 달려들었다.
한 명은 칼을 들었고 다른 한 명은 짧게 잡은 창을 찔러왔다. 수부타이는 칼날로 창끝을 밀어내면서 옆으로 한 걸음 비켜섰고, 먼저 들어온 금군 병사의 팔을 베어 공격의 방향을 틀었다.
그들이 한 사람을 밀어내려고 모여드는 동안 사다리 끝에서는 두 번째 몽골 병사가 상체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다른 사다리에서도 손과 머리가 하나둘 성가퀴 위로 나타났고, 처음에는 수부타이 한 사람에게 향했던 금군의 시선이 여러 방향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수부타이는 앞으로 깊이 파고들지 않았다.
적을 많이 베는 것보다 뒤따르는 사람들이 올라설 자리를 잃지 않는 것이 먼저였다.
“앞으로 나가지 말고 사다리부터 지켜라! 올라온 자는 양옆으로 벌어져 다음 사람이 설 자리를 만들어!”
먼저 올라온 병사들이 그의 양옆에 붙으면서 사람 서너 명이 겨우 설 만했던 공간이 조금씩 넓어졌다.
아래에서 나팔이 울렸다.
다른 사다리에 붙어 있던 병사들도 일제히 오르기 시작했다. 금군이 한쪽을 밀어내려고 병력을 몰면 다른 사다리에서 올라온 병사들이 그 옆을 파고들었고, 그들을 막으려고 수비대가 움직이는 사이 또 다른 곳에서 몽골 병사가 성가퀴를 넘어왔다.
성벽 자체는 조금도 무너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위에서 하나로 이어져 있던 수비선에는 이미 틈이 생기고 있었다.
수부타이의 시야 끝에 망루 뒤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아래쪽에서는 사람과 말이 뒤엉킨 소리가 웅웅 울려 올라왔고, 그 끝에는 아직 완전히 닫히지 않은 성문이 있었다.
수부타이가 칼끝으로 계단을 가리켰다.
“저 계단을 장악하고 성문으로 내려간다. 문이 닫히기 전에 안쪽의 병사들을 밀어내라!”
그는 뒤따라 올라온 병사에게 성 밖을 가리켰다.
“깃발을 올려라. 보로에게 진입 신호를 보내!”
───
성문 안쪽에서는 여전히 패잔병들이 밀려들고 있었다.
성벽 위에서 몽골군의 함성이 들리자 조금 전까지 바깥의 동료들을 들여보내느라 문을 붙들고 있던 수비병들이 이번에는 서로 닫으라고 외쳤고, 그 말을 들은 성 밖의 사람들은 남겨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더욱 필사적으로 안으로 몰려들었다.
“문을 닫아라!”
“아직 우리 병사들이 남아 있다!”
“북쪽 성벽이 뚫렸다!”
서로 다른 절박함이 좁은 통로 안에서 한꺼번에 부딪쳤다.
수비병들이 무거운 문짝에 어깨를 대자 나무가 돌바닥을 긁는 낮은 굉음과 함께 바깥의 빛이 조금씩 좁아졌다. 그러나 문 사이에는 아직 들어오려는 말과 사람들이 몸을 밀어 넣고 있었고, 통로 안에는 쓰러진 짐과 부상병까지 뒤엉켜 힘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그때 성벽에서 이어지는 계단 위로 새로운 발소리가 번졌다.
처음에는 몇 사람의 거친 발걸음처럼 들렸지만 곧 쇠붙이가 계단 모서리를 때리는 소리와 몽골어로 외치는 명령이 섞였다. 고개를 들었던 금군 병사의 표정이 굳었다.
성벽을 넘어온 몽골군이 내려오고 있었다.
문을 밀던 수비병들이 창과 칼을 잡기 위해 하나둘 손을 놓는 순간, 어렵게 좁혀지던 문틈이 그대로 멎었다. 밖에서는 패잔병들이 계속 안으로 밀려들었고, 계단에서는 몽골 병사들이 내려왔으며, 좁은 성문 통로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려는 사람들 때문에 어느 쪽의 명령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공간으로 변했다.
문짝 사이에는 이제 말 한 필이 간신히 지나갈 만한 틈만 남아 있었다.
서쪽으로 기운 햇빛이 그 사이를 파고들어 피와 흙으로 얼룩진 돌바닥 위에 길고 가느다란 선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그 빛 위의 먼지만 조금씩 흔들렸다.
잠시 뒤 바닥에 고인 물이 가늘게 떨렸고, 쓰러져 있던 창끝이 돌을 긁으며 희미한 쇳소리를 냈다. 성문 안을 채운 비명과 고함 때문에 누구도 곧바로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진동은 빠르게 커졌다.
마침내 문밖을 바라본 병사 하나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굳어버렸다.
서쪽 평원에서 황갈색 먼지구름이 솟고 있었다.
그 아래로 말머리들이 나타났다.
신호를 기다리며 서쪽 구릉 뒤에 숨어 있던 몽골 기병대가 열린 문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성문부터 닫아라! 밖에 남은 자들은 포기해!”
성문 쪽으로 내려온 금군 장군이 목이 터져라 외쳤다.
병사들이 다시 문에 달라붙었지만 이제는 너무 많은 것이 그들을 방해하고 있었다. 문밖에는 살아남으려는 아군이 매달려 있었고, 안쪽에서는 성벽을 넘어온 몽골 병사들이 밀고 들어왔으며, 땅을 타고 올라오는 말발굽의 진동은 이미 성문의 돌벽과 사람들의 발바닥까지 흔들고 있었다.
먼지구름이 빠르게 커졌다.
선두의 몽골 기병이 성 밖에 남은 패잔병 사이를 파고들어 열린 틈으로 말을 밀어 넣었다. 첫 번째 말이 몸을 비틀며 통로를 통과하자 안쪽에 있던 몽골 병사들이 달려들어 문짝에서 금군을 떼어냈고, 뒤따른 기병들은 조금씩 넓어진 틈을 비집고 연이어 성안으로 들어왔다.
잠시 전까지만 해도 아군을 살리기 위해 열었던 문이 이제는 적의 기병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성문은 끝내 닫히지 않았다.
───
그 뒤로 환주의 전투가 기울어지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성벽에 올라선 몽골군은 확보한 구간을 양옆으로 넓히며 망루와 계단을 장악했고, 성문으로 들어온 기병들은 큰길을 따라 갈라져 병영과 관아로 이어지는 길목을 끊었다.
성 밖으로 출격했던 기병대가 무너진 데 이어 성벽마저 뚫리고, 마지막으로 성문까지 넘어갔다는 사실이 퍼지자 골목마다 흩어져 싸우던 금군은 어느 길이 아직 자신들의 것인지조차 알기 어려워졌다.
저항은 한동안 이어졌다.
그러나 서로의 위치도 알지 못하고 명령을 내릴 사람조차 찾을 수 없는 전투가 오래 지속될 수는 없었다.
관아 쪽에서 먼저 무기를 내려놓는 병사들이 나타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활과 창을 바닥에 놓은 사람들이 수십 명씩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살아남은 장수들이 항복을 받아들이자 성안을 떠돌던 소음도 서서히 모양을 바꾸었다.
칼이 부딪치는 쇳소리가 줄어든 자리에는 포로를 이동시키는 고함과 다친 사람의 신음, 주인을 잃은 말의 울음이 남았다.
해가 서쪽 성벽에 걸릴 무렵 금나라의 깃발이 내려왔다.
그 자리에 몽골군의 깃발이 올랐다.
환주가 함락됐다.
───
에센이 성안으로 들어간 것은 싸움이 거의 끝난 뒤였다.
성문을 통과하자 냄새부터 달라졌다. 성 밖 평원에서는 온종일 말발굽에 뒤집힌 마른 흙과 말땀 냄새가 코에 붙어 있었지만, 좁은 통로 안에는 피와 젖은 흙, 부서진 나무에서 나온 풋내가 한데 고여 있었다.
바닥에는 부러진 창대와 깨진 방패가 뒤섞여 있었고, 몽골 병사들이 포로들을 줄지어 이동시키는 사이 부상자를 실은 수레가 바퀴를 덜컹거리며 골목을 빠져나갔다.
낮까지만 해도 금군의 명령이 오갔을 거리에서는 이제 익숙한 몽골어가 들렸다. 그러나 에센에게는 성을 빼앗았다는 사실보다 그곳을 지나간 사람과 말이 남긴 흔적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가 가장 먼저 찾은 것도 수부타이가 아니었다.
수부타이의 말이었다.
성벽 가까이에 묶인 군마는 가슴과 목덜미가 땀에 흠뻑 젖어 있었고, 숨을 내쉴 때마다 넓은 콧구멍에서 뜨거운 김이 뿜어져 나왔다. 에센은 목을 한 번 쓸어내린 뒤 앞다리의 관절부터 발굽까지 차례로 만져보고, 뒷다리도 들어 올려 상처가 없는지 살폈다.
말은 귀찮다는 듯 귀를 털었지만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그제야 에센의 어깨에서 힘이 조금 빠졌다.
“사람보다 말을 먼저 보는구나.”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에센이 돌아봤다.
수부타이가 서 있었다.
얼굴과 갑옷에는 성벽의 흙먼지가 눌어붙어 있었고 오른쪽 소매에는 검붉은 피가 말라 있었다. 그러나 에센의 눈을 붙잡은 것은 피 묻은 소매보다 손이었다.
손바닥과 손가락 마디에는 거친 나무와 흙벽을 움켜쥐며 생긴 상처가 여러 줄 나 있었고, 무릎을 덮은 가죽도 한쪽이 심하게 쓸려 색이 달라져 있었다.
에센은 곧장 다가가 손목을 붙잡았다.
“다치지 말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손바닥이 다 찢어졌고 소매에도 피가 묻었습니다.”
수부타이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그래도 죽지는 않았잖느냐.”
“죽어야 다친 겁니까?”
수부타이는 잠깐 생각해보더니 순순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지.”
에센은 길가에 놓인 평평한 돌을 가리켰다.
“그러면 앉으십시오. 상처부터 닦아야 합니다.”
“나는 배가 고프다.”
“앉아서도 배고플 수 있습니다. 피가 말라붙은 채로 밥부터 드시면 손에 묻은 흙까지 같이 먹게 될 겁니다.”
수부타이는 눈을 가늘게 떴지만 에센은 이미 천과 물주머니를 꺼내고 있었다. 결국 돌 위에 앉은 그의 손을 붙잡아 닦기 시작하자, 말라붙은 피와 흙이 젖은 천에 검붉게 번졌다.
주위에서는 여전히 사람들이 오갔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평원을 울리던 뿔나팔과 말발굽 소리에 비하면 그 소음조차 이상할 만큼 낮게 느껴졌다.
에센은 손바닥에 박힌 작은 나무가시를 하나씩 빼내다가 수부타이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직접 사다리를 타고 가장 먼저 올라가셨다는 이야기가 온 성안에 퍼졌습니다. 천호장이 병사들을 지휘하지 않고 그런 곳에 먼저 올라가도 되는 겁니까?”
“내가 올라간 뒤에도 지휘할 사람은 있었다.”
“장군님이 쓰러지시면 벽 위에 올라간 병사들은 누구 말을 듣습니까? 아래에 남은 사람들은요? 다들 장군님을 보고 움직이는데, 가장 먼저 화살 맞을 자리에 서시면 어떡합니까.”
수부타이는 에센이 빼낸 나무가시를 잠시 내려다봤다.
“그 말도 틀리지는 않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내가 먼저 올라가는 것이 가장 빨랐다. 아래에서 오르라고 소리치는 것보다 내가 벽 위에 발을 딛는 것을 보여주면 뒤의 사람들도 주저하지 않을 테니까.”
에센은 한동안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자신은 화살과 돌이 쏟아지는 성벽 아래에 서 있는 것만 상상해도 목이 말랐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 사다리를 먼저 오르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고 말했다. 화살과 돌이 쏟아지는 곳에 자기 몸을 올려놓는 일까지 판단 속에 넣고 있었다.
그 차이가 어이없기도 했고 조금 무섭기도 했다.
에센은 다시 천을 움직였다.
“그래도 다음에는 그러지 마십시오. 장군님이 가장 빨리 죽는 방법까지 직접 보여줄 필요는 없습니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마. 지금은 상처나 제대로 닦아라.”
에센은 못마땅한 얼굴을 했지만 더 말하지 않았다.
상처를 깨끗이 닦고 천을 감아 묶은 뒤 고개를 들자 바로 위로 환주의 성벽이 솟아 있었다. 밖에서 바라볼 때에는 길을 막는 거대한 절벽 같았던 벽이 지금은 자신과 수부타이의 등 뒤에 있었다.
에센이 성벽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제가 저 벽을 어떻게 넘느냐고 물었던 것, 기억하십니까?”
수부타이도 고개를 들어 벽을 바라봤다.
“네가 그런 것을 물었느냐?”
대답이 너무 태연해서 에센은 헛웃음을 흘렸다.
“제가 장군님 곁에 계속 있어야 하는 이유가 또 하나 생겼습니다. 말과 식사와 단검만 챙겨서는 안 되겠습니다. 장군님이 잊어버린 기억까지 제가 들고 다녀야겠어요.”
수부타이가 낮게 웃었다.
에센도 따라 웃다가 다시 성벽을 올려다봤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저 벽은 사람이 만든 산처럼 보였다. 말로 뛰어넘을 수도 없고, 아무리 많은 기병이 몰려와도 결국 그 앞에서 멈출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벽은 무너지지 않았다.
처음 보았을 때와 같은 높이로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달라진 것은 그 벽을 지키던 사람들과 벽 앞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었다. 금군은 성 밖으로 나왔고, 살아 돌아가기 위해 자신들의 손으로 문을 열었다. 몽골군은 그 순간에 맞춰 성벽에 붙었으며, 수부타이가 먼저 사다리를 오르자 뒤따른 병사들이 조금씩 설 자리를 넓혀갔다.
벽을 부순 것이 아니었다.
벽이 사람을 지켜주지 못하는 순간을 만든 것이었다.
에센은 며칠 전 처음 환주를 보았을 때 수부타이가 성벽보다 먼저 망루와 성문, 벽 앞으로 이어지는 길과 주변의 구릉을 살피던 모습을 떠올렸다.
자신은 벽의 높이를 보았다.
수부타이는 그 벽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이어진 길을 보고 있었다.
그때는 그 차이를 몰랐다.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수부타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갑옷에 묻은 흙을 털었다.
“상처도 다 닦았으니 이제 밥을 먹으러 가자.”
에센도 천과 물주머니를 챙기며 일어났다.
“말부터 먹여야 합니다. 장군님 말은 오늘 하루 종일 사람을 태우고 달렸지만 장군님은 사다리를 오를 때라도 제 발로 움직이셨잖습니까.”
“그러면 내 밥은 언제 먹는 것이냐?”
“말을 먹이고 바로 가겠습니다. 그동안 손에 감은 천이나 풀지 말고 기다리십시오.”
에센이 말고삐를 잡고 골목 쪽으로 걸어가자 수부타이가 등 뒤에서 불렀다.
“에센.”
“또 어디가 아프십니까?”
수부타이는 잠시 말이 없었다.
“아픈 것이 아니라 배고프다. 너무 오래 걸리지 마라.”
에센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알겠습니다.”
저녁 햇빛은 성벽의 윗부분에만 남아 있었고, 그 아래 골목은 벌써 긴 그늘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광장 한편에는 포로가 된 금군 병사들이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으며, 굳게 닫힌 집 안에서는 낯선 발소리가 완전히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 사이를 몽골 병사들이 오갔고, 성 밖에서는 하루 종일 사람을 싣고 달렸던 말들이 풀 냄새를 따라 천천히 이동하고 있었다.
아침까지 환주를 지키던 깃발은 사라졌다.
높은 성벽 위에는 이제 몽골군의 깃발이 저녁바람을 받고 있었다.
제10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