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엉 울며 방어회에 위스키 스트레이트

덜 기름졌던 생선과 독한 술로 달래본 속

by블루버드

방어에 이제 막 기름이 차오르던 어느 가을날. 나는 가족들을 식탁에 앉혀두고 엉엉 울고 있었다. 샵에서 받은 정갈한 화장에 정갈한 묶음머리 차림을 한 채로. 한 번 엉 울고, 길게 썰린 방어회 한 점 집어 먹고, 생강절임이나 무순도 조금 먹고, 잭다니엘을 위스키잔에 따라서 스트레이트로 막 마셨다. "나쁜 놈들... 나쁜 놈들..." 하면서 울었다. 부모님은 처음엔 위로해 주다가 내 울음이 자꾸 격해지자 점점 황당해하셨다. "야 누가 보면 떨어진 줄 알겠어. 그만 울지?" 거듭 황당해하시며 방어회 한 점. 방어는 아직 기름이 꽉 들어차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때부터 먹음직했다.

이미지: ChatGPT

이날 오전 나는 한 대형 언론사의 최종면접을 봤다. 내가 그동안 스스로를 '긴장을 안 하는 사람'이라고 속여왔다는 걸 이때 깨달았다. 나는 엄청나게 긴장하는 겁보였고 그래서 그런 거짓말도 내게 해 왔던 거였다. 면접장에 들어가기 전 대기하는데 너무 긴장돼서 기절할 것만 같았다. 그냥 차라리 기절하고만 싶었다. 같이 면접 본 친구들도 비슷했겠지. 그때 한 명은 대기실에서 목캔디를 건네주었고 한 명은 계속 다리를 덜덜덜 떨었으며 다른 한 명은 면접장에서 자꾸만 ㅋㅋ 웃으며 대답을 해 인상 깊었다. 캔디야 덜덜아 그리고 킬킬아 보고 있느냐.


꼬리 질문도 꽤 받고 면접관 웃음도 이끌어내고, 전체적으로 보면 분위기 좋은 최종면접이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엄청나게 망했다고 생각했다. 살면서 그렇게 말을 절어본 적은 처음이었다. 벌벌 떨리는 두 손을 맞잡고 간신히 대답들을 해 나갔다. 이런 사람 많이 봐왔을 연륜의 면접관들 앞에서 최대한 신뢰감을 주려고 노력했지만 몸 안에 피가 모두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나 자신을 담아 대답을 할 때는 눈물까지 날 것 같았다. 진심이고 간절해서 그랬다. 이만큼 나는 이 회사 입사를 원했다. 10년 전부터 좋아하던 첫사랑이자 짝사랑 회사였다. 이미 이 회사 공채에 도전했다 떨어진 경험도 있었다. 그때 낙방의 슬픔도 잭다니엘을 스트레이트로 달랬었지 아마.


결론적을 말하자면 이 회사에 붙었다. 내 회사가 돼 엄청나게 기뻤다. 다만 오늘 하려는 이야기는 그러한 기쁨이 아닌 언론사 채용 과정 자체에서 나타난 문제점의 일부 조각이다.



다른 큰 언론사들도 그렇듯 서류 접수부터 최종 면접까지 전체 공채 과정에 몇 달 걸렸다. 한 손으로 셀 수 없는 만큼의 전형 단계를 거쳤다. 그 바짝 긴장해 살던 수개월 동안 거의 미쳐있었던 것 같다. 채용 과정이 긴 것 자체가 회사들이 지원자들에게 손쉽게 하는 갑질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튼 이 모든 게 다 끝나자마자 한 순간에 긴장상태가 풀리면서 억눌러왔던 감정과 서러움이 폭발했다.


당시 나는 자기소개서에서부터 참사를 취재하고 재발을 막는 기자가 되고 싶다고 밝혔다. 세월호 세대, 피해 학생들과 동갑이면서 이태원 참사 당시 같은 장소에 있다가 시간 차를 두고 간신히 살아 나왔기 때문이다. 슬롯에게도 나에게도 가장 힘든 일들에 자꾸 마음이 갔다.


공채 과정 중엔 많은 면접을 봐야 했는데 한 중간 면접 때의 기억이다. 면접관은 내게 이태원 참사 당시로 돌아간다면 가장 먼저 무얼 하겠냐고 물었다. 고심해서 대답을 하려는데 나도 모르게 울음이 섞여서 염소소리 같은 목소리가 나왔다. 안에 남은 트라우마를 눈치챈 면접관은 재빨리 추가 질문을 이어갔다. 거기서 어떤 점을 바꿀 수 있었겠느냐. 본인이 그 현장에 다시 서 있다고 생각하면 어떤 게 다시 보이겠느냐... 자꾸 그 숨이 막히고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던 골목으로 나를 돌려보냈다. 무서웠다. 참사 생존자가 아닌 바카라임자가 돼 당연하다는 듯 질바카라을 받는 것 같았다.


아직도 큰 상처로 남았다. 기자의 시선을 갖췄는지 기자로서 자질이 있는지 보려고 한 질문이라고 머리로 이해한다. 하지만 기자의 자질이란 걸 평가받기 전에 같은 동료 시민으로 존중받았다면... 우리 회사 들어오려 하니 어디까지 견디나 보겠다, 이런 생각보다 그런 마음이 앞섰다면 어떠셨을까라는 아쉬움이 크다. 과연 좋은 시민은 좋은 기자와 배척점에 있는 걸까. 잘 모르겠다. 적어도 '이 질문이 힘들면 대답할 수 있는 만큼 대답해 달라', 다른 면접장에선 그렇게 물어봐왔다. 그러고 나서, 지금도 심적으로 힘들어 보이는데 관련 취재 할 수 있겠냐, 참사취재 하고 싶다 하지 않았냐, 앞으로도 이런 일 발생하면 개인적으로 어떻게 대처하겠냐고 물었어야 하지 않을까. 속을 긁어 피 다 낸 다음에 싸늘하게 찬물 얹듯 묻는 게 아니라...


간절했고 잘 보여야만 했던 나는 압박을 감내했고 그것 외의 방법은 없었다. 어찌어찌 완성형 문장으로 모두 대답했다. 내 생각 아쉬움 없이 전했고 용케 울지도 않았다. 내 대답에 누군가는 여전히 뚱했고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그때 면접은 끝났지만 충격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이후 업계에서 늘 느껴온 아쉬운 점이 잘 드러난 일화라고 생각한다. 어떨 땐 일로서 성과가 개인의 인생과 감정과 성장과 건강보다 우선시 되는 문화가 버젓이 드러날 때가 있고... 또 그걸 감당하며 일하는 게 맞다는 인식이 자꾸 아래로도 잘못 흐르고 있다고 느껴진다. 막상 누군가 크게 힘들어할 땐 모두 동료로서 힘이 되어 주려 하지만 조직문화라는 큰 틀이 자꾸만 그렇게 보강된단 거다. 그런 속에서 어떠어떠한 기자가 돼야 한단 이유로 스스로 나를 더 해칠 생각은 지원자 때나 지금이나 추호도 없다.


어쨌든 그러고 나선 최종합격을 소식을 들었고 과정에서의 문제의식과는 별개로 살면서 가장 안정적이고 행복했던 호시절이 잠시 펼쳐졌다. 그때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다뤄보겠다. 아직 내공이 꽉 들어차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때부터 일함직 하던 스물일곱 살(철저하게 만 나이)이었다. 기름지기보다는 담백했던 새삥.





글: 블루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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