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 새겨진 단검
《신의 로그》
PART 2 — 〈HLP〉
제7화 〈이름이 새겨진 단검〉
등 뒤에서 두꺼운 격리문이 닫혔다.
철컥.
현승은 종이컵을 든 채 작업대 쪽으로 걸어갔다.
키이우에서 건너온 보존함이 보존실 중앙에 놓여 있었다. 길이 두어 걸음 남짓한 회색 상자의 모서리마다 충격 감지 장치가 붙어 있었고, 측면 표시창에는 출발 이후 기록된 내부 온도와 습도, 진동 수치가 일정한 간격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엘리즈 투탱은 작업대 맞은편에 서서 키이우 현장에서 전송된 자료를 읽고 있었다. 밝은 금발 사이로 희끗한 머리카락이 자연스럽게 섞여 있었고, 회색 눈은 홀로그램 위에 펼쳐진 수치와 현장 사진을 천천히 오갔다.
현승이 다가가자 엘리즈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눈을 들었다.
“정각이긴 하지만 팀장이 먼저 와 있으면 늦은 겁니다.”
“그런 규칙이 있었나?”
옆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났다.
키안 파라하니가 짧게 다듬은 회색 수염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말했다.
“고고학보다 오래된 규칙이지. 아직 그 규칙을 적은 점토판은 찾지 못했지만, 발견하는 날 제일 먼저 자네 바카라상 위에 올려두겠네.”
“그 점토판은 연대측정부터 다시 해봐야겠네요.”
엘리즈가 보존함을 가볍게 두드렸다.
“두 분의 역사 논쟁은 나중에 하고 시작하죠.”
현승도 농담을 거두고 작업대 앞으로 다가갔다.
노라는 이미 보존함의 봉인 기록을 HLP 중앙 시스템과 대조하고 있었다. 맞은편에서는 히워트 베르하누가 벽면에 띄워진 키이우 현장 자료를 살피고 있었는데, 갈라진 도로나 폭발 흔적보다 흙 속에서 드러난 인골의 형태에 시선이 오래 머물러 있었다.
마테오 우아만은 그 옆에서 말없이 현장 사진 한 장을 확대해 보고 있었다. 보존함이 수습되기 직전, 유골과 단검이 흙 속에 함께 노출된 장면이었다.
엘리즈가 모두의 준비 상태를 확인한 뒤 말했다.
“열죠.”
노라가 개폐 패널에 손을 올렸다.
“키이우 출발 당시 봉인 기록과 일치해. 운송 과정에서 허용치를 넘은 충격은 없었고 내부 온도와 습도도 안정적으로 유지됐어.”
잠금장치가 차례로 풀렸다.
짧게 공기가 빠지는 소리가 난 뒤 두꺼운 투명 덮개가 천천히 올라갔고, 차갑고 마른 흙냄새가 보존실 안으로 번졌다.
키이우에서 잘라낸 땅 한 조각이 그대로 이스탄불까지 건너와 있었다.
누구도 바로 손을 대지 않았다.
흙 속에는 한 사람이 누워 있었다. 두개골과 갈비뼈 일부가 드러나 있었고 척추와 골반, 다리 쪽은 여전히 토층 안에 잠겨 있었다. 오른팔이 놓였던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검게 부식된 단검 한 자루가 반쯤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히워트가 먼저 몸을 숙였다.
장갑 낀 손이 유골 가까이 다가갔지만 닿지는 않았다. 조명의 각도를 조금 바꾸자 그녀의 시선이 두개골에서 치아로, 턱뼈와 쇄골을 지나 노출된 척추와 골반 쪽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현승과 엘리즈의 시선이 차례로 자신에게 향하자 히워트가 먼저 판단의 범위를 정했다.
“성인이고, 현재 드러난 골격 특징만 보면 남성일 가능성이 높아. 나이와 사망 원인은 유골을 더 노출하고 손상 여부까지 확인해야 해. 지금 보이는 것만 가지고 범위를 좁히지는 않을게.”
키안이 작게 웃었다.
“오늘도 모르는 것부터 시작하는군.”
히워트는 유골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죽은 사람은 우리 일정에 맞춰 서둘러주지 않아. 오래 기다리게 한 만큼 우리도 천천히 들어야지.”
키안의 입가가 조금 올라갔다.
현승은 벽면에 키이우 현장 자료를 불러냈다.
폭발 전 지형과 수습 직후 기록된 삼차원 영상이 겹쳐졌다. 데샤티나 교회 유적과 갈라진 도로, 유골이 노출된 위치가 차례로 표시됐고, 그 아래로 기존 조사에서 추정한 중세의 옛길이 희미한 선으로 지나갔다.
현승은 지도를 돌려 유골이 발견된 지점을 확대했다.
“발견 지점은 교회 유적 북쪽이면서 옛길 추정선의 가장자리이기도 해. 폭발 충격으로 현대 포장층과 후대 퇴적층 일부가 무너지면서 더 오래된 층이 드러난 거야. 다만 누군가 이 사람을 일부러 묻었는지, 죽은 자리에 흙과 건축 잔해가 덮였는지는 아직 구분할 수 없어.”
엘리즈가 좌표와 토층 단면을 천천히 대조했다.
“그렇다면 매장이라고 단정하지 말고 매몰 상태로 기록하죠. 의도적으로 묻혔다는 증거가 나오기 전까지는 둘을 구분해야 합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생각하는 것과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다르니까요.”
현승은 대꾸하지 않고 지도를 조금 더 확대했다. 엘리즈가 저렇게 말할 때에는 대개 옳았고,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순순히 대답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그사이 키안과 마테오는 단검 양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화려한 물건은 아니었다.
철제 날은 수백 년의 부식으로 검붉게 변해 있었고, 손잡이 역시 본래의 색과 재질을 육안으로 구별하기 어려웠다. 흙과 녹이 겹겹이 달라붙은 표면은 오래된 나무껍질처럼 거칠고 불규칙했다.
마테오가 정밀 조명의 밝기를 낮췄다.
정면에서 쏟아지던 빛이 비스듬히 누우면서 울퉁불퉁한 부식층 위로 가느다란 그림자들이 생겼고, 한동안 말없이 표면을 살피던 마테오의 손이 어느 지점에서 멈췄다.
“여기.”
키안이 몸을 숙였으나 곧바로 흔적을 찾지는 못했다. 마테오는 손가락으로 위치를 가리키는 대신 조명의 방향을 조금 더 낮췄다.
검은 부식층 사이에서 얕은 홈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고, 그 옆으로 비슷한 흔적이 이어졌다. 육안으로만 보면 우연한 긁힘이나 후대에 생긴 손상으로 지나칠 만한 흔적이었다.
노라가 가까이 다가왔다.
“표면을 스캔해볼게. 토양과 부식층을 분리하면 금속에 남은 흔적인지 확인할 수 있어.”
마테오가 한 걸음 물러서자 단검의 표면 데이터가 벽면에 떠올랐다. 서로 다른 파장에서 얻은 영상이 차례로 겹쳐지면서 토양과 부식층, 그 아래 금속 표면의 미세한 높낮이가 분리됐다.
마테오가 발견한 홈이 조금씩 선명해졌다.
키안은 화면 앞으로 다가가 시작점과 끝부분을 번갈아 살폈다.
“단순히 긁힌 자국이라기에는 깊이와 간격이 지나치게 고르군. 같은 손이 어떤 형태를 만들려고 여러 번 새긴 흔적처럼 보여.”
노라가 여러 방향의 단면을 겹쳐 보였다.
“획의 깊이가 비교적 일정하고 시작점마다 비슷한 압흔이 남아 있어. 자연 부식이나 우연한 마찰만으로 생겼을 가능성은 낮아 보여. 다만 문자라고 판단하려면 반복되는 획의 구조부터 확인해야 해.”
엘리즈는 확대된 홈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표면의 의미를 추정하기 전에 유골과 단검의 연대부터 확인하죠. 같은 매몰층에서 나왔다는 사실만으로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으니까요.”
───
노출된 늑골에서 극소량의 시료를 채취해 분석 장비에 넣은 뒤에도 조사는 멈추지 않았다.
히워트는 유골과 토층의 상태를 기록했고, 현승은 키이우에서 전송된 지층 자료와 수습 위치를 다시 맞췄다. 키안은 단검의 형태와 제작 흔적을 비교했으며, 마테오는 확대된 표면을 말없이 들여다봤다.
몇 시간이 흐른 뒤 첫 번째 분석 결과가 나왔다.
노라가 방사성탄소연대측정의 보정 범위를 벽면에 띄우자 히워트가 수치를 확인하고 말했다.
“보정연대의 중심 구간이 13세기에 들어와. 시료를 더 확보해서 교차검증해야 하지만, 적어도 현대에 매장된 유골일 가능성은 제외해도 되겠어.”
현승은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였다.
키이우에서 발견된 13세기의 유골.
그 장소까지 생각하자 떠오르는 사건은 분명 있었다.
1240년.
그러나 현승이 입을 열기도 전에 엘리즈가 그의 표정을 읽었다.
“1240년의 몽골 침공을 생각하고 있겠지만 아직 특정할 수는 없어요. 방사성탄소연대 하나만으로 정확한 사망 연도를 정할 수도 없고, 13세기 키이우의 땅에 묻힌 사람이 몽골군에게 죽은 사람뿐이었을 리도 없으니까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얼굴이 충분히 말하고 있었습니다.”
키안이 웃음을 삼켰다.
현승은 현재 지도와 중세 도시 복원도를 한 화면에 겹쳤다. 데샤티나 교회 유적 북쪽, 옛길 추정선과 유골의 위치가 맞물려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1240년을 확정할 수 없다는 사실은 그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가능성이 하나 생긴 것과 아무것도 없는 것은 달랐다.
“단검 쪽은 어때?”
노라가 옆에 다른 분석 자료를 띄웠다.
“철제라는 것은 확인됐어. 제작 방식과 금속 조직에서 추정한 시기도 유골의 연대와 크게 어긋나지는 않지만, 단검 자체만으로 범위를 더 좁히기는 어려워. 현재 확인된 건 13세기 범위의 남성 유골과 그 가까이 놓여 있던 철제 단검 한 자루까지야.”
두 결과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지금은 충분했다.
그 이상은 아직 증거가 아니었다.
마테오가 조금 전 발견했던 홈을 다시 확대했다.
“그러면 이 흔적을 다시 보자. 표면 손상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새긴 것이라면 단검이 어디에서 만들어졌는지 좁힐 수 있을지도 몰라.”
노라가 스캔 영상을 조정했다.
검게 엉겨 붙은 부식층 아래에서 끊어졌던 선들이 조금씩 이어졌다. 곧은 획과 굽은 선이 나타났다 사라졌고, 금속 자체가 상한 부분에서는 형태가 통째로 비어 있었다.
키안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는 화면을 천천히 돌려보게 한 뒤 반대 방향에서도 획의 배열을 확인했다. 한동안 침묵이 흐른 뒤에야 그의 손가락이 몇 개의 선을 차례로 짚었다.
“우연히 난 흠집은 아닌 것 같아. 누군가 무엇인가를 남기려고 같은 방향으로 금속을 반복해서 파냈어. 문자일 가능성을 열어두고 비교해보자.”
노라가 서로 다른 지역에서 출토된 몽골 제국기의 비문과 문서, 각인 표본을 화면 가장자리에 펼쳤다. 보존된 획과 비슷한 형태들이 여러 갈래로 분류되자 키안은 그중 세로로 이어지는 글자군을 가리켰다.
“이쪽 계통부터 비교해봐. 획을 새긴 방향과 글자가 연결되는 방식이 가장 비슷해.”
분석 범위가 좁혀졌다.
노라는 보존된 선과 비교 자료를 여러 차례 겹친 뒤 결과를 내놓았다.
“13세기 초 몽골이 받아들인 위구르계 문자와 가장 가까워. 남아 있는 부분만으로 확정할 수는 없지만 다른 문자 체계보다 획의 연결 방식이 자연스럽게 맞아.”
현승의 시선이 단검에서 키이우 지도로 옮겨갔다.
13세기의 키이우에서 나온 유골.
그 곁의 단검.
그리고 초기 몽골 문자일 가능성이 있는 각인.
조금 전까지 따로 놓여 있던 정보들이 같은 방향을 가리키기 시작했다.
엘리즈도 그 연결을 알아차렸지만 이번에는 현승을 제지하지 않았다. 가능성을 떠올리는 것과 그것을 사실로 발표하는 것은 달랐다.
키안은 화면에 남은 획을 따라 천천히 시선을 움직였다.
“문자 체계가 맞는다면 음가도 어느 정도 복원할 수 있겠어. 다만 부식으로 사라진 부분을 임의로 채워서는 안 돼. 확인되는 획만 놓고 가능한 형태를 찾아봐.”
노라는 남아 있는 획을 손상되지 않은 부분과 끊어진 부분으로 나누고, 같은 시대의 문자 형태와 가능한 음가를 하나씩 겹쳤다. 몇 개의 후보가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동안 키안은 아무 말 없이 화면을 지켜봤다.
그러다 부식으로 중간이 사라진 짧은 획에서 그의 손이 멈췄다.
“여기가 문제야. 앞뒤 형태만 보면 두 가지 정도가 가능한데, 하나는 인명으로 이어지고 다른 하나는 문장 안에 있어야 성립하는 형태야. 이게 이름만 단독으로 새긴 것이라면 첫 번째가 자연스러워.”
노라가 동시대 자료와 다시 대조했다.
“두 번째 형태는 같은 시기의 자료에서 이 위치에 쓰인 사례가 거의 없어. 인명으로 놓으면 남은 음가가 끊기지 않고 이어져.”
키안은 화면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손상된 부분을 억지로 복원하지 말고 비워둔 채 연결해보라고 했다.
확인 가능한 음가가 화면에 차례로 나타났다.
키안의 눈빛이 달라졌다.
“설마…….”
현승이 한 걸음 다가갔다.
“누군지 알겠어?”
키안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이 떠올린 이름에 끌려가고 싶지 않은 듯 처음부터 획을 다시 짚어본 뒤, 노라에게 독립적으로 판독한 결과를 말해달라고 했다.
노라는 복원된 형태를 한 번 더 확인했다.
“인명으로 읽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워. 당시 음가에 가깝게 옮기면…….”
잠깐의 침묵 뒤 낯선 이름이 보존실 안에 울렸다.
“……Sübe’etei.”
키안의 얼굴에서 남아 있던 웃음기가 사라졌다.
노라가 관련 기록을 불러오자 중국과 페르시아, 몽골계 기록에 남은 이름들이 한 화면에 늘어섰다. 기록한 언어와 시대에 따라 표기는 조금씩 달랐지만 모두 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었다.
현승이 낮게 말했다.
“수부타이.”
보존실 안이 조용해졌다.
조금 전까지 이름 없는 철제 유물이었던 단검이 단 하나의 이름 때문에 역사 속 인물과 연결되기 시작했다.
키안은 복원된 각인과 사료의 표기를 번갈아 살피며 쉽게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기록마다 표기가 다르지만 음운 대응은 가능해. 지금 남아 있는 획만 놓고 보면 수부타이라는 이름으로 읽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는 데에는 나도 동의해. 다만 자연스럽다는 것과 확정됐다는 것은 다르니 다른 판독 가능성도 계속 열어둬야 해.”
현승은 흙 속의 유골과 그 곁에 놓인 단검을 차례로 바라봤다.
엘리즈가 그 시선을 따라가며 말했다.
“그 이름이 단검에 새겨졌다는 것과 이 유골이 수부타이라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예요. 단검이 이 사람의 소유였는지도 아직 확인되지 않았고요.”
“알아. 수부타이가 키이우에서 죽지 않았다는 기록부터 있으니 이 유골이 그 사람일 수도 없지.”
물건은 주인을 바꿀 수 있었다. 전쟁터라면 더 그랬다. 다른 사람이 수부타이의 이름을 새긴 물건을 소유했을 수도 있고, 그 이름이 처음부터 단검에 새겨져 있었는지, 훗날 누군가 새겼는지도 확인해야 했다.
그럼에도 질문 하나는 피할 수 없었다.
현승은 단검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수부타이의 이름이 새겨진 단검이 왜 키이우의 땅속에서 나왔을까.”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그들이 가진 자료로는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마테오가 움직인 것은 그때였다.
그는 단검의 반대편으로 돌아가 조명의 방향을 천천히 바꿨다. 빛이 금속 표면을 거의 스치듯 지나가자 부식층의 그늘 안에서 또 다른 흔적 하나가 떠올랐다.
“노라, 이쪽도 확인해줘. 글자와는 모양이 다른 것 같아.”
스캔 방향이 바뀌었다.
부식 아래에서 짧은 선 몇 개가 서로 꺾이고 이어진 작은 문양이 나타났다. 일부가 사라졌음에도 우연한 상처와는 다른 반복성이 남아 있었지만, 키안은 확대된 형상을 살핀 뒤 자신이 아는 문자 형태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노라는 장인 표식과 소유 표시, 종교 기호, 군사 표식 등 여러 지역과 시대의 자료를 불러내 비교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조금 흘렀다.
키안이 노라를 바라봤고, 마테오는 움직이지 않은 채 기다렸다.
마침내 비교 화면이 멈췄다.
“현재 확보된 자료에서는 신뢰할 만한 대응 항목을 찾지 못했어. 비슷한 형태는 있지만 같은 기원이라고 판단할 정도는 아니야.”
엘리즈는 화면 속 문양을 잠시 바라보다가 별도 항목으로 분리해 기록하라고 지시했다.
화면 한쪽에 새로운 항목이 생겼다.
미확인 표식.
현승은 다시 단검을 바라봤다.
검붉은 녹과 흙 아래에서 팔백 년 만에 되살아난 이름.
수부타이.
조명 아래 확대된 손잡이의 홈이 화면을 가득 채우더니, 거칠게 파인 금속 표면이 천천히 사라졌다.
───
1211년, 몽골 초원.
“수부타이!”
이름이 펠트 벽에 부딪혀 낮게 울렸다.
게르 안에 있던 수부타이가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밖에서는 초원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었다. 문가에 걷어 묶어둔 두꺼운 펠트가 들썩일 때마다 한낮의 빛이 어두운 게르 안으로 밀려들었고, 불씨가 거의 사그라진 화덕에서는 마른 짐승 똥이 타고 남은 매캐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거기에 양털과 가죽, 사람의 몸에 밴 땀과 말 냄새가 섞여 있었다.
문밖으로는 끝을 알 수 없는 초원이 펼쳐졌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누렇게 마른 풀이 한 방향으로 누웠다가 다시 일어났고, 게르 사이에 묶인 말들은 꼬리를 흔들거나 앞발로 땅을 긁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전사들이 안장의 가죽끈을 당겨보고 화살촉과 활시위를 점검하고 있었다.
가죽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소리와 재갈과 마구가 부딪치는 쇳소리, 말들이 코로 거칠게 숨을 내뿜는 소리가 바람 사이에 섞였다.
수부타이는 게르 안쪽으로 걸어갔다.
서른 중반의 그는 넓은 어깨와 단단한 체격을 갖고 있었지만, 사람을 먼저 압도하는 것은 몸집보다 움직임이었다. 걸음에는 불필요한 동작이 없었고, 햇볕과 모래바람에 오래 그을린 얼굴에서도 감정을 쉽게 읽기 어려웠다.
그가 지나가자 좌우에 앉아 있던 장수들이 몸을 움직여 길을 냈다.
상석에 앉은 남자는 그대로였다.
짙은 수염이 턱과 목을 덮고 있었고 옷차림에는 과한 장식이 없었다.
칭기즈 칸은 수부타이보다 자신의 손에 들린 낡은 가죽끈을 보고 있었다.
말안장에서 끊어진 고리였다.
그는 터진 부분을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워 몇 번 비틀어보고 마모된 단면을 손톱으로 긁었다.
“가까이 오라.”
수부타이가 앞으로 나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칭기즈 칸은 그제야 가죽끈을 내려놓고 곁에 놓인 단검을 집었다.
짙은 가죽으로 감싼 검집과 아직 손때가 묻지 않은 손잡이.
손잡이 아래에는 얕고 선명한 각인이 하나 새겨져 있었다.
“받아라.”
수부타이가 두 손을 내밀었다.
단검이 손바닥 위에 놓였다.
생각보다 묵직했다.
그는 잠시 단검을 바라보다가 손잡이의 각인에서 시선을 멈췄다.
자신의 이름이었다.
엄지가 천천히 홈 위를 지나갔다. 날카로운 도구가 금속을 밀어내며 만든 얕은 골이 손끝에 그대로 느껴졌다.
“제 이름을 새기셨습니까?”
칭기즈 칸은 수부타이의 손에 놓인 단검을 바라보며 말했다.
“잃어버리지 말라고 새긴 것이 아니다. 언젠가 그 단검이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더라도 처음에는 네 것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전쟁터에서 물건은 쉽게 주인을 바꿨다.
말도, 갑옷도, 활도 그랬다. 어제 죽은 사람의 칼을 오늘 살아남은 사람이 차는 일은 드물지 않았다.
그러나 이름은 남았다.
누구의 손에서 시작된 물건인지, 한때 누구의 것이었는지를.
수부타이는 머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칸.”
“감사는 돌아와서 해라.”
칭기즈 칸은 곧바로 시선을 돌렸다.
조금 전 내려놓았던 안장의 가죽 고리를 다시 집어 옆에 앉아 있던 장수에게 내밀었다.
“이걸 만든 자에게 보여라. 같은 흠이 있는 고리가 더 있다면 전부 바꿔야 한다. 이런 것이 하나 더 끊어지면 말이 아니라 사람이 죽는다.”
장수는 굳어진 얼굴로 가죽 고리를 받아 들었다.
“명심하겠습니다.”
수부타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새로 받은 단검을 허리춤에 찼다. 손이 가장 쉽게 닿는 위치를 잡고 가죽끈을 한 번 더 당겨 단단히 고정했다.
그때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바람 속에 묻힐 만큼 희미했지만, 게르 바깥에 묶여 있던 말 몇 마리가 먼저 귀를 세웠다. 발굽 소리가 빠르게 커지자 전사들이 하나둘 동쪽 초원을 바라봤다.
먼 지평선에서 말 한 마리가 흙먼지를 길게 끌며 달려오고 있었다. 사람의 얼굴은 아직 보이지 않았지만 말과 기수의 검은 형체가 눈에 띄게 커지는 속도만으로도 얼마나 거칠게 달려오는지 알 수 있었다.
기수는 야영지에 들어와서도 좀처럼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비켜라!”
전사들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말은 게르 앞에 다다라서야 앞발을 버티며 가까스로 멈췄다. 마른 흙이 발굽 아래에서 튀었고, 짐승의 옆구리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 거칠게 오르내렸다. 목과 가슴은 땀으로 검게 젖어 있었으며, 벌어진 콧구멍에서는 뜨거운 숨이 연달아 뿜어져 나왔다.
기수가 안장에서 내려왔다.
두 발이 땅에 닿는 순간 무릎이 꺾였지만, 그는 손으로 땅을 짚지 않고 가까스로 몸을 세웠다. 얼굴에는 먼지가 두껍게 들러붙어 있었고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와 관자놀이에 엉겨 있었다.
경비병이 앞을 막아섰다.
“어디에서 왔으며 무슨 일로 칸을 찾느냐?”
전령은 거친 숨을 몇 번이나 삼킨 뒤에야 대답했다.
“동쪽에서 왔다. 칸께 한시라도 빨리 전해야 할 소식이 있다.”
그 한마디에 게르 안에 있던 장수들의 시선이 문 쪽으로 모였다.
칭기즈 칸이 고개를 들었다.
“들여보내라.”
전령이 안으로 들어왔다.
오랫동안 말 위에서 흔들린 다리는 아직 제대로 펴지지 않았다. 그는 몇 걸음을 옮긴 뒤 칭기즈 칸 앞에 무릎을 꿇었고, 한동안 숨을 고르는 것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누구도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
칭기즈 칸은 흙투성이가 된 전령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장화에 말라붙은 흰 땀 자국과 젖은 말채찍으로 시선을 옮겼다.
“말은 몇 번 갈아탔느냐?”
전령이 가슴을 크게 들썩이며 대답했다.
“세 번입니다, 칸. 동쪽 초소에서 가장 빠른 말을 골라 쉬지 않고 달려왔습니다.”
몇몇 장수의 표정이 달라졌다.
말을 세 번이나 바꿔 타고 달려올 만큼 급한 소식이었다.
칭기즈 칸이 짧게 말했다.
“말하라.”
전령이 고개를 들었다.
“칭기즈 칸께 보고드립니다.”
수부타이의 오른손이 천천히 허리춤으로 내려갔다.
방금 받은 단검의 손잡이가 손바닥에 닿았다.
엄지가 움직이자 새로 파낸 홈의 거친 감촉이 느껴졌다.
자신의 이름이었다.
제 7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