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주제를 알라
주제 파악이란 무엇인가. 너 자신을 알라는, 메타인지를 잘하고 살라는 뜻이다. 본인이 어떤 사람인지 객관적이고도 슬롯적으로 적절하게 판단하고 행동하란 뜻이다. 그럼 그 판단은 누가 하는가. 스스로 한다. 때문에 '주제 파악 하라'는 류의 핀잔을 타인에게 들었을 때는 지금 그가 판단하는 나는 내 생각보다 더 작다는 뜻이 테다. 그것 역시 그 사람의 생각. 그러므로 주제 파악은, 여러 겸손한 태도를 거쳐 판단하던 끝에 결국엔 알아서 맘대로 하면 된다. 어차피 객관이란 불가능하고 주관으로 말이다.
필자는 어떤 사람인가. 먹는 게 중요하고 잘 먹는 사람이다. 롯데리아 데리버거 기준 햄최3이다. 자장면 곱빼기는 너끈한 성인여자이니 최소 중식가는 되겠다. 그런 나는 다만 입이 짧다. 과자 한 봉지를 한 번에 다 먹어본 일이 거의 없다(호르몬이 시켰을 때 빼고). 내 기준 프링글스 한 통 다 먹는 일은 놀라운 일이다. 프링글스가 양이 많아서가 아니고 짜고 물려서. 그런 내가 앉은자리에서 예감 치즈그라탕맛 한 상자, 그러니까 두 봉지 들어있는 그 제품 하나를 다 때려 먹은 기억이 딱 한번 있다. 호르몬 영향은 없었고 분노의 군것질이었다.
이전 글에서 언급한 베이커리 카페 아르바이트 시절. 하루는 퇴근하고 한 중소 언론사에서 면접을 봤다. 앞서 두 번이나 퇴사하고도 정신 못 차리고 이상한 언론사 문을 두드린 건 아니고 이곳에서 객원기자를 해 생활비를 더 충당하려 했다. 기사 쓰면서 돈 벌면서 언론고시 공부하면 일석이조니까. 믿음직한 친구가 몇 다리 건너 소개해준 자리였다. 일은 프리랜서 개념이었고 하루에 몇 건 이상 기사를 쓰면 건 당 페이를 준다 했다. 객원기자 일은 이전에도 해본 적이 있었다. 아무리 새로운 분야를 맡게 돼도 정기자처럼 출입처를 관리해야 하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부담도 덜할 것 같았다. 사실 그 자리는 내 것이라고 이미 생각하고 갔다.
큰 오피스텔 건물에 사무실로 임대한 한 칸. 호수 옆에 언론사 간판이 붙어있었다. 중소도 아니고 사실 소소 언론사. 들어가 보니 대표 자리만 있었고 그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자기 자리 앞에 의자를 놔주곤 차를 한잔 대접해 주었다. 감사히 마시면서, 어떤 면접이 이어지려나, 긴장은 안 됐고 예의만 갖추고 앉아 있었다. 그 대표는 내가 미리 보내준 자기소개서를 다시 찬찬히 읽었다. 그러다 대뜸 자신의 모니터 화면을 나도 볼 수 있도록 90도 돌렸다.
"내가 피드백을 좀 해줄까 하는데."
굳이요,라고 할 순 없는 노릇. 얼떨결에 알겠다 했더니 그 피드백이란 게 시작됐다. 자기소개서가 너무나 진부하댔다. 소재로 흐름도 어디서 본 듯한, 그저 'one of them' 이란다. 입사 목표가 어디냐고 했다. 몇 군데 말해주었다. 그는 내게 핀잔을 주었다. 그런 곳을 목표로 하는 게 말이 되냐고. 아무나 가는 줄 아느냐, 그니까 내 주제에 안 맞는단 소리였다. 다시 자소서로 넘어와선 이렇게 써서는 대형 언론사는커녕 어디도 붙기 힘들다고 했다.
틀렸다. 그 자기소개서는 대형 언론사들에서 합격시켜 준 서류에서 일부 내용만 짜깁기해 만든 것이었다... 그대에게는 범죄심리를 공부하고 아르바이트를 서른 번 해보고 언론사 두 곳의 정기자 자리를 무르고 나온 한 청춘의 지나온 삶이 뻔한가. 뭐 본인 생각이고 다른 지원자들 틈에선 상대적으로 그럴 수도 있지 싶었다. 그럼 내 자기소개서 서술 방식이 아직도 그렇게 많이 부족한가 싶었는데.
"이 글 한번 읽어봐."
대표는 느닷없이 남의 글 한 토막을 화면에 띄워 보여줬다. 어떤 아주 형편없는 자기소개서였다. 간신히 파악한 내용으로는 한 외고에서 학생부에 지원하는 고등학생의 자기소개서였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여기 왜 들어오고 싶어하는지, 이 조직이 어떤 일을 하는 곳으로 파악하고 있는지, 자신은 그 안에서 어떻게 함께 성장할 수 있는지 아무것도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문장은 이런 식이었다. '아름다운 정원 하나를 이루기 위해선 다양한 꽃들과 나무들과 나비들이 어우러지고 각각의 향기와 형태와 날갯짓이 조화를 이루듯 학생부 또한 여러 학생들이 각자의 색깔을 가지고 모여 어쩌고저쩌고...' 이런 류의 수사적인 문장들이 끊기지도 않고 숨넘어가게 나열돼 있었다.
"어떤 것 같니."
"와..."
이 끔찍한 글을 마주하곤 말 그대로 입을 막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뭐라고 평을 해야 하나. 그냥 애가 쓴 글이니까 일단 가능성부터 말해줘야 할까. 대답을 바라는 대표 앞에서 말을 고르는 시간이 다소 길어지고 있었는데,
"글은 이렇게 쓰는 거야. 자기소개서는, 블루버드씨. 소설이라고. 소설을 쓰라고. 어떻게? 잘."
이 새끼가 뭐래? 너무 놀라서 쳐다봤다. 대표의 얼굴은 놀랍게도 뿌듯함과 행복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딸을 보듯 그 글에서 눈을 떼질 못했다. 입꼬리에서 시작된 미소가 볼을 타고 관자놀이를 타고 눈웃음의 꼬리까지 연결돼 있었다. 표정관리가 안 됐는데 다행히 입을 계속 가린 상태였다.
"우리 딸이 이번에 학생회에 지원하면서 쓴 글인데 어쩌고저쩌고...."
밑도 끝도 없이 시작된 딸 자랑. 이 미친놈. 엄청난 모멸감이 들었다. 내가 왜 이딴 시간을 보내고 있지. 말을 겨우 끊고는, 그래서 따님이 학생회 붙었냐고 물어봤다. 아쉽게도 떨어졌단다. 기존 부원들이 친한 친구들만 뽑아줘서. 아, 네...
"샌드위치 가게에서 일한다고 했지. 기자가 되고 싶다면 글을 써야지. 왜 그런 일을 해? 여기 와서 기사 써."
내가 너를 써줄게. 외고 학생회에서 탈락시킨 자소서보다도 못한 네 자소서를 보고도 내가 그런 아량을 베풀어줄게. 몸을 움직이는 아르바이트 따위 하는 것보다 대단한 이 기회를 내가 네게 줄게. 우리 소소 언론사에서 일하는 건 네게도 큰 영광이고 기회다. 이런 의중의 말들이 이어졌다.
그냥 그 자리에서, 생각보다 페이가 적어 못 할 것 같다고 말하고 나왔다. 그는 지금 아르바이트 시급보다 높은 거 아니냐며 내 대답에 굉장히 의아해했다. 됐고. 끝까지 정중한 척하고 사무실을 빠져나왔던 것 같다.
구둣발을 쿵쾅거리며 마구 걸었다. 오염된 귓속에 헤비메탈을 꽂아 넣곤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X발. X발 새끼. 내가 만만해. 아르바이트하는 백수라고 얕봐. 내 글이 외고 학생회 탈락한 고삐리보다 못해. 너 뭐 돼. 되지도 않는 게 처 꼴값은. X발 새끼. 너까짓 거 만나려고 정장 차려입고 구두 신고 단칸 사무실에서 예의 차린 내가 더 대단한 사람이야.
땀을 뻘뻘 흘리며 걷다가 친구가 일하고 있는 사무실 건물에 다다랐다. 이날 친구와 저녁약속이 있었고 3시간이나 남아있었지만 이딴 기분으론 그 사이 아무것도 해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냥 편의점에 들어갔다. 평소 좋아하던 예감 치즈그라탕맛이 보이길래 바로 샀다. 그리곤 친구 사무실 건물 1층 로비에 앉아 예감을 우적우적 씹어먹었다. 짠지, 고소한 지, 바삭한지.
그렇게 한 통 다 까먹고 나니 머릿속의 욕지거리는 어느 정도 사라졌다. 다시 편의점에 가서 게토레이 600ml짜리 한 병을 샀다. 서너 번에 걸쳐 벌컥벌컥 마셨다. 불타던 속도 좀 가라앉았다. 마지막으로 또 편의점에 가서 풍선껌을 한 통 샀다. 두 개씩 한 번에 짝짝 씹고 풍선도 불었다.
그러다 보니 친구가 좀 일찍 퇴근해 나왔다. 우린 근처 고깃집에 가서 고기를 많이 시켜 먹었고 소맥도 마셨고 후식 볶음밥도 해 먹었다. 그 소소 언론사 대표에 대한 분노는 다행히 날을 넘어서까지 계속되진 않았다. 분노의 저작운동 덕인가.
백수였고 쉬었음 청년이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이런 누추한 대접을 받아선 안 된다는 것을. 이게 내가 한 주제 파악이었다. 그딴 놈에게 굽신거리며 글 좀 써서 돈 버는 것보다 케이크 매대 꽉꽉 채우고 샌드위치 만들며 서서 일하는 게 훨씬 훨씬 값진 노동이라는 것도 물론 알고 있었다.
자랑스러웠던 기억이다. 잘 한 선택임이 틀림없었다. 과거의 나야 정말 잘 했구나? 지금의 나를 포함한 청년들에게 당부하고 싶다. 주제파악 잘하고 살자. 스스로가 얼마나 귀한지 잊지 말고 살자. 나의 위치가, 나의 연봉이, 어떤 어른들이 내게 하는 대접이 꼭 나의 가치를 결정짓는 게 아니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갈수록 주제 파악 더더 잘하면서 살자. 우리는 더불어 잘 좀 살자.
글: 블루버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