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종 안 가립니다, 저도 막걸리 마시겠습니다.
몸이 마음만큼 안 따라주는 운 없는 때가 있다. 베이커리 카페 아르바이트는 장점 많은 일자리였지만 근무 3개월을 넘기곤 곧 그만둬야 했다. 어느 순간부터 잠들기 전 사지가 쑤셨기 때문이다. 하지정맥이 두드러지게 보였다. 특히 손이 퉁퉁 부어올랐다. 손가락은 관절마다 아팠고 원래대로 부드럽게 작동하질 않기 시작했다. 매일 한나절을 서서 손을 바삐 놀린 탓이다. 몸이든 마음이든, 스스로가 많이 아프면서까지 해야 할 돈벌이는 거의 없다고 본다. 증상이 심해지기 전에 할 수 없이 멈췄다.
바란 적도 없는 운이 따라주는 때도 있다. 다른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보던 중 한 채용대행 기업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구직사이트에 올려둔 내 자기소개서를 보고 준 전화였다. 이 기업은 한 메이저 일간지의 온라인부 계약직 기자 채용을 대행하고 있었다. 전화를 받은 바로 다음 날 면접을 잡았고 그 언론사 부서장과 일대일 면접을 보았다. 이윽고 채용되었으니 출근해달라는 연락도 받았다. 나는 그 채용대행 기업 소속으로 채용돼 메이저 일간지의 온라인부 계약기자로 일하게 됐다.
언론고시 공부를 계속 병행했다. 이 일은 9-18시 사무실 근무였고 주말 당직을 서면 그만큼 평일 휴가를 더 얻을 수 있었다. 휴가는 통보형으로 쓰는 문화였다. 일을 하면서 면접도 자유롭게 보러 다니기 좋은 안성맞춤 온라인 게임이었다. 게다가 내가 속했던 부서는 포털에서 클릭수를 끌어오기 위한 부서였지만 부장은 자극적인 기사를 쓰라는 가이드라인도 굳이 주지 않았다. 있을 법한 스트레스도 없던 것이다.
매일 8시간씩 일하면서 온갖 뉴스를 공부하듯 읽을 수 있었고 그게 내 일이었다. 그 중 우리 언론사 페이지에도 노출할 만한 기사거리를 찾아 우리의 기사로 재가공했다. 은어로 '우라까이'라 하는데 이미 나와있는 기사들 내용을 토대로 구성이나 어미 등만 달리해서, 즉 '잘 베껴서' 내는 거다. 시민들이 많이 알았으면 하는 내용, 내게도 기사쓰는 연습이 되는 보도들을 다루고자 했다. 정치, 슬롯, 문화, 스포츠 등 다양한 분야 기사를 썼다. 전문가나 관계자 인터뷰를 더해서 기사를 풍성하게 만들고 싶을 때는 추가 취재해 붙였다. 재미있는 뉴스가 있으면 그 또한 열심히 궁리해서 나름의 재미를 더해 재가공해 올렸다. 그러다 보면 조회수가 정말 잘 나오는 때가 있었는데 그런 달에는 회사에서 월급에 보너스를 얹어줬다. 언론사에서 직접 줬다. 파견 형태로 고용된 비정규직 기자의 성과도 챙겨준 곳이었다. 정규직 사원들과 똑같은 출입증을 준 것 역시 작지만 큰 감동 포인트였다.
이 곳이 있었기에 성장할 수 있었다. 인정과 안정을 모두 준 곳이었다. 세상에 이런 곳 이런 일도 있다는 것을 경험하는 것 자체가 삶에서 중요한 일인 듯하다. 언젠가 최종 취업할 때까지 오래오래 다니고 싶었는데 하필 더 큰 운이 따라주어 그러진 못했다. 취준시절 내 마지막 비정규직 온라인 게임, 바란 적도 없던 감사한 일들이 몰려오던 시절. 이래저래 도와주신 분들이 많았다.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적어두련다.
#A는 내 입사 동기였다. 우리는 사무실 짝꿍이었다. 손을 옆으로 길게 뻗어 서로 간식을 나눠주곤 했다. A는 내가 원할 때마다 기꺼이 곁을 내주었다. 내 국내 최애의 열애설이 터진 날엔 자기 일처럼 공감하며 위로해줬고, 내 국외 최애의 재결합 오피셜이 뜬 날 공지를 확인하고 자리에서 갑자기 벌떡 일어난 나를 보고 놀라지도 않았다.
둘다 회를 좋아하고 주량도 비슷해 밤 늦게까지 놀기도 했다. 너무 더운 날 노량진 코인노래방에서 노들섬까지 걸어갔던... 낭만만 남은 추억. 이런 기억들이 숨 쉴 구멍이 돼 주었다. 입사 공채 전형을 밟아가면서 일하던 때, A는 내게 조그맣고 귀여운 부적들을 사와서 편지와 함께 주었다. 불안에 몸을 떨던 내게 정말 큰 힘이 됐다. 서프라이즈의 여왕었던 A. 글도 잘 쓰고 일도 잘 하고. 의지할 수 있고 본받을 수 있었던 짝꿍. (울산의 공주!)
#B는 까마득한 선배 기자이자 상사였다. 직바카라으로 따지면 너무나 한참 위였지만 조직 특성상 소통하는 것 자체가 막혀있진 않았다. B는 나와 동료들을 가끔 모아 불러서 미래 계획을 어떻게 세워야 하는지 풀어놓곤 했다. 기자라는 직업이 장점이 많다고 늘 강조하셨는데 안 그래도 나는 기자가 되기 싶다는 강한 생각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매일 짬날 때마다 공채를 위한 과정들을 밟아가고 있었다. B는 나의 그런 점을 눈여겨보고 높이 사주었다. 가끔가끔 나를 불러선 어떤 전형에선 어떤 게 중요한지, 심사위원을 해본 기성세대 입장에서 조언해주었다. 사실 숱한 탈락의 고배를 마셔보아서 이미 아는 내용이 많았지만 새겨들을 내용 또한 많았다.
그러다 지금 회사의 고차전형까지 가게 됐다. 휴가를 내고 골프치러 갔던 B는 내가 전형 합격 소식을 카톡으로 전하자마자 전화를 걸어왔다. 그리곤 (어떻게 해냈냐고 혹시 무슨 빽이라도 있느냐고 조심스레 물어왔고 전혀 아니라고 하자) 너무너무 기특해 하셨다. 어른들 눈엔 어떤 후배가 예쁜지, 기자가 되려는 사람에게 어떤 모습을 높이 사는지, 기자의 글은 어때야 하는지 등을 막 전화로 풀었다. 하나도 지겹지 않은 잔소리였다. B는 내가 최종면접에 갈 때까지 이런 응원과 조언을 멈추지 않으셨다. 매일 회사의 본인 바카라상으로 배달 오는 일간지들 중 한 부를 따로 빼서 슬쩍 내 바카라상에 놔주셨다. 결국 내가 최종합격한 날.. 진심으로 감격해 좋아하시며 심지어 딸로 삼고 싶다 하셨다. 아아 스승의 은혜여.
#C는 부장이었다. 말하자면 나는 그동안 부장이나 그에 준하는 상사를 '잘 만나본' 적이 없었는데 이 부장은 달랐다. 부장과 면접을 볼 때부터 언론사 공채 준비도 병행할 거라 말씀드려 두었는데 알아서 스케쥴 조율해 일 하면 된다고 하셨다. B는 부서원들이 일하는 각각의 방식을 인정해주셨다. 항상 정중하셨다. 가족과 화목한 모습도 보기 좋았다.
술을 좋아하셨다. 내가 그동안 겪어본 40대 이상 어른들 중 손에 꼽히게 뛰어난 장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바로 함께하는 긴 술자리도 재밌게 만드신다는 점이었다. 이야기도 잘 하셨지만 모두의 이야기를 물어보셨고 귀 기울여 들으셨다. 그래서 번개 저녁이나 회식이 잡히면 나는 가능한 가려했다. 사실 거의 손 들고 갔다. 회식 자리에서 어른들은 주로 막걸리를 좋아하셨는데 결국 회식의 끝은 소맥이기에 섞어마시는 게 염려되어도 이 자리가 좋아서 늘 넙죽 받아 마셨다. 맛있는 막걸리. 즐거운 회식자리(이게 얼마나 존재하기 어려운 건지 온라인 게임인들은 알 거다). 회식이 늦게 끝나도 집이 가까워 걸어가면 금방이었는데 부장은 택시타고 가라고 꼭 소소하게 용돈을 주셨다. 참.
지금 회사를 입사하기 위해선 얼마 간의 실무 전형을 거쳐야했다. 당시 부장은 무급 휴가로 그 기간을 기꺼이 빼주셨다. 이후 최종합격을 해 퇴사했을 때 축하주를 사주셨다. 그리고 퇴사 후에도 축하 밥을 사주셨다. 잘 돼서 나간 건데도 이 곳에서는 참 아쉬운 이별들이었다. (그로부터 2년 뒤 시상식 자리에서 어쩌다 부장을 뵙게 되어 악수도 나눴는데...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D는 나를 모르는 운동선수다. 그래도 그에게 감사하다. 당시 그는 세계 랭킹 1위임에도 소속 협회와 큰 갈등을 빚고 있었고 무릎도 부상당한 상태였다. 이 상태로 올림픽 결승에 올랐다. 설사 여기서 진다 해도 온갖 탓을 돌릴 곳이 많았고 국민들도 그런 그를 이해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는 당당히 금메달을 땄다. 우승이 확정된 순간 아픈 무릎을 땅에 닿게 꿇고는 오래도록 포효했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면서 길에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의 이 쾌거 순간은 강한 동기부여가 됐다. 너무 멋지고. 나도 저러고 싶다는.
간절히 바라던 꿈을 이룬 순간. 그래 그런 순간을 꼭 누리고 싶었다. 내가 바라는 것들, 어떤 고난이 있어도 꼭 내 손으로 이루고 싶었다.
그 길로 가는 과정에 감사한 분들이 참 많았다. 살다보면 이런 때도 있는 거다. 쓰면서 또 깨닫는다. 그래 인생지사 새옹지마다! ...
다음 글에선 최종 입사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글, 사진: 블루버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