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신의 로그》
PART 2 — 〈HLP〉
제5화 〈흔적〉
뜨겁고 습한 공기가 얼굴을 덮쳤다.
현승은 기체의 발판을 내려서며 무너진 산비탈을 올려다봤다. 비는 그쳤지만 대기는 아직 물기를 잔뜩 머금고 있었고, 햇볕에 달궈지기 시작한 흙에서는 젖은 돌과 진흙이 뒤섞인 냄새가 올라왔다.
그가 입은 재킷의 가슴과 등에는 같은 세 글자가 박혀 있었다.
HLP.
그 아래에는 조금 작은 글씨로 정식 명칭이 새겨져 있었다.
HUMAN LEGACY PROJECT.
21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문화유산을 지키는 일은 더 이상 한 나라의 힘만으로 감당하기 어려워졌다. 해수면이 높아지면서 해안의 유적들이 조금씩 물에 잠겼고, 달라진 강수 패턴은 이전에는 좀처럼 비가 내리지 않던 지역에 폭우를 쏟아부었다. 수천 년 동안 단단한 지층 아래 묻혀 있던 유적이 하룻밤 사이에 노출되는가 하면, 오랜 세월을 버텨온 성벽과 무덤이 홍수와 산사태에 흔적도 없이 무너지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전쟁은 자연보다 훨씬 빠르게 과거를 없앴다. 도시가 폭격을 받을 때 박물관이라고 비켜가는 법은 없었고, 국가의 통제가 무너지면 유물은 가장 먼저 암시장으로 흘러들었다. 무엇을 잃었는지 기록이라도 남으면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존재했다는 사실조차 확인하지 못한 채 사라져 버린 것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결국 여러 나라가 유엔의 보호체계 아래 하나의 협약으로 묶였다.
문화유산의 소유권은 그것을 가진 국가에 남겨두되, 대규모 자연재해나 전쟁으로 보존 능력을 넘어서는 위기가 닥치면 국제슬롯가 공동으로 조사하고 구조한다.
그 체계의 현장 조직이 HLP였다.
총탄이 오가는 분쟁 지역에서도 협약에 따라 지정된 HLP 조사구역과 수송로는 보호 대상이 되었다. 살아 있는 사람을 구하는 적십자와 비슷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차이가 있다면 그들이 찾아다니는 것은 이미 죽은 사람들이 남긴 것이었다.
집 한 채의 터나 깨진 항아리, 읽을 수 없는 글씨 몇 줄, 때로는 이름조차 남지 않은 뼈까지.
사람은 사라져도 흔적은 남았다. HLP가 지키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현승이 시선을 들었다.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 산사태의 규모가 훨씬 컸다. 도로 한쪽은 토사에 완전히 파묻혀 있었고, 복구 작업에 쓰였던 중장비들은 진흙이 굳기 시작한 사면 아래에서 그대로 멈춰 있었다. 통제선 바깥에는 밤새 현장을 지킨 듯한 복구 작업자와 경찰들이 모여 있었으며, 그 안쪽의 임시 조사구역에는 천막과 관측 장비, 이동식 분석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그러나 붉은 경고선 너머는 풍경이 전혀 달랐다.
사람이 없었다.
멀리서 보면 인간과 구별하기 어려운 형체들이 젖은 흙 위에 흩어져 움직이고 있었다. 하나는 무릎을 낮추고 작은 도구로 사면의 표면을 걷어냈고, 다른 하나는 노출된 지층을 따라 천천히 이동하면서 광학 센서로 단면을 기록했다. 조금 더 위쪽의 가파른 비탈에서는 두 기가 돌 사이에 몸을 고정한 채 지반 변화를 측정하고 있었다.
조사용 안드로이드들이었다.
현승과 노라가 천막 쪽으로 다가가자 현장 출입증을 목에 건 남자가 이쪽을 발견하고 걸어왔다.
오십 대쯤 되어 보였다. 눈가에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사람 특유의 피로가 깊게 내려앉아 있었고, 셔츠 소매에는 튀르키예 문화유산 당국의 표식이 붙어 있었다. 바짓단과 신발은 진흙으로 굳어 있었으며, 햇볕이 올라오기 시작했는데도 옷에서는 아직 비 맞은 천 냄새가 났다.
그가 현승의 재킷에 새겨진 글자를 확인했다.
“HLP에서 오셨습니까?”
“천현승입니다.”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에르뎀 데미르입니다. 현장 바카라임을 맡고 있습니다.”
거칠어진 두 손이 짧게 맞잡혔다.
데미르의 시선이 현승의 어깨 너머에 서 있던 노라에게로 향했다.
“노라입니다.”
노라가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데미르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과 거의 다르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HLP 관계자라면 그녀가 무엇인지 설명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이쪽으로 오시죠.”
데미르가 앞장서 진흙탕 사이로 난 임시 통로를 걸었다.
현승은 무너진 사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뒤따랐다.
“최초 발견 지점은 그대로 보존돼 있습니까?”
“가능한 한 손대지 않았습니다.”
“가능한 한?”
데미르가 걸음을 늦췄다.
“산사태 직후에는 도로를 뚫는 게 먼저였습니다. 중장비로 토사를 걷어내던 중에 뼈와 인공물로 보이는 것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작업반장이 이상하다고 판단해서 보고했습니다. 문화유산일 가능성을 확인한 뒤에는 장비를 전부 세웠습니다.”
“안드로이드 세 기가 전손됐다고 들었습니다.”
데미르의 시선이 사면 위쪽으로 향했다.
“작업을 중단한 뒤 두 번째 붕괴가 왔습니다. 사람이 들어가 있었으면 지금 여기는 발굴 현장이 아니라 사고 수습 현장이었겠죠.”
현승도 고개를 들어 산을 바라봤다. 한 번 크게 떨어져 나간 사면의 상부에서는 여전히 물을 머금은 흙이 가느다란 줄기를 만들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뒤로는?”
“인간은 한 명도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데미르가 사면을 따라 표시된 붉은 선을 가리켰다. 지반 센서가 계산한 변위와 토양 수분, 예상 붕괴 범위가 수치와 함께 끊임없이 바뀌고 있었다.
“지금도 움직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작은 붕괴가 두 번 있었고요.”
마침 붉은 경계선을 따라 걷던 조사용 안드로이드 한 기가 멈춰 섰다. 잠시 사면을 올려다본 기체는 누구에게 보고하거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방향을 바꿔 위험구역 안쪽으로 들어갔다.
현승은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저 안부터 인간 출입 금지입니다.”
데미르의 말에 현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고는 옆에 선 노라를 바라봤다.
“들었지?”
“네.”
“무리하지 마.”
노라의 눈이 현승에게 머물렀다.
“저는 안드로이드입니다.”
“알아.”
현승이 피식 웃었다.
“그래도 네 수리비 청구서를 보면 내가 먼저 쓰러질 거야.”
노라가 잠깐 그를 바라봤다.
“걱정하시는 방식이 독특하네요.”
“걱정 아니야. 예산 문제야.”
“그렇게 해두죠.”
노라는 몸을 돌려 붉은 경계선을 지나갔다.
현승은 그녀가 젖은 사면 쪽으로 향하는 것을 확인한 뒤 데미르와 함께 임시 조사실로 들어갔다.
천막 안쪽의 대형 화면에는 현장 자료가 끊임없이 쌓이고 있었다. 산사태 이전의 지형과 현재 지형이 입체 영상으로 겹쳐 있었고, 그 위에는 지표 스캔 결과와 붕괴 방향, 노출된 퇴적층의 위치가 각기 다른 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데미르가 화면 일부를 확대했다.
“현재까지 확인된 범위입니다.”
수십 개의 표식 가운데 네 곳이 먼저 강조됐다.
“사람의 뼈로 추정되는 지점이 네 곳. 나귀를 포함한 동물 골격은 여섯 곳 이상입니다.”
“인공물은?”
“토기 조각과 금속성 물체가 여러 곳에서 확인됐습니다. 섬유나 결박재가 남긴 것으로 보이는 흔적도 있고요. 아직 대부분 제자리에서 기록만 하고 있습니다.”
현승은 입체로 재구성된 사면을 천천히 돌려봤다.
“같은 사건으로 묻힌 것 같습니까?”
“아직 모르겠습니다.”
현승이 그제야 데미르를 한 번 돌아봤다.
“마음에 드네요.”
“뭐가요?”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는 거.”
데미르가 웃었다.
“그걸 알아내려고 HLP를 불렀습니다.”
현승도 입꼬리를 조금 올렸다가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노라.”
귀 뒤의 단말을 통해 곧바로 목소리가 들렸다.
“네.”
“현재 위치.”
푸른 점 하나가 지형도 위에 나타났다.
“2번 구역 사면에 진입했습니다.”
현승의 화면 한쪽에 노라의 광학 시야가 열렸다.
가까이에서 보는 사면은 더 복잡했다. 밤새 물을 먹은 황갈색 흙 사이로 검붉은 층과 회색빛 토질이 불규칙하게 드러나 있었고, 빗물이 파고 지나간 홈 사이사이에는 돌과 작은 파편들이 박혀 있었다.
안드로이드들은 서로 말하지 않았다. 한 기가 뼈 주변의 흙을 미세하게 걷어내면 다른 기체가 곧바로 노출면의 좌표와 깊이를 기록했고, 사면 위에서 들어오는 지반 데이터는 모든 조사 기체의 시스템으로 동시에 전달됐다. 인간이라면 몇 번씩 확인하고 지시해야 할 작업이 소리 한마디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현승이 말했다.
“노라, 유물이 아니라 층부터 봐. 이번에 흘러내린 흙하고 기존 퇴적층의 경계부터.”
“분석 중입니다.”
노라가 사면 가까이 몸을 낮추자 현승의 화면에 단면이 확대됐다.
이번 폭우에 밀려 내려온 흙은 입자도 거칠고 뒤섞임이 심했다. 그 아래로는 훨씬 단단하게 눌린 오래된 퇴적층이 이어졌고, 일부 구간에서는 그 경계가 산사태의 충격으로 찢기고 밀려 복잡하게 휘어져 있었다.
현승은 화면을 확대했다가 다시 축소하며 출토 지점들을 하나씩 겹쳤다.
사람의 뼈와 나귀의 골격, 토기와 금속성 파편, 짐을 고정하는 데 사용됐을 법한 섬유성 흔적.
따로 보면 어느 하나도 특별한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다. 그러나 비슷한 깊이에서 일정한 배열을 가진 흔적이 반복되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어디에서 발견됐는가, 무엇과 함께 있었는가, 어떤 방향으로 쓰러져 있었으며 지층은 그 뒤 어떻게 움직였는가. 고고학에서 물건 하나만큼 중요한 것은 그 물건이 놓여 있던 자리였다.
현승의 시선이 한 좌표에서 멈췄다.
“노라, 4번 구역 가장자리로 이동해봐. 지금 위치보다 조금 위쪽, 왼편이야.”
노라가 진흙을 밟으며 사면을 오르자 광학 시야가 흔들렸고, 현승이 짚은 지점으로 천천히 돌아갔다.
현승은 저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무너진 토사 사이로 사람의 팔과 손으로 보이는 뼈가 비스듬히 드러나 있었는데, 손가락뼈가 모여 있는 바로 아래쪽의 흙에서 주변과 다른 흔적이 잡혔다.
“멈춰.”
노라가 자세를 낮췄다.
가죽으로 추정되는 유기물의 잔존 흔적이었다. 대부분은 썩어 흙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라졌지만, 좁은 범위 안에서 끈과 주머니의 형태를 짐작하게 하는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안쪽에서 전혀 다른 색이 모습을 드러냈다.
짙은 푸른빛이었다.
다른 조사용 안드로이드가 조명 각도를 바꾸자 흙 속에 모여 있던 작은 구슬 몇 알의 곡면이 드러났다. 깊은 청색의 표면에는 미세한 금빛 점들이 흩어져 있었다.
현승의 눈빛이 달라졌다.
“손대지 마.”
노라의 손이 그대로 멈췄다.
“주머니 흔적부터 잡아. 손뼈하고 상대 위치, 깊이, 섬유 잔존물, 주변 토질까지 전부.”
공간 정보가 화면 위로 빠르게 쌓이기 시작했다.
손가락뼈와 가죽의 잔존 흔적, 그 안쪽에 모여 있는 푸른 구슬들이 하나의 입체 영상으로 재구성됐다. 화면에서는 손뼈와 구슬이 바로 곁에 놓여 있었다. 처음부터 그 자리에 함께 묻혔는지, 이후 지층이 움직이면서 가까워졌는지는 더 살펴봐야 했다.
데미르가 옆에서 물었다.
“장신구입니까?”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현승은 푸른 구슬을 화면 가득 확대했다.
“청금석 같군요.”
“확실합니까?”
“색과 내포물은 맞아 보입니다. 저 금빛 점도 황철석일 가능성이 높고요. 그래도 성분 분석 전에는 확정하지 맙시다.”
데미르가 화면을 바라봤다.
“이 지역에서 나는 광물은 아니죠?”
“아니죠.”
청금석이라면 아나톨리아 중부에서 캐낸 돌은 아니었다. 아주 먼 지역에서 시작해 여러 교역망과 사람의 손을 거쳐 이곳까지 들어왔을 가능성이 컸다.
현승은 다시 손뼈와 구슬의 위치를 확인했다.
“같은 출토군으로 묶어. 다만 소유 관계는 미정.”
“이 정도로 가까이 있는데도요?”
“가까이 발견됐다는 것과 살아 있을 때 누구의 것이었는지는 다른 문제니까요.”
데미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전이 지나면서 사면은 조금씩 더 많은 흔적을 내놓았다.
나귀의 척추와 다리뼈가 이어져 드러났고, 눌리고 깨진 토기 조각과 심하게 부식된 금속 파편도 확인됐다. 사람의 뼈가 나온 지점에서는 늑골과 두개골 일부가 모습을 드러냈으며, 어떤 곳에서는 짐의 형태를 짐작하게 하는 결박 흔적이 뼈와 나란히 이어져 있었다.
현승은 발견되는 물건의 수보다 그 사이의 관계를 더 오래 들여다봤다. 유물 하나가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정확한 좌표와 깊이, 방향이 기록됐고, 주변 토질과 습도, 압력으로 생긴 변형까지 함께 저장됐다. 산사태가 원래 위치를 얼마나 흔들었는지 판단하려면 유물보다 흙을 먼저 읽어야 했다.
정오를 조금 넘긴 무렵 노라가 다시 현승을 불렀다.
“현승.”
“보고 있어.”
“3번 구역에서 인위적으로 빚은 점토 구조가 확인됐습니다. 별도의 보존 절차가 필요합니다.”
화면이 바뀌었다.
검붉은 흙 속에 손바닥보다 조금 큰 점토 덩어리가 비스듬히 박혀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주변 흙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표면 일부에는 자연적으로 생겼다고 보기 어려운 직선과 눌린 흔적이 남아 있었다.
현승이 몸을 바로 세웠다.
“점토판?”
“내부 구조를 먼저 확인하겠습니다.”
비접촉 단층 스캔이 시작됐다.
몇 초 뒤 점토 덩어리의 겉모습 위로 내부 영상이 겹쳐졌다.
현승의 눈썹이 올라갔다.
하나가 아니었다.
바깥쪽의 얇은 점토층 안에 또 하나의 평평한 점토 구조가 들어 있었다.
“봉투네.”
데미르가 화면 가까이 다가왔다.
“점토 봉투입니까?”
“고대 아시리아 문서에서 쓰던 방식입니다. 편지를 새긴 점토판을 말린 뒤 얇은 점토로 전체를 감싼 거죠. 겉면에는 받는 사람의 이름이나 봉인을 남겼고요. 입구가 있는 봉지가 아니라 판을 둘러싼 단단한 껍질입니다. 내용을 읽으려면 그 겉을 깨야 했죠.”
데미르는 흙 속에 박힌 점토 덩어리를 바라봤다.
“이 상태에서 안의 글씨를 읽을 수 있습니까?”
현승이 노라에게 물었다.
“가능해?”
“내부 표면의 압흔을 복원해보겠습니다.”
노라는 유물에 손을 대지 않았다.
다중 주파수 단층 영상과 미세 밀도 스캔이 겹쳐지면서 점토 봉투 안쪽에 갇혀 있던 판의 표면이 화면 위에서 천천히 펼쳐졌다. 처음에는 단순한 요철에 불과했던 흔적이 보정될수록 규칙을 갖기 시작했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눌린 작은 쐐기들이 하나씩 구별됐다.
조사실 안에서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어느 순간 잦아들었다.
노라가 말했다.
“문자 형태와 어휘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현승은 화면 한쪽을 빠르게 지나가는 비교 자료를 말없이 지켜봤다.
잠시 뒤 노라가 말했다.
“고대 아시리아어로 판단됩니다.”
데미르가 현승을 돌아봤다.
현승의 시선은 화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확률은?”
“현재 판독 가능한 문자 형태와 어휘를 기준으로 99퍼센트 이상입니다.”
이번에는 현승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아나톨리아 내륙의 산길. 사람과 나귀의 뼈, 장거리 이동을 짐작하게 하는 적재물, 먼 교역망을 거쳐 들어왔을 청금석, 그리고 고대 아시리아어로 쓰인 점토 문서.
흩어져 있던 조각들이 조금씩 같은 시대와 사람들을 가리키기 시작하고 있었다.
“연대 자료는?”
데미르가 물었다.
현승은 화면을 넘겼다.
“아직 확정할 단계는 아닙니다. 문자 형태와 층위는 고대 아시리아 교역기와 잘 맞고 있어요. 유기물 시료 분석까지 나오면 범위를 더 좁힐 수 있을 겁니다.”
데미르가 웃었다.
“또 아직입니까?”
“고고학자는 ‘아직’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이에요.”
“그렇다면 오늘 밥값은 충분히 하시겠군요.”
현승도 웃었다.
───
해가 서쪽으로 기울면서 임시 조사실 안으로 들어오는 빛도 조금씩 붉어졌다. 사면에서는 조사용 안드로이드들이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고, 현승 앞의 화면에는 하루 동안 확인된 자료들이 출토 위치와 층위에 따라 정리되어 있었다.
사람의 유골과 나귀의 골격, 적재물의 흔적, 토기와 금속 파편, 청금석으로 추정되는 구슬 장신구, 그리고 점토 봉투 안에 들어 있는 편지.
각각은 작은 흔적에 불과했지만 같은 매몰 범위 안에 놓고 보니 이동하던 사람들의 모습이 희미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현승은 복원된 지형 위에 고대 교역로 후보들을 겹쳤다.
“아슈르와 아나톨리아 사이를 오가던 상인들일 가능성이 꽤 높아졌네요.”
데미르가 화면을 보며 물었다.
“나귀 때문입니까?”
“그것만은 아니죠.”
현승은 여러 자료를 한 화면으로 모았다.
“고대 아시리아 상인들은 나귀에 직물과 주석 같은 상품을 싣고 아슈르에서 아나톨리아로 올라왔고, 이곳에서는 은을 비롯한 금속을 거래했습니다. 카네시는 그 교역망에서 가장 중요한 거점 가운데 하나였고요. 그 길이 지났을 가능성이 있는 산악지역에서 당시의 문자와 장거리 교역을 보여주는 물건, 사람과 나귀의 뼈가 함께 나오고 있습니다.”
데미르가 푸른 구슬을 가리켰다.
“저것도 그 증거가 됩니까?”
“청금석으로 확인된다면 교역망의 범위를 보여주는 증거는 될 수 있겠죠. 하지만 누구의 것이었는지는 아직 몰라요.”
“손에 쥐고 있었던 것 아닙니까?”
현승은 고개를 저었다.
“손뼈 가까이에 가죽주머니의 흔적이 있었고 그 안쪽에서 구슬이 나왔습니다. 우리가 확인한 건 거기까지예요. 산사태가 있었으니 매몰되는 순간 물건과 시신이 얼마나 움직였는지도 따져봐야 하고요.”
데미르가 잠시 화면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현승은 전체 분포를 다시 띄웠다.
사람과 나귀, 화물의 흔적은 산사면을 가로지르는 좁은 띠를 이루며 옛길 후보를 따라 길게 이어져 있었다.
“다만 이동 중이었다는 쪽에 무게가 실립니다.”
“어떤 점에서요?”
현승의 손가락이 유골과 적재물의 배열을 따라 움직였다.
“지금까지 드러난 범위에서는 집터 같은 정착 흔적이 없어요. 대신 사람과 나귀의 뼈, 적재물의 흔적이 옛길로 추정되는 선을 따라 이어져 있습니다. 이곳에 살던 사람들보다는 길을 지나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매몰됐을 가능성이 높아 보여요.”
“산사태?”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지금 무너진 사면을 보고 4천 년 전에도 똑같았을 거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당시 지형부터 복원해야 해요.”
데미르가 화면에 겹쳐진 옛길 후보들을 바라봤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던 사람들이었을까요?”
현승 역시 한동안 그 선들을 바라봤다.
“그것부터 찾아내야죠.”
조사실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현승이 시선을 돌렸다.
“노라, 편지는 어디까지 읽었어?”
“내부 판의 판독 가능한 영역은 대부분 복원됐습니다.”
“받는 사람부터.”
“아슈르나담.”
화면에 이름 하나가 나타났다.
아슈르나담.
현승에게는 처음 보는 이름이었다.
“보낸 사람은?”
“본문과 봉인 자료를 대조한 결과 라미시로 판단됩니다.”
그 아래에 또 하나의 이름이 생겼다.
라미시.
“내용은?”
“직물과 은의 정산에 관한 내용이 상당 부분을 차지합니다. 집안의 일과 귀환에 관한 개인적인 내용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현승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장사 이야기하다가 집에 좀 들어오라고 했겠군.”
“비슷합니다.”
“읽어봐.”
노라가 잠시 문장을 정리했다.
“마지막 부분입니다.”
그리고 차분한 목소리로 읽었다.
“‘이제는 정말 돌아올 때가 되지 않았나요.’”
현승의 표정이 아주 조금 달라졌다.
화면에는 쐐기 모양으로 눌린 작은 흔적들이 가득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산속의 흙과 구별하기 어려운 점토 덩어리에 불과했지만, 누군가 그곳에 말을 남겨두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같은 물건으로 보이지 않았다.
“4천 년이 지나도 별 차이가 없네.”
데미르가 웃었다.
“뭐가요?”
“밖에서 장사한다고 집에 안 들어오는 남편한테 하는 말.”
데미르도 웃었다.
“사람 사는 건 안 변하나 봅니다.”
현승은 잠깐 미소를 지었다가 다시 편지를 바라봤다.
“봉투 상태는?”
노라가 외부 점토층을 확대했다.
“파손은 있으나 봉인 구조 일부가 유지되어 있습니다. 내부 판과 외피의 위치 관계도 크게 흐트러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적어도 누군가 읽고 버린 편지는 아닐 가능성이 높겠군.”
“현재 상태는 운송 중 매몰되었을 가능성과 부합합니다. 다만 이것만으로 전달 여부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좋아.”
현승의 시선이 다른 화면으로 옮겨갔다.
푸른 구슬 장신구가 나온 곳.
점토 편지가 발견된 곳.
두 지점은 같은 산사태 매몰 범위에 있었지만 서로 떨어져 있었다. 구슬 쪽에서는 사람과 나귀의 뼈가 가까이 있었고, 편지가 나온 곳에서는 또 다른 나귀와 화물의 흔적이 이어졌다.
현승은 두 출토군을 하나의 화면에 올렸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노라.”
“네.”
“이 편지와 저 구슬 장신구를 같은 사람의 소유물이라고 볼 근거가 있어?”
“현재까지는 없습니다.”
“편지의 수신인은 아슈르나담이고?”
“네.”
“구슬 곁에서 나온 유골이 아슈르나담이라는 증거는?”
“없습니다.”
현승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분리해.”
화면 위에 임시로 겹쳐져 있던 두 출토군이 갈라졌다.
라미시가 편지를 보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아슈르나담에게 보내려 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편지가 실제로 아슈르나담의 손에 들어갔는지는 증명할 수 없었고, 구슬 장신구가 누구의 것이었는지 역시 아직 알 수 없었다.
4천 년 전 이 산길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현승에게 주어진 것은 몇 점의 유물과 뼈, 그리고 흙이 간직한 자리뿐이었다. 그 너머를 상상하는 것은 쉬웠지만, 증명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현승은 화면에 남은 두 이름을 다시 바라봤다.
라미시.
아슈르나담.
“우리가 아는 데까지만 가자.”
“알겠습니다.”
화면 위에서 푸른 구슬 장신구와 점토 편지는 서로 다른 출토군으로 남았다.
제5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