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벽
《신의 로그》
PART 3 — 〈몽골〉
제9화 〈성벽〉
금나라 땅으로 들어온 뒤에도 한동안 세상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초원은 남쪽으로 계속 이어졌고 낮은 구릉 사이에는 말이 먹을 풀이 남아 있었다. 강과 개울을 만나면 사람과 말이 함께 목을 축였으며, 수천 마리의 말이 주변의 풀을 거의 뜯어먹고 나면 군대는 미련 없이 다음 초지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땅의 모습은 조금씩 변했다.
밭이 늘어나고 길이 넓어졌으며, 흙과 나무로 지은 집들이 전보다 자주 나타났다. 사람이 떠난 마을에서는 문짝이 열린 채 바람에 흔들렸고, 거두지 못한 곡식과 버리고 간 농기구가 길가에 남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선두의 기병들이 속도를 늦췄다.
평원 끝에 성벽이 나타났다.
멀리서는 지평선 위에 그어진 검은 선처럼 보였지만 가까워질수록 성벽은 점점 높아졌다. 성가퀴의 굴곡이 모습을 드러내고 망루가 솟았으며, 그 위에서 움직이는 사람과 바람에 펄럭이는 금나라의 깃발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성 밖의 밭에는 수확하고 남은 줄기만 거칠게 서 있었고 길가의 집들은 대부분 비어 있었다. 몽골군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주민들이 곡식과 가축, 들고 갈 수 있는 물건을 챙겨 성안으로 피신한 뒤였다.
에센은 말 위에서 한참 동안 성벽을 올려다봤다.
초원에도 절벽은 있었고 말이 오르지 못하는 가파른 산비탈도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것은 자연이 만든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흙을 다지고 돌과 나무를 쌓아 넓은 평원 한가운데 일부러 산줄기 하나를 세워놓은 것 같았다.
“저렇게 높은 벽을 어떻게 넘습니까?”
수부타이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도 성벽을 보고 있었지만 에센과 같은 것을 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벽의 높이에 놀라는 대신 망루와 망루 사이의 거리, 성문이 놓인 방향, 성벽 앞으로 뻗은 길과 뒤쪽의 낮은 구릉을 차례로 훑었다. 성가퀴 위로 드러나는 병사의 수와 깃발의 위치까지 확인한 뒤에야 낮게 입을 열었다.
“넘을 수 없다면 문을 열게 해야겠지.”
잠시 뒤 길고 낮은 뿔나팔 소리가 평원을 건너왔다.
수부타이는 곧바로 말머리를 돌렸다.
“에센, 말들을 데리고 뒤로 물러나 있어라. 신호가 오면 예비마부터 준비하고.”
에센은 수부타이가 어디로 가는지 묻고 싶었지만 이미 멀리서 깃발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을 보았다. 지금부터는 수부타이가 자신에게 하나씩 설명해줄 시간이 아니었다.
“말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장군님이나 다치지 마십시오.”
“내 걱정을 할 틈이 있으면 네 말부터 챙겨라.”
그 말이면 충분했다.
수부타이는 이미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높은 곳에 세워진 만호의 깃발이 방향을 바꾸자 여러 천호의 깃발이 서로 다른 곳으로 흩어졌다. 하나의 거대한 무리처럼 보이던 몽골군에서 한 부대는 성의 북쪽으로 돌아갔고, 다른 부대는 남쪽의 낮은 구릉을 향했다.
에센은 그 움직임을 이제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었다.
수부타이의 깃발을 따라 백호들이 갈라졌고, 높은 곳에 선 만호의 깃발 아래에서는 다른 천호들도 각자의 길을 잡았다. 지휘관의 목소리가 닿지 않는 거리에서는 깃발과 뿔나팔이 말을 대신했으며, 전령들은 그사이를 질주했다.
명령이 전달될 때마다 평원을 덮은 군대의 형태가 달라졌다.
수부타이의 천호도 명령받은 위치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성벽 위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는 금군의 눈에는 몽골군 전체가 갑자기 평원 곳곳으로 흩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이 환주와 몽골군의 긴 대치가 시작된 첫날이었다.
───
처음 며칠 동안 몽골군은 성벽의 높이와 금군의 대응을 확인하듯 여러 차례 공격을 가했다.
기병들이 성벽 가까이 말을 달리며 화살을 퍼부으면 금군 병사들은 성가퀴 뒤로 몸을 숨겼고, 그 틈을 타 방패와 사다리를 든 공격대가 벽 아래까지 뛰어들었다.
그러나 성벽 위에서 쏟아지는 반격은 거셌다.
쇠뇌의 굵은 화살이 방패를 꿰뚫었고, 돌이 떨어질 때마다 벽 아래의 흙과 사람의 몸이 함께 튀어 올랐다. 사다리가 성벽에 걸리면 긴 장대를 든 금군 병사들이 끝을 밀어냈으며, 벽을 오르던 몽골 병사들은 붙잡을 곳을 잃고 사다리와 함께 허공으로 기울었다.
나무가 땅에 부딪쳐 부러지는 소리와 그 위에 매달렸던 사람들의 비명이 성벽 아래에서 뒤엉켰다.
몽골 궁수들이 일제히 활을 놓으면 수많은 화살이 검은 무리를 이루며 성가퀴 위로 날아갔다. 금군은 그 순간에만 몸을 숨겼다가 화살비가 지나가고 공격대가 다시 다가오면 어김없이 고개를 내밀었다.
성벽 위에서 바라보면 결과는 언제나 비슷했다.
몽골군이 다가왔다.
사람과 말이 쓰러졌다.
살아남은 자들은 다시 벽에서 멀어졌다.
하루가 지나면 또 공격했고, 끝내 성벽을 넘지 못한 채 물러났다.
그러나 같은 모양으로 보이는 공격도 매번 목적이 같지는 않았다.
어느 날에는 북쪽 성벽으로 사다리가 몰렸고, 다음 날에는 성문 앞에서 화살이 집중됐다. 공격대가 실제로 벽을 오르려는 동안 성벽에서 떨어진 구릉 위에서는 정찰병들이 금군의 병력 이동을 지켜봤다. 몽골군의 깃발이 한쪽으로 몰릴 때마다 어느 망루에서 병력이 빠지고, 성벽의 어느 구간으로 지원 병력이 몰리는지도 기록됐다.
금군에게 농성은 익숙한 전쟁의 방식이었다.
벽 안에 식량과 무기를 쌓아두고 적이 오면 문을 닫는다. 공격하는 군대는 사람도 먹어야 하고 말도 먹여야 하므로, 시간이 길어질수록 성 밖에 머무는 쪽이 먼저 지치기 마련이었다.
문제는 몽골군이 그들이 알던 군대와 달랐다는 데 있었다.
몽골군의 진지는 하루가 지나면 모양이 달라졌다. 어제 수천 필의 말이 있던 곳이 다음 날이면 텅 비었고, 멀리 다른 초지에 새로운 말 떼가 나타났다. 전사 한 명이 전투용 말 한 필에만 의지하는 것도 아니었다. 여러 필을 번갈아 탔으며 싸우지 않는 말들은 주변 초지로 흩어져 풀을 뜯었다.
몽골말은 금나라의 군마와 비교하면 초라해 보일 만큼 작았다. 그러나 거친 풀만으로 먼 거리를 움직였고, 한 마리가 지치면 기수는 곧바로 다른 말로 갈아탔다. 금군이 성벽 너머에서 몽골군의 피로가 쌓이기를 기다리는 동안, 몽골 기병들은 지친 말을 쉬게 하고 새로운 말에 안장을 옮겼다.
사람의 식량도 같은 방식으로 움직였다.
몽골군의 뒤에는 곡물을 가득 실은 거대한 수레 행렬이 끝없이 이어지지 않았다. 전사들은 말린 고기와 굳힌 젖을 지니고 다녔고, 그들 뒤로는 양과 염소를 비롯한 가축 떼가 물과 풀을 따라 이동했다.
에센은 며칠 뒤 그 모습을 직접 보았다.
저녁마다 나눠지는 말린 고기의 양이 줄어드는 것을 확인한 그는 수부타이의 부하인 보로에게 다가갔다. 보로는 가축 떼가 들어올 길을 살피고 있었다.
“남은 식량으로 오래 버티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성벽은 아직 멀쩡한데 고기부터 떨어지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보로는 걱정할 것 없다는 듯 서쪽을 가리켰다.
“남은 고기만 세고 있지 말고 저쪽을 봐라. 우리가 먹을 것이 제 발로 걸어오고 있지 않느냐.”
에센은 처음에는 먼지가 움직이는 줄 알았다.
그러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먼지 아래에서 셀 수 없이 많은 흰색과 검은색 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양 떼였다. 말을 탄 목동들이 양옆을 오가며 흩어지는 가축을 몰았고, 그 뒤로 염소와 다른 가축들이 계속 이어졌다.
군대에 식량이 도착하는 모습이라기보다 초원의 한 조각이 통째로 움직여오는 것 같았다.
몽골인들에게 전쟁과 이동은 완전히 다른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원래 이동하며 살았다. 말이 먹을 풀이 없어지면 초지를 옮겼고, 가축을 데리고 물을 찾아갔다. 군대가 되었다고 그 삶의 방식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몸에 밴 생활 자체가 전쟁의 방식으로 변한 것이다.
성벽 안의 사람들은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멀리서 바라보면 몽골군은 자꾸 줄어드는 것처럼 보였다. 어제 있던 천막이 없어지고 말 떼가 사라졌으며, 기병 몇 백이 서쪽으로 떠난 다음 날에는 또 다른 부대가 북쪽으로 이동했다.
금군은 그 움직임을 자신들이 아는 방식으로 해석했다.
몽골군이 지치고 있었다.
───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성안의 사정은 오히려 나빠졌다.
성문을 닫는 순간부터 환주가 가진 것은 벽 안에 있는 것이 전부였다. 주변 마을에서 피란 온 주민과 가축 때문에 먹여야 할 입은 늘어났지만, 창고의 곡식은 하루하루 줄어들었다.
우물은 그대로였으나 물을 마시는 사람은 많아졌고, 몽골군이 성벽에 접근할 때마다 화살과 쇠뇌살이 소모됐다.
처음에는 몽골군이 벽 아래에 나타나기만 해도 화살을 쏟아부었지만 며칠이 지나자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기다렸다. 시간이 더 흐른 뒤에는 지휘관들이 확실한 표적이 아니면 함부로 쏘지 못하게 했다.
몽골군은 그것도 보고 있었다.
전쟁은 성벽 바로 아래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정찰대는 닫힌 성문이 열리는 때가 있는지, 성벽 위 병력이 어느 시간에 교대하는지, 화살이 어느 구간에서 가장 많이 날아오는지 살폈다. 밤이 되면 어느 망루에 불이 켜지고, 횃불이 성벽 위를 어느 방향으로 오가는지도 지켜봤다.
수부타이의 천호도 시간이 흐를수록 성벽을 공격하는 날보다 지켜보는 날이 많아졌다. 병사와 말을 성에서 떨어진 초지로 옮겨 쉬게 했고, 정찰대가 돌아오면 그들이 보고 온 내용을 몇 번이고 다시 물었다.
에센이 볼 때 수부타이는 싸움이 길어질수록 오히려 바빠졌다.
칼을 뽑고 있는 시간보다 사람의 말을 듣고 지형을 살피는 시간이 훨씬 길었다. 낮에는 성벽과 주변 구릉을 오갔고, 밤이 되면 정찰대의 보고를 들으며 땅 위에 선을 긋고 작은 돌을 옮겼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만호장의 전령이 수부타이를 찾아왔다.
“내일 아침부터 전군이 서쪽으로 물러납니다. 천호장께서는 후미를 맡아 수레와 가축 떼가 두 번째 구릉을 완전히 넘어갈 때까지 성의 추격을 막으라는 명령입니다.”
수부타이는 서쪽으로 겹쳐진 구릉과 환주의 성문을 번갈아 바라봤다. 금군의 시야가 어디에서 끊기고 어느 지점부터 성벽 위의 망루에서도 보이지 않는지 확인한 뒤,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알았다. 우리가 마지막까지 남겠다.”
───
다음 날 아침, 몽골군의 진영에서는 전투가 아니라 철수가 시작됐다.
수레가 먼저 움직였고 천막이 걷혔으며, 가축과 말 떼가 서쪽으로 이동했다. 성벽 위의 금군은 평원을 가득 채웠던 몽골군의 흔적이 하나씩 사라지는 과정을 지켜봤다.
그날 몽골군은 공격하지 않았다.
다음 날에도 마찬가지였다.
남아 있던 부대들까지 차례로 서쪽으로 빠져나갔고, 수부타이의 천호는 마지막까지 진영을 걷으며 흩어진 말과 남은 물건을 수습했다. 서둘러 퇴각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쓸모없는 나무와 부서진 항아리, 불에 그을린 천막 일부는 그대로 버려두었다.
마침내 수부타이의 천호마저 서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성벽 위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보로가 말 위에서 뒤를 돌아봤다.
“우리가 도망친다고 믿는 모양입니다. 성벽 위에서 승리한 것처럼 좋아하고 있습니다.”
수부타이는 멀어지는 환주를 한 번 바라봤다.
“아직은 의심하고 있을 것이다. 더 좋아하게 둬라. 사람이 믿고 싶은 것을 완전히 믿게 되면 그다음에는 눈앞의 경고도 보지 못하는 법이니까.”
하루가 지나자 성벽에서는 몽골군의 큰 진영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남은 것은 수많은 말발굽에 짓밟힌 풀과 검게 탄 화덕 자리, 여기저기 흩어진 말똥뿐이었다.
그러나 구릉 너머에서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라진 몽골군은 흩어진 것이 아니라 금군의 눈이 닿지 않는 곳으로 옮겨갔다. 한 천호는 북쪽의 낮은 골짜기로 들어갔고, 다른 천호는 남쪽의 말라붙은 물길 뒤에 자리를 잡았다. 더 멀리에서는 또 다른 부대가 크게 돌아 환주의 동쪽 길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깃발은 낮아졌고 밤에 피우는 불은 최소한으로 줄었다. 금군의 정찰대가 멀리서 발견할 수 있는 능선에는 사람과 말을 세우지 않았으며, 기침 소리와 말 울음까지 경계할 만큼 진영은 조용해졌다.
그동안 말들은 주변 초지에서 충분히 풀을 뜯었다.
몽골군은 기다렸다.
───
환주의 성문이 열린 것은 그로부터 이틀 뒤였다.
처음 나온 것은 수십 기의 정찰 기병이었다.
그들은 몽골군이 머물렀던 진영을 살피며 불탄 화덕과 버려진 물건을 확인했고, 서쪽으로 조금 더 나아가 주변을 정찰했다. 구릉 가까이 다가갔을 때에도 몽골군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정찰대는 아무런 공격도 받지 않은 채 성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에는 더 많은 기병이 나왔다.
정찰대는 전날보다 서쪽으로 깊이 들어갔다. 두 번째 구릉에 가까워졌을 때, 먼 능선 아래에서 서쪽으로 이동하는 기병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말과 짐을 수습하느라 뒤처진 후위처럼 보였다.
정찰대가 다가가자 그들은 싸우지 않고 물러났다.
수부타이의 천호였다.
성안의 지휘관에게는 이제 판단할 만한 근거가 충분해 보였다. 오랫동안 성벽을 두드리던 적이 공격을 멈추고 진영을 걷었으며, 가축과 수레를 먼저 보낸 뒤 후위까지 서쪽으로 물러났다. 두 차례 정찰대를 내보냈지만 매복은 발견되지 않았고, 두 번째 정찰대는 뒤처진 적의 후위까지 확인하고 돌아왔다.
몽골군이 퇴각하고 있었다.
완전히 달아나기 전에 성 밖으로 나가 후위를 짓밟는다면, 오랜 농성으로 떨어진 병사들의 사기를 되살리고 적이 버리고 간 말과 물자까지 차지할 수 있었다.
마침내 성문이 크게 열렸다.
이번에는 정찰대가 아니었다.
무장한 금군 기병 수백이 성문을 통과해 평원으로 쏟아져 나왔고, 뒤이어 또 다른 기병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성벽 위에서는 출전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렸으며, 그 진동이 열린 성문을 지나 평원까지 따라 나왔다.
구릉 너머를 살피던 몽골 정찰병이 달려와 금군의 출전을 알렸다. 수부타이는 천호의 대열을 서쪽 길로 길게 늘어뜨린 채 속도를 늦췄다.
얼마 뒤 뒤쪽 능선 위로 금군의 깃발이 나타났다.
보로가 말머리를 돌려 뒤를 확인했다.
“나왔습니다. 정찰대가 아니라 제대로 무장한 기병대입니다.”
수부타이도 봤다.
능선을 넘어온 금군 기병들이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뒤따르는 후속 부대까지 생각하면 천 명에 가까운 병력이었다.
수부타이는 싸우지 않았다.
오히려 천호 전체에 속도를 높이라는 신호를 보냈다.
몽골군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금군의 함성이 평원을 울렸다.
수부타이의 천호는 서쪽을 향해 질주하면서 일부러 대열을 흐트러뜨렸다. 몇몇 기병은 다른 무리보다 뒤처졌고, 그들을 기다리는 것처럼 속도를 늦추는 자들도 나타났다.
눈앞에서 적의 후위가 무너지는 것을 본 금군은 더 빠르게 말을 몰았다.
두 군대 사이의 거리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뒤처졌던 몽골 기병 하나가 달리는 말 위에서 허리를 돌렸다.
말은 그대로 앞으로 달렸지만 기수의 상체는 완전히 뒤를 향했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가 손가락을 떠나는 순간 화살 한 발이 추격해오는 금군을 향해 날아갔다.
선두에서 달리던 말 한 마리가 목을 젖히며 휘청거렸다.
곧 다른 몽골 기병도 몸을 돌렸다.
이번에는 둘이었다.
잠시 뒤에는 셋과 넷으로 늘어났다.
달아나는 군대가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뒤를 향해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몽골 기병들은 무릎과 다리로 말의 움직임을 붙잡은 채 상체만 돌려 활을 당겼다. 화살을 놓은 뒤에는 다시 앞으로 몸을 돌렸고, 활에 새 화살을 건 다음 또다시 뒤를 향했다.
그동안에도 말의 속도는 거의 줄어들지 않았다.
금군도 달리는 말 위에서 활을 당겨 응사했다. 그러나 앞서 달아나는 몽골 기병들은 추격대가 가까워질 때만 몸을 돌려 쏜 뒤 다시 거리를 벌렸다. 금군의 화살이 날아들면 뒤처져 있던 기병들이 양옆으로 흩어졌고, 그들을 따라잡으려는 선두는 뒤의 대열에서 조금씩 멀어졌다.
앞서 거리를 벌린 몽골 기병들은 동료들이 뒤를 향해 화살을 쏘는 사이 잠시 속도를 낮추고 예비마로 갈아탔다. 새 말에 오른 자들이 다시 뒤쪽을 맡으면, 조금 전까지 추격대를 견제하던 기병들이 앞으로 빠져나갔다.
금군은 벌어진 거리를 메우기 위해 말을 더욱 거칠게 몰았다.
추격이 길어질수록 환주의 성벽은 구릉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됐다.
금군의 대열은 반대로 길어졌다.
빠른 말을 탄 선두가 앞으로 치고 나가는 동안 뒤처지는 기병이 늘어났고, 처음에는 단단하게 뭉쳐 있던 대열 곳곳에 틈이 벌어졌다. 지휘관의 고함도 말발굽 소리와 먼지 속에 묻히면서 후방까지 닿지 않았다.
수부타이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다.
그러나 그가 확인하는 것은 쫓아오는 금군만이 아니었다. 왼쪽으로 길게 이어진 낮은 구릉과 오른쪽의 말라붙은 물길, 조금 더 앞에서 시야를 가로막는 완만한 능선까지 차례로 살폈다.
겉으로 보기에는 어디에도 몽골군이 없었다.
적어도 금군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멀리서 길고 낮은 뿔나팔 소리가 평원을 갈랐다.
수부타이가 오른손을 들었다.
그의 천호를 알리는 깃발이 바람을 받아 솟아올랐다.
조금 전까지 흐트러져 달아나던 기병들의 움직임이 즉시 달라졌다. 앞서가던 자들이 속도를 조절했고, 양옆으로 벌어졌던 기병들은 서로의 간격을 맞추기 시작했다.
도망치느라 무너진 것처럼 보였던 대열이 달리는 말 위에서 빠르게 형태를 되찾았다.
두 번째 뿔나팔이 울렸다.
구릉 너머에서 깃발 하나가 솟았다.
금군의 선두가 그것을 보았다.
너무 늦었다.
낮은 능선 위로 말머리들이 한꺼번에 솟아오르더니 처음에는 수십이던 것이 순식간에 수백으로 불어났다. 왼쪽 구릉 뒤에 숨어 있던 몽골 기병들이 비탈을 타고 쏟아져 내려왔고, 거의 동시에 오른쪽의 말라붙은 물길에서도 또 다른 천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평원 전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금군의 눈앞에는 달아나는 수부타이의 천호밖에 없었다. 이제는 왼쪽과 오른쪽에서 몽골 기병이 달려오고 있었고, 뒤쪽에서도 새로운 깃발이 모습을 드러냈다.
뿔나팔 소리가 다시 바뀌었다.
수부타이가 말머리를 돌리자 천 명의 기병이 그 움직임을 따라 방향을 틀었다. 조금 전까지 등을 보이며 달아나던 말들이 거대한 흐름처럼 돌아섰고, 순식간에 금군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도망치던 군대는 더 이상 없었다.
수부타이는 칼을 뽑아 앞으로 겨눴다.
“간다!”
말이 튀어나갔다.
수부타이의 천호가 조금 전까지 자신들을 추격하던 금군을 향해 맹렬하게 되돌아갔고, 양옆에서는 매복해 있던 몽골 기병대가 동시에 속도를 높였다.
수천 개의 발굽이 평원을 두드리면서 땅이 울렸다.
말들이 일으킨 황갈색 먼지가 전장을 뒤덮기 시작했다.
포위망이 완전히 좁혀지기 전, 몽골 궁수들이 아직 떨어져 있는 금군의 대열을 향해 일제히 활을 놓았다.
수많은 화살이 한꺼번에 솟구쳤다.
멀리서 바라보면 검은 구름 한 조각이 평원 위에서 갑자기 생겨난 것 같았다. 활시위를 떠난 화살들은 하늘에서 정점을 찍은 뒤 방향을 바꾸며 길게 늘어진 금군의 대열 위로 기울었다.
검은 화살비가 쏟아졌다.
제9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