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센
《신의 로그》
PART 3 — 〈몽골〉
제8화 〈에센〉
에센은 말 두 마리의 고삐를 쥔 채 칭기즈 칸의 게르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한 마리는 자신의 것이었고, 다른 한 마리는 수부타이가 타는 말이었다.
그러나 정확히 따지면 둘 다 에센의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해가 뜨기 전부터 먹이를 챙기고, 거친 털을 빗질하고, 발굽 사이에 날카로운 돌이 끼지는 않았는지 살피는 일부터 안장 아래 살갗이 쓸리거나 짓무른 곳은 없는지 확인하는 일까지 전부 그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수부타이는 필요할 때 등에 올라타기만 했다.
에센은 가끔 그 사실이 못마땅했다. 전쟁터에서는 며칠 뒤의 길 상태와 수십 리 밖 적의 움직임까지 따지는 사람이, 정작 자기 몸을 싣고 달리는 말의 발굽에는 어째서 저렇게 무심한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따져 물으면 돌아올 말은 뻔했다.
그러라고 너를 데리고 다니는 것이다.
에센은 속으로 수부타이의 낮은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의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짐승이 뜨거운 콧김을 뿜으며 귀를 한 번 털자 그는 고삐를 느슨하게 풀어주었다.
“너도 고생이 많다.”
게르 안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조금 전, 말을 세 번이나 갈아타며 달려온 전령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에센도 그 사내를 보았다. 안장에서 내리는 순간 무릎이 휘청거렸고, 입술은 하얗게 말라 갈라져 있었으며 장화에는 먼지와 마른 진흙이 두껍게 붙어 있었다.
무슨 소식을 가져왔는지는 몰랐다.
다만 사소한 일이라면 말을 세 번씩 갈아타며 초원을 가로질러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에센은 게르 입구를 힐끗 바라봤다.
저 두꺼운 펠트 장막 뒤에 칭기즈 칸이 있었다.
그 사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열다섯 살 에센의 허리가 저절로 펴졌다.
칸은 이상한 사람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에센은 그가 말을 타는 모습도 보았고, 손으로 양고기를 뜯어 먹는 모습도 보았다. 언젠가는 진영 한복판에서 말안장의 끊어진 가죽끈을 직접 들고 마모된 자리를 한참 살펴보는 모습도 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가까이에서 볼수록 오히려 더 먼 사람처럼 느껴졌다.
에센이 더 어렸을 때의 초원은 지금과 달랐다. 서로 다른 부족이 저마다의 깃발을 세우고 싸웠으며, 어제 같은 편이던 사람들이 오늘 활을 겨누기도 했다. 말과 가축을 빼앗긴 원한은 다시 다른 싸움을 불렀고, 그 싸움은 또 다른 아이에게서 부모를 빼앗아갔다.
에센 역시 그런 싸움 속에서 부모를 잃었다.
그리고 자신이 일곱 살이었는지 여덟 살이었는지도 분명하지 않던 때부터 수부타이를 따라다녔다.
그 뒤로 여러 해가 흘렀다.
부족의 이름도, 대대로 이어진 원한도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초원에서는 하나의 이름이 다른 모든 이름보다 크게 울렸고, 한때 서로 죽이던 사람들의 말머리가 적어도 지금만큼은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칭기즈 칸.
그 중심에 저 게르가 있었다.
두꺼운 펠트 문이 젖혀졌다.
에센은 반사적으로 시선을 낮췄다.
가장 먼저 나온 것은 전령이었다. 들어갈 때보다 얼굴이 더 굳어 있었고, 뒤이어 모습을 드러낸 장수 둘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그 순간부터 진영의 공기가 달라졌다.
어디선가 말 한 마리가 급하게 끌려 나왔고, 조금 떨어진 게르에서는 무장이 덜 끝난 사내가 달리면서 가죽끈을 조였다. 전령 하나가 말을 박차고 지나가자 더 먼 곳에서 예비마들의 울음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게르 안으로 들어간 소식이 명령으로 바뀌어 밖으로 퍼지고 있었다.
말과 사람을 움직이는 명령이었다.
마지막으로 수부타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얼굴이었다.
에센은 수부타이의 눈과 굳게 다문 입을 번갈아 살폈다.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지만 좋은 소식을 들은 사람의 얼굴도 아니었다. 애초에 수부타이는 얼굴만 보고 속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수부타이의 허리춤에서 멈췄다.
처음 보는 물건이 있었다.
짙은 가죽으로 감싼 새 검집이었다.
“장군님, 허리에 찬 것은 칸께서 주신 겁니까?”
수부타이는 에센이 바라보는 자신의 허리춤을 내려다봤다.
“다른 데를 보고 있는 줄 알았더니 그런 것은 잘도 찾아내는구나.”
“정말 칸께서 주셨군요. 한번 보여주십시오.”
대답을 기다리기도 전에 손이 먼저 나갔다.
탁.
수부타이가 손을 뻗어 에센의 손등을 가볍게 쳤다.
“아!”
“누가 만지라고 했느냐.”
에센은 손등을 문지르며 억울한 얼굴로 수부타이를 바라봤다.
“한번 보는 게 뭐가 어떻다고 그러십니까. 검집만 멀리서 구경하라는 뜻은 아닐 것 아닙니까?”
“눈으로 보고 있으니 이미 본 것이다. 제대로 보고 싶다는 핑계로 손부터 내미는 버릇이나 고쳐라.”
“좋은 물건은 손으로 만져봐야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수부타이의 입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그렇게 물건을 잘 아는 놈이면 말이나 내놓아라.”
에센이 마지못해 고삐를 건네자 수부타이는 곧바로 말에 올랐고, 에센도 자신의 말 등에 올라 뒤를 따랐다.
칭기즈 칸의 게르에서 멀어질수록 평소와 비슷해 보이던 야영지 곳곳의 변화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게르 지붕 사이로 아침 연기가 피어올랐고, 여자들은 가죽 자루와 식량 꾸러미를 옮기고 있었다. 어린아이 하나는 덩치 큰 개를 피해 웃으며 달아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말들이 무심하게 풀을 뜯었다.
그런 익숙한 일상 사이로 전쟁 준비가 번지고 있었다.
말들이 끌려 나와 안장을 받았고, 활과 화살통을 든 사내들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뛰어다녔다. 전령이 진영을 가로질러 질주할 때마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서 새로운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에센은 그 광경을 보고도 자꾸만 수부타이의 허리춤을 흘끗거렸다.
“칸께서 아무 뜻도 없이 장군님께 단검을 주시지는 않았을 겁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면서 주셨습니까?”
“칼을 주는데 반드시 뜻까지 붙여야 하느냐. 필요할 때 쓰라고 주셨겠지.”
“분명히 다른 뜻이 있었을 겁니다. 장군님도 마음에 드셨으면서 왜 자꾸 숨기십니까?”
수부타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 에센을 돌아봤다.
“단검은 내가 받았는데 어째서 네가 더 들떠 있는 것이냐?”
에센은 대답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자기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냥 좋았다.
어릴 때부터 수부타이 곁에 있었기에 에센만 알아차릴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수부타이는 자신의 감정을 입으로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칭기즈 칸의 이름을 말할 때면 목소리가 아주 조금 달라졌고, 전투에서 이겼을 때보다 칸에게 직접 인정을 받은 날 더 오랫동안 말이 없어지곤 했다.
그래서 에센은 자신이 보고 느낀 그대로 말했다.
“장군님이 좋아하시니까 저도 좋은 겁니다. 입으로 말씀하지 않으셔도 보면 압니다.”
수부타이는 앞을 바라본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말의 옆구리를 찼다.
말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장군님!”
에센도 급히 뒤쫓았다.
“대답하기 싫다고 도망가시면 어떡합니까!”
“시끄럽다!”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에센은 웃었다.
수부타이는 끝내 뒤돌아보지 않았다.
───
그날 저녁에도 진영에는 출정을 준비하는 소리가 남아 있었다.
말을 옮기는 소리와 가죽끈을 조이는 소리가 멀리서 이어졌고, 밤바람이 게르의 펠트 벽을 밀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화덕의 불길은 거의 잦아들었지만 붉은 숯 사이에서는 아직 뜨거운 열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수부타이는 화덕 옆에 앉아 허리에서 단검을 풀어 내려놓았다.
에센은 기다렸다는 듯 옆으로 다가갔다.
수부타이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손부터 내밀면 이번에는 더 세게 맞는다.”
“안 만집니다. 가까이에서 보기만 하려는 겁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에센의 손끝은 이미 단검 가까이 다가가 있었다.
“에센.”
낮게 불린 이름에 손이 그대로 멈췄다.
수부타이는 잠시 에센을 바라보다가 단검을 집어 검집에서 천천히 뽑았다.
스르릉.
불빛이 새 칼날을 타고 미끄러지자 에센의 눈도 그 빛을 따라 움직였다.
“좋은 칼입니까?”
수부타이는 날의 두께와 균형을 확인하듯 단검을 한 번 기울였다.
“잘 만든 칼이기는 하다. 하지만 사람을 죽이는 데 특별히 좋은 칼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어디를 찌르느냐가 더 중요하지.”
에센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조금 사라졌다.
수부타이는 그 변화를 보았지만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에센은 피를 좋아하지 않았다.
짐승을 잡는 날이면 다른 아이들은 가까이 몰려들었지만 에센은 피비린내를 견디지 못하고 몇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다친 말은 밤새 곁을 지키며 돌보면서도 사람의 상처에서 피가 솟는 모습을 보면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수부타이는 그런 에센을 한 번도 비웃지 않았다.
억지로 칼을 쥐여 사람을 죽이는 법부터 가르치지도 않았다. 대신 말의 다리를 보게 했고, 발굽을 살피게 했으며, 안장과 고삐가 얼마만큼의 충격을 버틸 수 있는지 익히게 했다.
전쟁터까지 데리고 다녔지만 굳이 전사로 만들지는 않았다.
수부타이가 단검을 뒤집자 손잡이 아래에 새겨진 작은 글자가 불빛을 받았다.
에센이 몸을 가까이했다.
“거기에는 뭐라고 쓰여 있습니까?”
“내 이름이다.”
에센의 눈이 커졌다.
“장군님 이름을 칸께서 직접 새기게 하신 겁니까?”
“그렇다. 내가 내 이름까지 새겨놓고 칸께 받았다고 거짓말을 하겠느냐?”
수부타이가 단검을 내밀었다.
에센은 얼른 받으려다가 낮에 맞은 손등을 떠올리고 동작을 멈췄다.
“이번에는 정말 만져도 되는 겁니까?”
“싫으면 그만두고.”
에센은 두 손을 내밀었다.
단검의 무게가 손바닥 위에 얹혔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 만져보고 싶다고 떠들던 아이가 막상 받아 들자 숨소리까지 조심스러워졌다. 생각보다 묵직한 무게를 양손으로 받친 채 칼날과 검집을 번갈아 살핀 뒤 다시 손잡이 아래의 각인으로 시선을 옮겼다.
글자를 온전히 읽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저 홈이 수부타이의 이름이라는 사실은 알았다.
에센의 엄지가 각인의 거친 표면을 조심스럽게 훑었다.
“이건 잃어버리시면 안 됩니다. 다른 물건처럼 어디에 두었는지 잊으시면 제가 찾아낼 수도 없지 않습니까.”
수부타이가 눈썹을 조금 들어 올렸다.
“네가 내 어미라도 되느냐?”
“제가 챙기지 않으면 잃어버리시니까 그렇습니다. 지난겨울에 화살촉 주머니를 어디에 두셨는지도 기억하지 못하셨잖습니까.”
수부타이의 표정이 잠시 멈췄다.
에센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맞지요?”
수부타이가 손을 내밀었다.
“그만 떠들고 내놔라.”
에센은 단검을 품 쪽으로 살짝 당겼다.
“차라리 제가 가지고 다니면 어떻습니까? 필요하실 때마다 바로 드리겠습니다.”
수부타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에센.”
에센은 더 버티지 않고 단검을 돌려줬다.
수부타이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칼을 검집에 넣은 뒤 허리춤에 단단히 고정했다. 에센은 못마땅한 얼굴로 그 과정을 끝까지 지켜봤다.
“앞으로 제가 매일 확인할 겁니다. 허리에 붙어 있는지만 볼 테니 그것까지 막지는 마십시오.”
“마음대로 해라. 단, 확인한다는 핑계로 손을 대면 손등이 한 번 더 아플 것이다.”
밖에서 말 한 마리가 낮게 울었다.
화덕의 불빛이 흔들리며 수부타이의 허리춤을 한 차례 훑었고, 에센은 모포 위에 누워 눈을 감으려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희미한 불빛 아래 검집의 실루엣이 보였다.
“아직 있습니다.”
수부타이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하루가 다 가기 전에 네 입부터 잃어버렸으면 좋겠구나. 그만 자라.”
에센은 작게 웃었다.
그제야 눈을 감았다.
───
다음 날 새벽.
에센은 말 울음소리에 눈을 떴다.
평소에도 말은 울었다. 그러나 그날은 멀리서 시작된 울음이 가까운 말들에게 옮겨지고, 다시 다른 곳에서 이어지며 거대한 야영지 전체로 번져갔다. 수천 마리의 말이 서로를 깨우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게르 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후려쳤다.
해는 아직 지평선 아래에 있었지만 진영은 이미 깨어 있었다.
게르 사이로 횃불이 끊임없이 오갔고, 줄지어 끌려온 말들의 등에 안장이 올라가자 여러 사람의 손이 복대를 단단히 조였다. 활시위를 당겨 탄력을 확인하는 손들이 쉴 새 없이 움직였으며, 비어 있던 화살통에는 화살이 빽빽하게 채워졌다.
말린 고기와 굳힌 젖, 가죽 물통이 짐꾸러미 안으로 들어갔고, 수레 곁에 쪼그려 앉은 사람들은 바퀴와 축을 두드려 금이 간 곳이 없는지 살폈다. 예비마들은 몇 마리씩 나뉘어 묶였으며, 어제 아이들이 뛰어다니던 자리에는 무장을 마친 전사들이 모여들었다.
“백호장께 전해!”
전령 하나가 말을 박차고 지나갔다.
다른 쪽에서는 십호마다 말과 무장을 다시 확인하라는 고함이 터졌다.
전날 아침 칸의 게르로 들어간 전령이 무슨 소식을 가져왔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소식이 만들어낸 움직임은 초원 전체에 남아 있었다.
출정이었다.
에센의 잠이 완전히 달아났다.
그는 곧장 말들 사이로 들어가 수부타이가 탈 말부터 살폈다. 등을 쓸어보고 앞다리를 훑은 뒤 발굽을 하나씩 들어 확인했으며, 안장 아래에도 손을 집어넣어 털이 뭉치거나 살갗이 쓸리는 곳이 없는지 살폈다.
그다음에는 예비마들이었다.
에센은 말들을 차례로 걷게 하며 걸음과 다리의 상태를 확인했다. 먼 길을 버티기 어려워 보이는 네 마리를 따로 세워둔 뒤, 다음 말을 몇 걸음 걷게 하다가 다시 고삐를 당겼다.
“이 말은 빼야 합니다.”
말을 끌고 온 병사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에센을 바라봤다.
“어디 하나 다친 곳도 없는데 무슨 소리냐?”
에센은 대꾸하지 않고 오른쪽 뒷다리를 훑어 발굽을 들었다 놓은 뒤, 다시 말의 걸음을 확인했다.
“지금은 멀쩡해 보여도 오른쪽 뒷다리에 힘을 줄 때마다 걸음이 조금 짧아집니다. 오늘 하루만 움직일 거라면 몰라도 먼 길을 갈 예비마로는 쓸 수 없습니다.”
병사가 몸을 숙여 다리를 살폈으나 눈에 띄는 상처는 없었다.
“이 정도로 말을 빼기 시작하면 남는 말이 있겠느냐?”
“다친 뒤에 버리는 것보다 지금 바꾸는 편이 낫습니다. 전투가 시작된 다음에 절뚝거리면 사람까지 죽습니다.”
병사가 다시 반박하려던 순간 뒤에서 수부타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바꿔야 할 말이 몇 마리냐?”
에센이 따로 세워둔 말들을 가리켰다.
“제가 살핀 말 가운데 다섯입니다. 이 말까지 다섯 마리는 장거리 행군에 맞지 않습니다.”
“당장 바꿀 수 있는 것은 세 마리다. 나머지 둘도 반드시 빼야 하느냐?”
에센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네 마리까지는 바꿔주셔야 합니다. 이 말은 벌써 걸음이 짧아졌습니다. 나머지 한 마리는 상태가 덜하니 짐을 줄이고 따로 살피겠습니다.”
수부타이는 말들과 에센을 번갈아 보더니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라.”
그는 더 말하지 않고 지나갔다.
옆에 있던 병사는 입을 벌린 채 에센을 바라봤다.
“너 지금 천호장과 말의 숫자를 놓고 흥정한 거냐?”
에센은 다시 예비마의 발굽을 들어 올렸다.
“말은 제가 더 잘 아니까요.”
병사가 헛웃음을 흘렸고 에센도 따라 웃었다.
하지만 고개를 들자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밤과 낮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초원에서 수많은 사람이 같은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말을 먹이고, 안장을 조이고, 화살을 세고, 물을 채우며 가져갈 것과 두고 갈 것을 가려냈다.
처음에는 모두 제각각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조금만 오래 바라보면 그 안에 질서가 있었다. 열 명의 전사와 그들을 이끄는 십호장이 하나의 무리가 되었고, 그런 무리 열 개가 다시 백호장의 지휘 아래 묶였다. 천호장은 열 개의 백호를 움직였으며, 전령들은 그 사이를 쉴 새 없이 오가며 한 사람의 명령을 수백, 수천 명의 움직임으로 바꾸었다.
깃발 하나가 이동하면 수십 명의 자리가 함께 바뀌었고, 뿔나팔의 소리가 달라지면 말머리들이 일제히 같은 방향으로 돌아갔다.
흩어진 사람들을 하나의 몸처럼 움직이는 방식이 있었다.
몇 해 전만 해도 서로 다른 칸을 따르며 싸웠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말머리는 모두 남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초원과 전혀 다른 세상이 있었다.
높은 성벽과 넓은 농경지, 수많은 백성과 군대를 거느린 금나라.
몽골과 금은 처음 만나는 사이가 아니었다. 둘은 오랫동안 싸우고 거래했으며, 금나라는 때로 초원의 부족들을 서로 견제하게 만들어 어느 한 세력도 지나치게 강해지지 못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제 금나라가 상대해야 할 것은 이전처럼 따로 움직이는 부족들이 아니었다.
1211년.
칭기즈 칸의 군대가 남쪽으로 향할 채비를 마치고 있었다.
───
동쪽 하늘이 밝아질 무렵 수부타이 주변으로 지휘관들이 모였다.
에센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말고삐를 잡고 그 모습을 바라봤다.
조금 전 자신과 예비마의 숫자를 놓고 흥정하던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 자리에 천호장이 서 있었다.
정찰대를 보낸 백호장이 수부타이 앞에 멈춰 섰다.
“세 개 조가 먼저 출발했습니다. 어제 확인한 길을 따라 남쪽 능선과 물이 있는 골짜기를 다시 살피게 했습니다.”
수부타이는 정찰대의 수보다 그들이 무엇을 확인했는지부터 물었다.
“어제 그 골짜기에 물이 있었다는 보고는 들었다. 하지만 오늘도 마실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길의 상태만 보지 말고 주변의 발굽 자국과 배설물도 확인하게 해라. 먼저 지나간 말이 많았다면 물의 양과 상태가 달라졌을 것이다.”
백호장의 얼굴에 긴장이 스쳤다.
“지금 즉시 전령을 보내 다시 확인시키겠습니다.”
“정찰대를 내보냈다는 사실로 일을 끝냈다고 생각하지 마라. 돌아온 자가 무엇을 보았는지, 보지 못한 것은 무엇인지까지 네가 알아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백호장이 물러나자 예비마 배치를 맡은 지휘관이 앞으로 나왔다.
“예비마는 천호 전체에 배치하고 있습니다. 뒤에서 한꺼번에 관리하면 이동이 편할 것 같아 대열 후방으로 모으는 중입니다.”
수부타이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뒤에 몰아놓지 말고 각 백호에 나눠라. 전투가 시작된 뒤 지친 말을 바꾸겠다고 대열을 거슬러 후방까지 달리는 자가 나오면 적과 싸우기도 전에 우리끼리 길을 막게 된다. 각 백호장이 자기 말의 수와 상태를 바카라임지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전투가 시작되고 나서 예비마가 어디 있는지 묻는 놈이 나오면 내가 먼저 걷어찰 것이다.”
주변에서 작은 웃음이 났다.
수부타이의 표정은 그대로였다.
“농담이 아니다.”
웃음이 금세 사라졌다.
에센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수부타이는 늘 그랬다.
싸움이 시작되기 전에는 싸움보다 다른 것들을 더 많이 물었다.
물이 어디에 있는지.
말이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어느 길이 빠르고, 비가 내리면 어느 땅이 먼저 진창으로 변하는지.
어디에서 능선이 낮아지고, 어느 골짜기에서 기병의 속도가 떨어지는지.
어린 에센은 한때 그것이 이상했다. 싸우러 가는 사람이 칼과 활보다 물과 땅 이야기를 더 오래 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적부터 보았다.
수부타이는 그 전에 땅과 말을 보았다.
지휘관들이 각자의 자리로 흩어진 뒤 수부타이가 에센을 불렀다.
에센은 말을 끌고 다가가 고삐를 건넸고, 수부타이가 등자에 발을 걸어 안장에 오르자 마지막으로 복대를 한 번 더 당겨봤다.
단단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수부타이의 허리춤을 확인했다.
단검이 있었다.
수부타이가 그 시선을 알아차렸다.
“어제부터 도대체 몇 번을 확인하는 것이냐?”
“잃어버리는 데 하루씩이나 필요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말과 단검은 제가 확인할 테니 장군님은 전쟁이나 살피십시오.”
수부타이는 잠시 에센을 내려다봤다.
“네 말부터 챙겨라.”
에센은 웃으며 자기 말 쪽으로 갔다.
그때 뿔나팔 소리가 길게 울렸다.
낮고 묵직한 소리가 차가운 새벽 공기를 밀어내자 가까이 있던 기병들이 먼저 말머리를 돌렸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깃발 하나가 앞으로 기울었다. 그 신호를 따라 다른 무리들이 차례로 길을 잡으며, 수부타이가 맡은 천호의 대열도 거대한 몸을 일으키듯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람보다 말이 훨씬 많았다.
전사마다 갈아탈 예비마를 여러 마리씩 데리고 있었기에 행렬은 사람의 수보다 몇 배나 길어졌다. 빈 안장을 얹은 말들이 서로 목을 부딪쳤고, 몇 마리씩 이어 묶인 예비마들이 방향을 바꿀 때마다 가죽끈과 고삐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뒤에서는 수레와 가축 떼가 움직였다.
화살과 식량, 물이 군대와 함께 길을 나섰으며, 전령들은 대열 사이를 비스듬히 가로질러 질주했다. 명령 하나가 내려올 때마다 깃발의 위치가 달라지고, 백호 하나가 속도를 늦추거나 방향을 틀었다.
에센은 문득 야영지의 끝을 찾아봤다.
보이지 않았다.
앞쪽 기병들은 벌써 낮은 구릉을 넘어가고 있었지만, 뒤에서는 아직도 말과 사람들이 게르 사이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수천 개의 발굽이 땅을 두드렸다.
처음에는 제각각이던 소리가 겹치고 또 겹치면서 하나의 낮고 무거운 진동으로 변했다.
두두두두두두—
말의 다리를 타고 올라온 떨림이 에센의 허벅지와 허리까지 전해졌다.
한때 서로 싸우며 말과 가축을 빼앗고, 상대의 가족을 죽이며 살아온 사람들이 이제 같은 깃발 아래 남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에센의 부모를 앗아간 것과 다르지 않은 싸움을 계속하던 사람들이 한 사람의 명령에 따라 하나의 군대가 된 것이다.
에센에게는 그 광경 자체가 칭기즈 칸이라는 이름보다도 더 거대하게 느껴졌다.
앞쪽에서는 수부타이가 말을 움직이고 있었다.
주변에 모여 있던 백호장들이 각자의 부대로 흩어졌고, 수부타이가 손을 한 번 들자 한쪽 대열의 속도가 늦춰졌다. 전령 하나가 앞으로 질주한 뒤에는 멀리 떨어진 백호가 방향을 틀어 벌어진 간격을 메웠다.
천 명의 사람과 그보다 몇 배나 많은 말이 한 사람의 판단을 따라 움직였다.
에센은 그 모습을 한동안 바라봤다.
어젯밤에는 단검을 만지겠다는 자기 손을 때리려던 사람이었다.
끼니를 거르고, 화살촉 주머니를 어디에 두었는지도 잊은 채 태연하게 굴어 에센이 뒤를 따라다니며 챙겨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말 위에 올라 지휘관들에게 둘러싸이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에센이 먹을 것과 말을 챙겨줘야 하는 수부타이와, 천 명의 전사와 수천 마리의 말을 움직이는 천호장이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이 가끔은 낯설었다.
“에센!”
고함이 날아왔다.
에센이 정신을 차렸다.
“예!”
“거기서 뭘 보고 있느냐! 대열에서 떨어지기 전에 따라와라!”
에센은 곧바로 말의 옆구리를 찼다.
“갑니다!”
조랑말이 앞으로 치고 나가 거대한 행렬 속으로 들어서자 시야가 사람과 말로 가득 찼다. 가죽 갑옷이 움직일 때마다 거친 마찰음이 났고, 화살통 속의 화살들은 서로 부딪치며 마른 소리를 냈다. 말의 뜨거운 숨은 찬 공기 속에서 희게 피어올랐다.
뒤를 돌아보자 진영이 점점 낮아지고 있었다.
게르들이 언덕 너머로 하나씩 사라졌지만 행군의 앞은 끝이 없었다. 언덕 하나를 넘으면 앞서간 기병대가 다시 나타났고, 그 너머에는 또 다른 말과 깃발이 움직였다. 대열은 초원의 굴곡을 따라 갈라졌다가 다시 합쳐졌으며, 선두에서 피어오른 먼지가 바람을 타고 길게 번졌다.
에센은 금나라가 얼마나 큰 나라인지 몰랐다.
그곳의 성벽이 얼마나 높고, 얼마나 많은 군대가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에게 금은 아직 먼 땅의 이름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해야 할 일만큼은 알고 있었다.
말이 지치면 갈아탄다.
발굽이 상하면 멈춰 세운다.
수부타이가 먹는 것을 잊으면 챙긴다.
상처를 입으면 돌본다.
에센의 시선이 다시 수부타이의 허리춤으로 내려갔다.
단검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앞서가던 수부타이가 뒤를 돌아봤다.
“에센, 내 곁에서 떨어지지 마라.”
에센은 웃으며 말의 속도를 높였다.
“장군님이나 제 곁에서 떨어지지 마십시오. 또 뭘 잃어버리시면 제가 찾아야 하지 않습니까!”
수부타이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에센을 한 번 바라본 뒤 다시 앞을 향했다.
에센은 웃으며 그의 뒤를 따라갔다.
두 사람 앞에서 수천의 기병과 그보다 훨씬 많은 말들이 초원을 덮은 채 남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발굽 아래에서 땅이 울렸고, 떠오른 먼지가 아침 햇빛을 흐렸다.
그 너머에 금나라의 땅이 있었다.
전쟁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제8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