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은 먹고 여행해야지
보글보글 물 끓는 소리가 새벽 공기 사이로 조용히 퍼진다. 손에 익지 않은 냄비 뚜껑을 열고 여행짐 속에서 꺼내 온 고운 쌀가루를 끓는 물에 넣었다. 봉지에 유기농이라고 적힌 아주 고운 쌀가루다. 내가 먹을 거였다면 굳이 이런 걸 사지는 않았을 것이다. 평소에는 별 걸 다 먹는 사람이 쌀만 좋은 걸 먹어서는 대세에 지장이 있을 리 없다는 사실을 알고도 남을 나이가 되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냄비 안에서 부지런히 익어가고 있는 것은 태어난 지 6개월 된 우리 둘째에게 먹일 밥이다. 따로 간은 필요 없다. 이유식을 얼마 전에 시작한 아이는 아직 달달 짭조름한 첨가물의 세계에 대해 알지 못한다.
쌀미음이 끓어 넘치거나 눌어붙지 않도록 냄비 바닥을, 역시 손에 익지 않은 국자로 살살 젓다가 작은 냉장고를 열어 계란말이를 꺼냈다. 직접 만든 것은 아니고 지난 저녁 장을 볼 때 아침 식사를 염두에 두고 사 온 것이다. 싱크대 안쪽에 보관되어 있을 프라이팬을 꺼낼까 하다 전자레인지가 눈에 들어오길래 오늘 아침은 그걸 써보기로 한다. 어쨌든 나도 여행 중인데 좀 쉽게 갈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러고 싶은 마음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가만있자, 접시가 어디 있더라? 분명 어제 체크인을 할 때 부엌 싱크대 구석구석을 다 열어 보면서 접시는 여기, 수저는 여기, 조리도구는 저기, 모두 확인했건만 아무래도 내 집이 아니다 보니 뭐가 어디에 있는지 단번에 기억이 나지 않아 조금 헤맸다.
찾았다! 적당한 크기의 납작한 접시 하나를 꺼내 그 위에 편의점에서 사 온 계란말이를 조심스레 옮겨 담았다. 이렇게 해 두니 마치 내가 새벽부터 부지런하게 직접 요리한 것처럼 보이는걸? 내가 만들었다고 할까? 아 맞다, 같이 샀지. 그 사이 쌀미음이 완성되었는지 냄비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가스레인지의 불을 서둘러 끄고 혹시나 식는 과정에서 내용물이 냄비 바닥에 눌어붙으면 안 되니 다시 한번 국자로 휘적휘적 저어 주고 나면 이제는 주전자를 꺼낼 차례다.
한쪽 벽면을 차지한 창을 통해 날이 서서히 밝아오는 게 전해진다. 부엌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싱크대 위 작은 조명빛만이 의지가 되었는데 이제는 그것에서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깜빡할 정도로 창문으로 스며드는 햇살이 세력을 넓혀가고 있다.
사실, 낯선 집에서 꼭두새벽부터 아침을 준비하는 일이 아주 즐겁지는 않다. 솔직히 말하자면 어두운 공간에 처음으로 불을 켜고 들어설 때는 혹시 거기 누가 서 있지는 않을까라는 생각에 조금 무섭기도 하다. 어릴 적에 귀신 이야기를 너무 많이 읽었나? 다행히 이제껏 단 한 번도 귀신이든 낯선 사람이든 그 누구도 새벽의 부엌에서 나를 기다린 적은 없었다.
주전자를 꺼낸 건 나와 남편이 마실 차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보통 커피를 마시며 하루를 시작하지만 호스트가 선물해 준 간식 중에 녹차가 있길래 오늘은 그걸 한 번 마셔보기로 했다. 또다시 엉뚱한 서랍을 몇 번 열었다 닫은 끝에 머그컵 네 개를 찾아내 그중 두 개엔 끓인 물을 부은 다음 녹차 티백을 하나씩 넣었다. 다른 하나에는 냉장고에서 꺼낸 시원한 우유를 부었다. 우유를 너무나도 좋아해 밀크보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던 첫째 아이를 위한 음료다. 마지막 컵에는 아까 끓여 둔 둘째의 이유식을 담았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더 늦기 전에 곤하게 자고 있을 가족들을 깨우기로 했다. 벽도, 천장도, 그리고 다다미가 깔려 있는 바닥도 모두 나무로 만들어진 이 집은 내가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조그맣게 삐걱삐걱 소리를 낸다. 분명 무생물인데 이럴 땐 숨이 붙어 있는 생물 같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며, 복도 옆 미닫이 문 너머에 있는 침실로 향했다. 방에는 두툼한 요가 깔려 있고 그 위에는 구름처럼 폭신폭신한 이불을 목까지 덮은 나의 가족들이 있을 것이다.
역시나, 예상대로 세 사람이 자고 있, 어? 아니네? 아직까지 꿈나라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은 첫째 아이 하나뿐인 것 같다. 안경을 쓰고 있는 걸로 봐서 남편은 새벽에 일어나 일도 하고 오늘의 일정도 점검하다가 잠깐 다시 누운듯하고 그런 그 너머로 아주 짧고 오동통한 다리 두 개와 팔 두 개가 천장을 향해 분수처럼 솟았다 사라지고 다시 솟았다 또 사라지는 것을 보니 둘째 아이도 이미 깨어나 놀고 있는 게 분명했다. 가까이 다가가니 아이가 나를 보며 활짝 웃는다. 입까지 크게 벌리고 반가운 티를 내는 게 아무래도 지난밤 푹 잘 잔 것 같다. 그 사랑스러운 모습을 더 보고 싶어 나도 잠깐 도로 누울까 하다가 기왕 준비해 놓은 아침 식사가 식을 걱정에 어서 일어나라며 가족들을 깨웠다.
쌀미음과 계란말이, 녹차와 우유 곁에 어제 장을 볼 때 샀던 음식 몇 개와 음료수가 함께 놓였다. 부엌에 식탁이 있긴 하지만 아침 식사는 좌식 테이블이 있는 거실에서 하기로 했다. 우리 넷이 함께 즐기는, 이번 여행의 첫 번째 아침 식사다.
한국의 집에서든 낯선 여행지에서든 아침은 늘 처음이 가장 힘들다. 식사 준비를 하러 부엌에 들어가는 것이 가장 힘들고 차려진 밥을 앞에 두고도 첫 술을 뜨는 게 가장 힘들다. 아침을 먹는 대신 더 자겠다던 첫째 아이는 한 입, 두 입 먹다 보니 그제야 잠에서 깨는지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사실 그 애는 지금 컵라면을 먹고 있다. 평소 같았으면 아침 식사로는 절대 허락하지 않았을 메뉴지만 여행을 왔으니 특별히 먹게 해 준 것이었다. 스스로 고른 라면에 속은 촉촉하고 겉은 잘 익은 반숙계란을 곁들여 우물우물 씹는 얼굴에 기쁨이 환하게 퍼진다. 맞은편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머그잔을 손에 쥔 남편이 그 안에 든 쌀미음을 작은 숟가락으로 퍼 둘째에게 먹이고 있다. 아직은 숟가락보다 젖병이 더 익숙한 작은 입에서는 아빠가 넣어 준 쌀미음이 반쯤은 도로 나오는 것만 같다. 남편의 고군분투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나는 바통을 넘겨받아 둘째에게 젖병을 물렸다.
언젠가 남편은 "여행에서 가장 기대되는 것 중 하나는 호텔 조식."이라고 말했다. 솔직히 나도 그렇다. 푹 자고 일어나 부스스한 모습 그대로, 예의상 얼굴에 물만 조금 묻히고 식당으로 내려가 자리를 안내받는다. 그리곤 빈 접시 하나 들고 이리저리 유람하듯 돌아다니며 이거 하나 먹어 볼까 저것도 하나 먹어 볼까, 마음 내키는 대로 잔뜩 집어와 신나게 맛보는 기분. 자주 접하지 못하는 요리뿐 아니라 평소에 늘 먹던 메뉴도 근사한 곳에서 남이 만들어주면 왜 더 맛있게 느껴지는지.
하지만 그렇게 호텔에서 즐기는 아침을 좋아하던 우리 부부도 두 아이의 부모가 된 이후론 생각이 조금 바뀐 것 같다. 호텔 조식에 비하면 내가 준비한 아침 식사는 좋게 말하면 소박하고 나쁘게 말하면 참 보잘것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현실은 후자에 가깝다. 그럴지라도 우리 가족끼리 한 공간에 모여 먹는 아침의 맛은 호텔의 화려한 식사에 비할 바 아니다.
남 신경 쓸 일 없으니 얼굴에 물을 묻히는 수고조차 안 해도 된다. 잠자리에서 일어난 그 모습 그대로 밥상 앞으로 직행하면 끝. 밥을 먹던 아이들이 갑자기 일어나 신나게 노래를 불러도 데굴데굴 바닥을 구르며 별 짓을 다해도 주변 눈치 볼 필요도 없다. 여행지에서는 보통 하루의 마지막 코스로 마트나 편의점을 방문하곤 하는데 거기에서 다음 날 먹을 아침거리를 골라 사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지. 우리가 고심해서 고른 메뉴를 우리만의 공간에서 우리만의 속도로 먹는 시간. 그 은근한 매력을 떠올리다 보니 새벽의 수고스러움은 눈 녹듯 사라져 버린다.
아마도 나는 다음 여행에서도 낯선 부엌에서 새벽이 맞이하며 기꺼이 아침밥을 지을 것이다. 남편과 아이들도 처음엔 포근한 이불을 벗어나기 힘들 테지만 따끈한 아침밥을 한 입 두 입 먹다 보면 여행할 힘을 얻겠지? 그러니 어서 일어나. 밥은 먹고 여행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