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로그

오트라르

by천시록

《신의 로그》

PART 3 — 〈몽골〉


제12화 〈오트라르〉



1218년의 호라즘은 쇠퇴하는 나라가 아니었다.


오히려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빠르게 몸집을 불려가던 강대국 가운데 하나였다. 술탄 무함마드 2세가 주변의 나라와 도시를 차례로 정복하면서 부하라와 사마르칸트, 메르브와 니샤푸르를 비롯한 부유한 도시들이 그의 지배 아래 들어왔고, 호라즘의 영역은 중앙아시아를 넘어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일대까지 뻗어 있었다.


거대한 성곽도시마다 수비대가 주둔했고, 술탄은 방대한 영토 곳곳에서 튀르크계 기병과 지방군을 불러 모을 수 있었다. 최근 몇 년 동안 거듭 영토를 넓혀온 승리의 기억도 아직 생생했기에, 호라즘 사람들은 자신들의 나라가 정점으로 치솟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 호라즘의 동쪽에서도 또 하나의 세력이 무서운 속도로 커지고 있었다.


초원의 부족들을 하나의 깃발 아래 묶은 칭기즈 칸은 금나라와 싸우며 세력을 넓혔고, 1218년에는 몽골과 호라즘 사이에 놓여 있던 카라키타이의 세력권마저 무너뜨렸다. 서로 다른 방향에서 팽창해오던 두 강대국 사이의 완충지대가 사라지면서 마침내 국경이 맞닿았다.


두 세력 사이를 오가는 상인들에게는 새로운 길과 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호라즘의 상인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몽골의 영역을 드나들었고, 서쪽의 거대한 시장과 교역로가 가져다줄 이익에 관심을 가진 칭기즈 칸도 왕족과 유력한 장수들이 내놓은 재화로 상품을 마련해 호라즘으로 향할 대규모 상단을 꾸렸다.


약 사백오십 명의 무슬림 상인들이 그 행렬에 참여했다.


수많은 낙타의 등에는 비단과 모피, 귀금속과 여러 지역에서 모여든 상품이 산더미처럼 실렸다. 멀리서 바라보면 사람과 짐승의 행렬이 지평선을 따라 움직이는 하나의 도시처럼 보일 정도였다.


마리암도 그 거대한 상단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



길 위에서 살아가는 일은 이제 마리암에게 낯선 여행이 아니라 몸에 밴 일상이었다.


아침이면 눈을 뜨자마자 자신에게 맡겨진 짐의 매듭과 장부부터 확인했고, 햇볕이 뜨거워져 낙타들의 걸음이 느려지면 곁에서 말을 맞춰가는 상인들과 앞으로 들를 도시의 물가를 짐작하거나 어떤 상품을 사들여야 더 큰 이익을 남길 수 있을지 이야기를 나눴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상단을 따라다니며 눈으로 훔쳐 배운 일이 어느새 자신의 몫이 되어, 이제 아버지도 딸이 흥정을 시작하면 곁에서 참견하기보다 한발 물러나 결과를 지켜보는 쪽을 택했다.


몽골에서 맡긴 자본 가운데 마리암이 관리하는 몫과 그 돈으로 마련한 상품들은 온전히 그녀의 손을 거쳤다. 저녁마다 장부의 숫자가 맞지 않으면 원인을 찾아낼 때까지 덮지 않았고, 상대 상인이 웃는 얼굴로 슬쩍 값을 떠볼 때는 함께 웃으며 받아주다가도 자신이 정한 선을 넘으면 미련 없이 거래를 끊었다.


마리암이 장사를 좋아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처음 밟아보는 시장에서 무엇이 귀하고 무엇이 흔한지 알아내고, 상대가 말끝에 감추어둔 속셈을 눈빛과 손짓에서 읽어내며, 먼 길을 짊어지고 온 물건을 더 값진 것으로 바꾸는 순간마다 길에서 치른 고생이 돈과 물건이라는 눈에 보이는 결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는 장사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생각이 자꾸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낙타의 짐을 묶은 끈이 조금만 느슨해 보여도 출발하는 아침마다 몇 번이고 매듭을 다시 당겨보던 손이 떠올랐고, 말이 한쪽 발을 조금 불편하게 디디기만 해도 그 자리에서 쪼그려 앉아 발굽부터 들어 올리던 에센의 옆모습이 생각났다. 안장끈을 이미 확인해놓고도 돌아서다가 다시 와서 잡아당기고, 물통이 제대로 묶였는지 몇 번이나 살피는 모습을 보며 유난스럽다고 핀잔을 주었는데, 막상 그 손길이 없는 길 위에 나오고 나니 그때는 웃으며 타박했던 사소한 버릇들이 이상하리만큼 선명하게 기억났다.


낮에는 그나마 괜찮았다. 낙타를 몰고 장부를 확인하며 다른 상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생각이 오래 머물 틈이 없었지만, 밤이 되어 사람들의 말소리가 하나둘 잦아들고 천막 바깥에서 낙타가 되새김질하는 소리와 모래를 긁는 바람만 들려오기 시작하면 며칠 전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보았던 얼굴 하나가 어둠 속에서 자꾸 떠올랐다.


예전에는 몇 달씩 만나지 못하고도 잘 지냈고, 때로는 계절이 바뀌도록 서로 어디에 있는지조차 몰랐다. 그런데 이번에는 헤어진 지 겨우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시간이 좀처럼 앞으로 가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돌아오면…… 나랑 살자.


언덕 위에서 한참이나 먼 곳을 바라보다 겨우 꺼낸 그 한마디가 헤어짐의 의미를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마리암은 이불 밖으로 손을 내밀어 오른쪽 손목의 팔찌를 찾았다. 어둠 속에서는 붉은빛이 보이지 않았지만, 손끝으로 매끄러운 홍옥수 구슬을 하나씩 더듬다 보면 같은 팔찌를 차고 있을 에센의 굵은 손목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지금쯤 그 사람도 이걸 만지고 있을까.


말을 돌보다 흙투성이가 된 손으로 붉은 구슬을 한 번쯤 쓸어보고 있을 에센을 상상하자 웃음이 났다. 정말 그러고 있다면 자신과 똑같은 짓을 하는 셈이라는 생각에 어깨가 작게 흔들렸다.


그러나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보고 싶었다.


그 말을 꺼내기 전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 다물던 에센의 얼굴이 떠올랐고, 그렇게 기다렸던 말을 듣고도 겨우 ‘응’이라는 대답밖에 하지 못한 자신이 뒤늦게 억울해졌다. 다시 만나면 이번에는 제대로 말하리라고 생각했다. 보고 싶었다고, 네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많이 그리웠다고.


물론 막상 그 무뚝뚝한 얼굴을 마주하면 또 수염이 왜 그 모양이냐거나 말 냄새가 난다는 엉뚱한 말부터 꺼낸 뒤, 돌아서서 혼자 후회할지도 몰랐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무사히 돌아가기만 하면 됐다.



───



그 뒤로도 상단은 여러 숙영지를 지나 서쪽으로 나아갔다.


마침내 누런 지평선 위로 오트라르의 성벽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에는 말과 낙타의 털에도 길에서 묻은 먼지가 두껍게 내려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먼지 낀 하늘과 땅 사이에 그어진 가느다란 선에 불과했으나, 가까워질수록 황갈색의 두터운 성벽이 높아지고 그 위에 일정한 간격으로 솟은 망루와 성문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움직임까지 눈에 들어왔다. 메마른 길을 오래 걸어온 상인들 사이에서는 하나둘 웃음이 터져 나왔다.


누군가는 오늘 밤에는 뜨거운 빵을 배가 터지도록 먹겠다며 떠들었고, 다른 사람은 빵보다 먼저 술을 찾겠다며 받아쳤다. 지친 낙타들이 콧김을 뿜으며 느릿느릿 걸어가는 사이로 오랜만에 웃음이 번졌고, 마리암 역시 성벽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시장을 생각하며 장부에 적어둔 품목들을 머릿속으로 다시 훑었다.


무엇보다 이곳부터는 술탄 무함마드의 권력이 미치는 땅이었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부하라 역시 같은 통치 아래 있었으니, 마리암에게 오트라르의 성벽은 낯선 국경이라기보다 긴 여행 끝에 익숙한 세계로 되돌아가는 문처럼 느껴졌다.


성문 앞에는 평소보다 많은 병사가 나와 있었지만 누구도 그것을 불길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만한 규모의 상단과 수많은 낙타, 막대한 상품이 한꺼번에 국경도시로 들어가고 있었으니 짐을 확인하고 세금을 매기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은 당연했다.


앞쪽의 상황을 살피고 돌아온 아버지도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상단의 규모가 워낙 크니 확인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다. 성문만 통과하면 오늘 안에는 짐을 풀 수 있을 게다.”


마리암은 길게 늘어진 낙타의 행렬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시간이 아깝다는 듯 입술을 내밀었다.


“오늘 시장에도 갈 수 있을까요? 오트라르의 물가부터 확인해두고 싶은데요.”


“며칠을 길에서 보내고도 또 장사 생각이냐?”


“그러려고 여기까지 온 거잖아요.”


아버지는 어이없다는 듯 웃다가 딸의 얼굴을 슬쩍 살폈다.


“장사는 핑계고, 그 말도둑 녀석에게 가져갈 물건을 찾으려는 것은 아니겠지?”


순간 뜨끔한 마리암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시선을 돌렸다.


“그 사람은 말 말고 좋아하는 것도 없어요. 괜히 선물을 골라봐야 좋은 안장끈 하나보다 못할걸요.”


말을 해놓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질긴 가죽 고삐나 새 안장끈을 하나 사가면 웬만한 장신구보다 좋아하지 않을까 생각하자, 그것을 받아 들고도 기쁜 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할 에센의 모습이 떠올라 입가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번졌다.


한참 뒤에야 상단에도 성문을 통과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낙타들의 목에 매달린 수백 개의 놋쇠 방울이 한꺼번에 흔들리면서 긴 행렬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아치 아래로 들어서는 순간 뜨거운 햇빛이 끊기고 서늘한 그늘이 얼굴을 덮었으며, 말발굽과 낙타의 둔한 발소리는 두터운 벽에 부딪쳐 몇 겹으로 울려 돌아왔다.


마리암은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성벽 위에서 상단을 내려다보는 병사 몇 명과 눈이 마주쳤다.


그들의 시선은 사람들의 얼굴이 아니라 낙타 등에 높이 쌓인 짐 위에 오래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마리암은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다.


첫날은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관리들이 지정한 숙영지에 짐을 푼 뒤 대표자들이 관청을 오가며 필요한 절차를 밟는 동안, 마리암은 자기 몫의 상품을 정리하고 다음 날 시장에서 무엇부터 확인할지 장부를 펼쳐놓았다. 담장 너머에서는 해가 진 뒤에도 물건값을 두고 흥정하는 목소리가 이어졌고, 화덕에서 굽는 빵과 고기 기름 냄새가 밤바람을 타고 넘어왔다.


낯선 도시에서 맡는 익숙한 냄새가 긴 여행의 피로를 풀어주는 것 같았다.


마리암은 오랜만에 편하게 잠들었다.


이상함은 다음 날부터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



처음 관리들이 물은 것은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어떤 물건을 가져왔으며 누구의 자본으로 마련한 상품인지, 최종적으로 어느 도시까지 갈 생각인지와 같은 평범한 내용이었다. 이 정도 규모의 상단이라면 국경도시에서 당연히 확인할 만한 일이었기에 상인들도 별다른 의심 없이 장부를 내놓고 질문에 답했다.


그러나 몇 번의 문답이 오가자 질문의 방향이 달라졌다.


칭기즈 칸의 군대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서쪽으로 움직이는 기병대가 있는가.


몽골군은 먼 거리를 이동할 때 어떤 길과 물길을 이용하며, 한 사람에게 몇 필의 말이 배정되는가.


처음에는 상인들도 웃으며 자신들은 군인이 아니라 장사꾼이고, 군대의 숫자와 이동 경로를 세어가며 물건을 팔지는 않는다고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관리들은 사람만 바꾸어가며 비슷한 질문을 되풀이했다.


따로 불려간 마리암 역시 자신이 부하라 출신이라는 사실을 확인받은 뒤에는 몽골군에 관한 질문을 계속 받아야 했다.


“몽골의 야영지에서 여러 해 장사를 했다니 군대도 많이 보았겠군. 그들의 병력이 얼마나 되는지 말해라.”


“저는 물건을 팔러 다녔을 뿐입니다. 군대가 몇 명인지 세어본 적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최근 서쪽으로 움직인 부대가 있는지만 대답해라.”


“모릅니다. 저는 그들과 전쟁을 한 것이 아니라 장사를 했으니까요.”


장부를 내려다보던 관리가 천천히 눈을 들었다. 마리암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기색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여기서는 네가 무엇을 했는지 설명할 필요가 없다. 묻는 말에만 대답해라.”


방에서 나온 마리암은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에게 자신이 받은 질문을 전했다. 그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굳게 닫힌 관청 문을 한동안 돌아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장에 나가자고 재촉하던 마리암도 아버지의 얼굴에서 평소와 다른 기색을 읽었는지 더는 조르지 않고 그의 곁을 따라 숙영지로 돌아갔다.


그날 시장에는 나가지 못했다.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오트라르 총독 이날축에게 보고가 올라갔으니 기다리라는 말뿐이었지만, 상인들 사이에서는 이만한 상단이 들어왔으니 세금을 조금이라도 더 받아내려는 수작일 것이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칭기즈 칸이 보낸 공식 교역단인 만큼 술탄에게까지 보고가 올라갈 것이고, 사정을 제대로 알게 되면 곧 풀려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마리암은 그 말을 믿고 싶었다.


자신들은 몰래 국경을 넘은 밀수꾼도 아니었고, 무기를 들고 들어온 군대는 더더욱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곳은 술탄의 법이 미치는 땅이었으므로 사정을 제대로 알게 되면 어이없는 의심도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저녁, 숙영지의 문밖에서 묵직한 쇠붙이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가까이 있던 상인 하나가 문을 밀어보았으나 열리지 않았다. 두 사람이 더 붙고 나중에는 장정 여럿이 어깨를 대고 밀었지만 두꺼운 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누군가 밖에서 빗장을 걸었다는 말을 내뱉자, 여기저기서 불안한 목소리가 일어났고 조금 전까지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문 앞으로 모여들었다.


마리암은 아버지를 바라봤다.


그는 한동안 굳게 닫힌 문만 보고 있었다.


“아빠.”


그제야 고개를 돌린 아버지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까지 기다려보자. 정식으로 들어온 상단을 아무런 이유 없이 붙잡아둘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지만, 옷자락을 한 번 쥐었다 놓는 손끝에는 전에 없던 힘이 들어가 있었다.


마리암은 그 작은 움직임을 보는 순간 오트라르에 들어온 뒤 처음으로, 이 성벽 안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만큼 안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



다음 날부터 상단의 물건들이 밖으로 실려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다시 검사를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비단과 모피에 이어 귀금속이 든 상자까지 다른 창고로 옮겨지고, 가져간 물건이 하나도 돌아오지 않자 상인들 사이의 불만은 곧 거친 항의로 바뀌었다.


한 남자가 자기 짐을 붙잡으며 세금이라면 얼마든 내겠으니 무엇을 얼마나 가져가는지 기록부터 남기라고 소리쳤다. 병사는 대답 대신 그의 손을 거칠게 떼어냈고, 남자가 다시 달려들자 창자루로 배를 후려쳤다.


숨이 막힌 남자가 몸을 접으며 쓰러졌다.


주변 사람들이 한꺼번에 앞으로 나서려는 순간 수십 개의 창끝이 동시에 들렸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 들끓던 항의가 그 날카로운 끝 앞에서 그대로 눌렸다.


마리암의 상품도 예외 없이 끌려나갔다.


몇 달 동안 장부의 숫자를 맞추고 상대의 눈치를 읽어 한 푼이라도 값을 깎아가며 모은 물건들이 병사들의 손에 하나씩 들려 나갈 때마다 속에서는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자기 짐을 되찾겠다고 달려든 남자가 배를 움켜쥔 채 쓰러지는 모습을 보는 순간, 그 분노는 갈 곳을 잃었다.


비단도, 은도, 이번 장사에서 자신의 몫으로 남기려 했던 이익도 아까웠다. 하지만 살아서 이 성을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언젠가 다시 벌 수 있었다.


무엇보다 길의 끝에는 자신을 기다리는 에센이 있었다.


빈손으로 돌아가면 다시 장사를 시작할 밑천부터 마련해야 했다. 에센에게도 이번 장사는 완전히 망했다고 말해야 할 터였다. 그래도 에센이 말을 돌보고 자신이 다시 장사를 시작하면 됐다. 둘이 함께 살아가면서 다시 벌고 다시 모으면 그만이었다.


그 생각을 하자 거칠게 뛰던 가슴도 조금씩 가라앉았다.


며칠 뒤에는 지친 말 한 필이 성 안으로 들어왔다는 소문이 상인들 사이에 퍼졌다. 총독이 보낸 보고에 대한 답을 가져온 전령이라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그가 무엇을 가지고 왔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상인들이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그날 오후부터 숙영지를 지키는 병사의 숫자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는 사실뿐이었다.



───



다음 날 아침, 며칠 동안 굳게 닫혀 있던 문이 마침내 열렸다.


문 안으로 들어온 병사가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짐은 두고 나와라. 성 밖으로 이동한다.”


앞쪽에서 누군가 이제 내보내주는 모양이라고 말했다. 그 말이 사람들 사이로 번지자 굳어 있던 얼굴들이 하나둘 풀렸다.


마리암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에센이었다.


끝났구나.


갇혀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는 안도의 숨이 새어 나왔고, 뒤쪽에서는 짧은 환호까지 터졌다. 몇몇은 두 손을 들어 하늘을 향해 기도를 올렸다. 남은 짐이라도 가져가려던 사람이 병사에게 떠밀렸지만, 이미 물건도 돈도 잃은 마리암에게 그런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살아서 나갈 수만 있다면 됐다.


이번 장사는 끝났고 더는 오트라르에 머물 이유도 없었다. 애초의 계획처럼 호라즘의 여러 도시를 돌며 거래를 이어갈 필요가 사라졌으니, 아버지와 상의해 그대로 동쪽으로 돌아가면 되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에센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마리암의 입가에 저절로 웃음이 번졌다.


아버지가 이 와중에 무엇이 그리 좋으냐는 듯 딸을 바라봤다.


“며칠 동안 갇혀 있었는데도 웃음이 나오느냐?”


“그냥…… 밖에 나오니까 좋아서요. 이제 돌아갈 수 있잖아요.”


마리암은 웃음의 진짜 이유까지 말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자신이 먼저 기다려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늘 상단이 몽골군의 야영지로 들어설 때마다 에센이 먼저 기다리고 있었고, 낙타의 방울소리만 들려도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부터 돌린다는 것을 이제는 마리암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자신이 먼저 돌아가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멀리서 말을 타고 오는 에센이 가까워졌을 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한마디 던져주면 될 일이었다.


생각보다 늦었네, 말도둑.


그 말을 들었을 때 에센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하자 웃음이 다시 올라왔다.


며칠 동안 벽과 천막 사이에 갇혀 있다가 마주한 하늘은 유난히 넓었고, 얼굴을 스치는 바람조차 반가웠다. 마리암은 햇빛을 받아 붉게 빛나는 홍옥수를 내려다보다가 구슬 하나를 손끝으로 굴렸다.


조금만 기다려.


곧 갈게.


그 말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낼 필요는 없었다.


상인들은 병사들에게 둘러싸인 채 성문을 통과했다. 처음에는 빼앗긴 재산을 어떻게 되찾을지, 어느 관청에 호소해야 할지, 당장 어디로 가야 할지를 떠드는 사람들이 많았다. 마리암 역시 에센보다 먼저 야영지에 도착해 그를 놀려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행렬은 동쪽으로 이어지는 큰길에 들어서는 대신 성벽을 따라 난 좁은 길로 방향을 틀었다. 성문이 등 뒤로 멀어지고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 메마른 땅으로 계속 걸어가는 동안, 상인들의 말소리는 하나씩 끊어졌다.


앞서 걷던 아버지도 아무 말 없이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마리암은 자신들을 둘러싼 병사들이 앞뒤와 양옆으로 넓게 퍼지며 빠져나갈 공간을 하나씩 막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아버지의 손이 마리암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조금 전까지 에센의 얼굴을 떠올리며 남아 있던 웃음이 사라졌다.


“아빠, 왜 그래요?”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은 채 주변의 지형과 병사들의 위치를 빠르게 훑었다.


“무슨 일이 생겨도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마라. 손도 절대 놓지 말고.”


평소와 다른 목소리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마리암의 가슴 한가운데가 차갑게 식었다.


성벽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오래전에 흙을 파냈거나 물이 흐르다 말라붙은 자리처럼 주변보다 깊게 꺼진 넓은 땅이 있었다. 양옆으로 이어진 거친 비탈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사람을 품 안에 가두듯 높아졌고, 병사들은 상인들을 그 아래로 밀어 넣으면서도 자신들은 내려오지 않고 비탈 가장자리에 남았다.


앞쪽에서 상단 대표가 총독을 만나게 해달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는 칭기즈 칸이 정식으로 보낸 상인들이오! 싸우러 온 군대가 아니란 말이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마리암은 고개를 들었다.


비탈 위의 병사 하나가 활을 들고 있었다. 그 옆에도, 조금 더 멀리에도 같은 모습의 병사들이 서 있었다.


마리암은 고개를 돌렸다. 반대편 비탈에도 활을 든 병사들이 서 있었다. 들어온 길을 돌아봤지만 그곳에도 창끝이 늘어서 있었다. 어디를 보아도 자신들보다 높은 곳에 병사들이 있었다.


아버지도 같은 것을 본 모양이었다.


그는 마리암의 손을 더욱 세게 움켜쥔 채 비탈의 경사와 병사들 사이의 간격을 빠르게 훑었다. 어디가 낮고 어디에 사람이 적은지, 이곳에서 빠져나갈 틈이 단 한 군데라도 남아 있는지를 찾는 눈이었다.


마리암은 아버지가 그런 눈을 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아빠…….”


“다른 것은 보지 말고 내 손만 잡아라.”


비탈 위에서 칼이 뽑혔다.


쇠가 칼집을 긁는 소리가 메마른 공기 속을 길게 갈랐고, 그 소리를 신호라도 삼은 듯 가장자리에 서 있던 병사들이 창을 고쳐 쥐거나 허리의 칼을 뽑았다. 조금 전까지 항의하던 상인들의 목소리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누구도 입 밖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모두가 같은 광경을 보고 있었다.


상단 대표가 다시 앞으로 나섰다.


“우리는 상인들이오. 술탄께서 이 일을 알고 계시오? 잘못이 있다면 재판을 받을 것이고, 세금이 문제라면 요구하는 만큼 내겠소. 그러니 적어도 우리에게 무슨 죄가 있는지는—”


병사 하나가 비탈을 내려와 그의 팔을 붙잡았다.


대표는 사람들 앞에 무릎을 꿇린 뒤에도 자신들이 정식으로 국경을 넘어왔으며, 죄가 있다면 무엇인지 밝히고 판관 앞에 세워달라고 계속 외쳤다. 뒤에서 지켜보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아직도 누군가 사정을 설명하고 오해를 풀면 이 상황이 끝날 것이라고 믿는 얼굴이 남아 있었다.


칼이 그의 목을 지나갔다.


대표의 몸이 앞으로 무너졌다.


곁에 있던 병사들이 비탈 쪽으로 물러서는 동안에도 사람들은 그가 쓰러진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뒤쪽에서 비명이 터졌다.


그 비명이 구덩이를 훑고 지나가자 남아 있던 상인들이 거의 동시에 움직였다.



───



살겠다는 생각 하나에 사람들이 한꺼번에 뒤로 밀리면서 구덩이의 바닥은 순식간에 뒤엉켰다.


뒤에 있던 사람들은 앞에서 누가 죽었는지도 모른 채 밀려났고, 앞줄에서는 방향을 돌린 사람들이 서로의 어깨와 옷자락을 붙잡으며 비탈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위에서 기다리던 병사들의 창자루와 방패가 올라오는 사람들을 찍어 누를 때마다 몸들이 군중 속으로 굴러떨어져 아래에 있던 사람들까지 함께 쓰러뜨렸다.


그 혼란 위로 비탈 여러 곳에서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활시위가 거의 동시에 놓였다.


검은 화살들이 구덩이 안으로 비스듬히 쏟아졌다.


어느 쪽으로 움직여야 살 수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 사람들은 서로의 몸을 방패 삼듯 엉켜 움직이다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비탈을 기어오르다 굴러오는 사람, 넘어진 사람을 밟지 않으려다 함께 넘어지는 사람, 살려달라고 외치면서도 어느 쪽을 향해 빌어야 할지 몰라 사방을 돌아보는 얼굴들이 한데 뒤섞였다.


조금 전까지 한 줄로 길게 이어졌던 상단은 더 이상 어떤 질서도 남지 않은 거대한 군중으로 무너졌다.


아버지는 마리암의 손을 놓지 않은 채 그녀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몸을 낮추고 내 뒤에 붙어!”


마리암이 몸을 숙이는 순간 바로 뒤에서 달려오던 남자의 몸이 앞으로 꺾였다. 등에 박힌 화살이 흔들리며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고, 아버지는 딸을 품 안으로 끌어당긴 채 사람들이 몰려드는 방향과 반대로 몸을 틀었다.


그러나 그쪽에도 길은 없었다.


앞에서는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이 밀려왔고, 뒤에서는 비탈을 오르려다 실패한 사람들이 쏟아져 내려왔다. 비명과 울음, 욕설과 살려달라는 외침이 한꺼번에 부딪치는 가운데 마리암은 누구의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오직 손 안에 남아 있는 아버지의 손가락만 느껴졌다.


그것만 놓치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손아귀에 더욱 힘을 주었다.


화살이 잦아들자 비탈 위에서 기다리던 병사들이 방패를 앞세우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들을 피해 다시 반대쪽으로 밀렸다.


옆에서 비틀거리던 장정 하나가 피를 뿜으며 쓰러졌고, 그의 큰 몸이 두 사람 사이로 밀려들면서 맞잡은 손이 순간 벌어졌다. 아버지는 딸을 놓치지 않으려고 몸을 돌려 마리암의 팔을 다시 끌어당겼지만, 바로 그 틈으로 다가온 병사가 휘두른 창대가 그의 머리 옆을 후려쳤다.


둔탁한 소리가 났다.


아버지의 손에서 힘이 사라졌고, 무릎이 먼저 꺾인 몸이 사람들 사이로 무너졌다.


“아빠!”


마리암은 거의 함께 넘어지듯 그 곁에 주저앉았다.


머리 옆에서 흘러나온 피가 관자놀이를 타고 턱 아래로 번지고 있었다.


“아빠, 손 잡아요.”


마리암은 아버지의 손을 다시 붙잡았지만 손가락이 맞물려오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놓지 말라고 하던 사람이 아무리 불러도 대답하지 않았다.


주변에서는 여전히 수많은 발이 살겠다고 움직이고 있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병사의 칼에 닿기도 전에 사람들에게 짓밟힐 판이었다.


마리암은 아버지의 겨드랑이 아래로 두 팔을 밀어 넣고 온몸의 힘을 다해 뒤로 당겼다.


의식을 잃은 몸은 돌덩이처럼 무거워 겨우 한 뼘 움직였을 뿐이었다. 뒤에서 달려오던 누군가가 등에 부딪치는 바람에 무릎이 흙바닥에 쓸렸지만, 마리암은 손을 놓지 않고 이를 악문 채 다시 몸을 젖혔다.


이번에는 아버지의 어깨가 쓰러진 사람 둘 사이의 좁은 틈으로 조금 들어갔다.


마리암은 그 사이에 자신의 몸까지 억지로 밀어 넣은 뒤, 떨리는 손가락을 아버지의 코 아래로 가져갔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아 얼굴을 더 가까이 가져가자 아주 희미한 숨이 손끝에 닿았다.


살아 있었다.


그 순간부터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마리암은 아버지의 머리를 가슴 쪽으로 끌어당겨 두 팔로 감쌌다. 병사가 어디에 있는지, 누가 자신들의 곁에서 죽어가는지도 보려 하지 않았다.


누군가 두 사람 위로 넘어졌을 때 처음에는 그 몸을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쓰러진 사람이 자신들과 병사들 사이를 가려주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 오히려 아버지를 그 아래로 더 깊숙이 끌어당겼다.


또 다른 몸이 곁으로 떨어지면서 사람의 무게가 어깨와 등을 짓눌렀고, 누군가의 발이 등을 밟고 지나갈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혔다. 그래도 마리암은 아버지의 머리를 감싼 팔만큼은 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옆구리 어딘가로 뜨거운 충격이 파고들었다.


몸이 크게 움찔했고, 통증은 배와 등으로 번졌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속이 찢어지는 듯했지만 무엇에 맞았는지 확인하려 몸을 돌릴 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때 오른쪽 손목이 뒤로 잡아당겨졌다.


무언가에 팔찌가 걸린 모양이었다. 마리암은 아버지를 감싼 팔을 풀지 않은 채 손목만 앞으로 당겼고, 한쪽으로 몰린 홍옥수 구슬들이 서로 부딪치며 작은 소리를 냈다.


다시 힘을 주자 가느다란 끈이 손목을 파고들 만큼 팽팽하게 늘어났다.


툭.


손목을 파고들던 힘이 갑자기 풀렸다.


홍옥수 구슬들이 팔에서 쏟아져 내렸다. 몇 알은 굳은 흙에 부딪쳐 튀었고, 몇 알은 쓰러진 사람의 옷자락에 걸렸다. 그중 하나가 마리암의 손끝 가까이 굴러오더니 바닥의 얕은 발자국 안으로 떨어졌다.


그 안에는 피가 고여 있었다.


작은 물결이 번지며 구슬의 둥근 표면을 타고 올라왔다. 붉은 돌은 절반쯤 잠긴 채 멎었고, 햇빛을 받던 윗부분에만 가느다란 빛이 남았다. 곁으로 밀려온 발이 흙을 짓이기자 고여 있던 피가 흔들리며 그 빛마저 덮었다.


마리암은 그 자리를 바라봤다.


출발하던 아침, 에센도 자신을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굵은 손목에 묶인 홍옥수가 햇빛 아래 반짝이고 있었다.


다녀와.


마지막으로 들었던 목소리였다.


마리암의 손가락이 흙바닥 위에서 조금 움직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머리가 팔 안에서 기울자, 손을 거두어 다시 끌어안았다.


얼굴을 가까이 대니 아직 따뜻한 숨이 뺨에 닿았다.


마리암은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아버지의 머리를 감싼 팔에 남은 힘을 모두 실었다.


사람들의 비명은 오래도록 이어졌다.



───



밤이 깊어지자 낮 동안 사람들로 가득했던 성 밖의 구덩이에는 수많은 시신이 서로의 몸을 덮은 채 겹쳐 있었다.


피와 흙이 한데 엉겨 검게 변해가는 바닥 위로 희미한 달빛이 내려앉았고, 멀리 오트라르의 성벽에서는 횃불 몇 개가 천천히 움직였다. 그러나 구덩이까지 내려오는 병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시신 더미 아래에서 마리암의 아버지가 의식을 되찾았다.


눈을 뜨고도 한동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머리는 깨질 듯 욱신거렸고 가슴과 다리 위로 무거운 것들이 눌려 있어 숨을 들이쉴 때마다 피와 흙 냄새가 목 안으로 밀려들었다. 몸을 조금 움직이자 굳어가는 피에 젖은 옷이 피부를 잡아당겼다.


흩어졌던 기억이 천천히 돌아왔다.


구덩이와 병사들.


머리 위로 쏟아지던 화살.


그리고 마리암.


그는 몸 위에 겹쳐 있는 시신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팔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한 사람의 어깨를 옆으로 미는 데에도 몇 번이나 숨을 고쳐야 했다. 틈이 조금 생길 때마다 몸을 비틀어 마침내 얼굴과 어깨를 밖으로 빼냈을 때, 자신의 머리를 감싸고 있는 팔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소매였다.


그의 움직임이 멎었다.


고개를 돌리자 바로 곁에 마리암의 얼굴이 있었다.


딸은 아버지를 끌어안은 자세 그대로 쓰러져 있었고, 등과 옆구리 위에는 다른 사람들의 몸이 겹쳐 있었다. 그가 하나씩 밀어내기 전까지 딸의 작은 몸이 그 무게를 대신 받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마리암.”


아버지는 딸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마리암, 이제 일어나자. 여기서 나가야 한다.”


반응이 없었다.


조금 더 크게 이름을 부르려던 그는 멀리 성벽 위에서 움직이는 횃불을 보고 목소리를 삼켰다.


떨리는 손으로 딸의 뺨에 묻은 흙을 닦아냈다. 마리암은 눈을 뜨지 않았다. 그는 얼굴에 흙이 남았는지 다시 살피고, 이미 닦은 자리를 엄지로 한 번 더 쓸었다.


“마리암.”


이번에는 이름만 불렀다.


손끝에 닿는 피부에서는 이미 온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그는 딸의 코와 입 가까이 손을 가져갔다가, 손이 떨려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얼굴을 바짝 숙였다.


기다려도 숨은 닿지 않았다.


그는 한동안 그 자세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자신이 쓰러진 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딸이 언제 다쳤고 얼마나 오랫동안 자신을 감싸고 있었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마리암이 자신을 끌어안고 있었다는 것과, 자신이 그 품 아래에서 살아남았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딸의 손을 잡으려던 그는 손목에 끊어진 끈이 남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천천히 주변의 흙을 내려다보자 검게 굳어가는 핏자국 가장자리에서 작고 둥근 것이 눈에 들어왔다. 손을 뻗어 집어보니 마리암이 차고 있던 홍옥수였다. 손끝으로 표면에 엉긴 흙을 문지르자 그 아래에서 익숙한 붉은빛이 드러났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두 번째 구슬을 찾았고, 옆에 쓰러진 사람의 옷자락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자 그 아래에서도 붉은 구슬 하나가 반쯤 흙에 묻혀 있었다.


세 알.


아버지는 그것들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작은 돌들을 바라보자 출발하기 전 몽골의 야영지에서 보았던 두 젊은이가 떠올랐다. 마리암의 손목과 에센의 손목에는 똑같은 홍옥수 팔찌가 있었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도 웃음을 감추지 못하던 딸과 제 손목의 붉은 구슬을 몇 번이나 내려다보던 젊은이의 모습이 이제는 손바닥 위의 세 알보다도 선명했다.


그는 더 이상 구슬을 찾지 않았다.


나머지가 어디로 흩어졌는지 알 수도 없었고, 날이 밝기 전에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면 자신도 다시 붙잡힐 것이었다.


홍옥수 세 알을 옷 안쪽 깊숙이 넣은 뒤 그는 다시 마리암을 바라봤다.


데려가고 싶었다.


딸의 어깨 아래로 팔을 넣어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허리에 힘을 주는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번졌다. 그는 마리암의 몸을 놓치지 않으려고 다시 주저앉아 한동안 숨만 골랐다.


성벽 위에서는 여전히 횃불이 움직이고 있었다.


자기 몸 하나 일으키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딸을 업고 비탈을 올라 어둠 속을 걸어갈 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마리암의 얼굴에 묻은 흙을 마지막으로 한 번 닦아주었다.


“미안하다.”


입술 사이에서 새어 나온 목소리는 자신에게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몇 걸음을 떼지 못해 무릎이 꺾였지만 흙을 짚고 다시 일어났고, 이번에는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 애쓰며 어둠 속으로 걸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결국 멈췄다.


달빛 아래 수많은 사람이 누워 있었다.


그 어디엔가 마리암도 있었다.


그는 다시 딸이 누운 쪽을 바라봤다. 돌아가려던 발이 멈췄다. 옷 안쪽에서 홍옥수 세 알이 가슴에 눌렸다.


동쪽에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젊은이가 있었다.


마리암과 똑같은 팔찌를 차고, 상단이 떠날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던 사람.


아버지는 입술을 다문 채 몸을 돌렸다.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전하려면, 우선 날이 밝기 전에 성벽에서 멀어져야 했다.


비탈의 낮은 곳을 찾아 손으로 흙을 짚으며 올라갔다. 발이 미끄러질 때마다 몸을 바닥에 붙이고 기다렸다가, 성벽의 횃불이 다른 쪽으로 움직이면 다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뒤로 오트라르의 성벽이 어둠 속에 서 있었다.


성 밖의 구덩이에는 미처 주워지지 못한 마리암의 붉은 홍옥수들이 피와 흙 사이에 흩어져 있었다.



제12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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