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게 낡은 것이 전하는 다정함

우리의 첫 일본 옛집을 떠나오며

by여행하는가족

6·25 전쟁 즈음 태어난 부모님 세대만큼은 아니라 하더라도 내 어린 시절의 물질적 기억은 요즘에 비하면 풍요롭지 않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연필을 더 이상 손으로 잡기 힘들 정도로 짧아질 때까지 썼고 기능을 완전히 잃은 물건이 아니라면 고쳐 쓰거나 약간의 불편함 정도는 감수하며 계속 사용했다. 우리 집은 3대가 한 지붕 밑에서 함께 살았는데 조부모님과 부모님 모두 필요할 때는 흔쾌히 지갑을 열었고 형편이 어려운 분들을 돕는 데도 인색하지 않았지만 평소에는 검소한 태도로 평생을 산 어른들이셨다. 그분들의 보살핌 덕분에 내 고향집에는 쓰임을 받은 긴 세월이 무색하리만치 반질반질 윤이 나는 물건들이 많았다. 오랫동안 사랑받은 사물들과 같이 산다는 것, 그것은 같은 공간에 머무는 사람들까지도 귀중한 존재로 대접받는듯한 기분이 들게 만든다.


이런 기억 덕분인지 나는 늘 오래된 것들에 마음이 갔다. 손때 묻은 물건을 볼 때면 그것을 사용했던 사람들의 삶을 상상하기도 했다. 대게 그런 상상은 참 따뜻한 것이어서 내가 만들어낸 이야기에 몰입한 나머지 그 대상에 대한 애정을 키우는 것도 예사였다.


오래된 물건에 끌리는 마음은 역사 깊은 장소들을 향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일본의 독창적인 풍경을 지키고 싶어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숙소를 찾는 모든 분들이 고전적인 일본 생활을 느끼고 경험하기를 희망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일본의 오래된 주택들을 개조하고 수백 년 전 이 지역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이유입니다.>


방은 몇 개고 최대 투숙인원은 몇 명, 욕실과 부엌에는 어떤 비품이 갖춰져 있으며 체크인과 체크아웃은 언제 해야 하는지에 대한 무미건조한 정보들 사이에서 이 문장들을 만났을 때, 비로소 사람의 숨결을 마주하는 것만 같아 반가웠다. 나는 궁금해졌다. 이런 문장으로 소개된 집은 어떤 곳일까? 이런 글을 쓴 이는 어떤 삶을 사는 사람일까?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따라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국도로 접어든 우리 가족은 점점 더 좁은 도로를 거쳐 작은 마을에 다다라서야 마침내 차를 멈췄다. 집은 포장도로에서 살짝 비켜난 골목 끝에 있었다. 골목을 통과하는 이들을 위한 배려였을까, 아니면 게스트들을 향한 환영의 의미였을까, 자갈이 깔린 길 가운데엔 마치 레드카펫처럼 나무판이 깔려 있었다. 사람 걸으라고 애써 깔아 놓은 나무길을 요리조리 피해 자그락자그락 자갈길을 신나게 달려간 첫째 아이가 며칠 동안 우리의 보금자리가 되어줄 집 앞에 서더니 와! 소리치며 좋아한다. 그 사이 보관함에서 열쇠를 찾아낸 나는 도어록의 편리함에 길들여진 탓에 작은 열쇠를 열쇠 구멍에 몇 번이나 넣었다 뺐다 허둥대다가 현관문을 열었다. 이건 또 얼마만의 미닫이 문인가. 문을 열고 들어서니 기분 좋은 나무 냄새가 와락 안겨온다.


일본의 전통미를 간직한 목조 주택에서 보낸 며칠, 우리 가족은 과거의 공기가 스며든 공간에서 현재를 살았다. 밟을 때마다 우리에게 말을 걸듯 삐걱거리는 마루 위를 걸어 다녔고 쇼지 너머 비쳐드는 불빛의 은은한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밤이 되면 곱게 개어져 있던 요를 꺼내 안방 바닥이 꽉 차도록 깔고 온 가족이 그 위에서 뒹굴뒹굴 굴러다니며 게으른 시간을 즐겼다. 그러다가 눈꺼풀이 무겁게 느껴지는 시간이 되면 도톰한 이불을 목까지 끌어 덮고 하나 둘 잠을 청했다. 내가 둘째와 노는 동안 우리 집 두 남자는 목욕을 하기도 했다. 남편은 어느새 나와 덩치가 비슷해진 아이와 좁고 깊은 욕조에 함께 들어가 반신욕을 했는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욕실 밖으로까지 새어 나와 그것을 엿듣는 나의 마음에까지 다정한 온기를 전해주었다. 장식은 과하지 않았지만 빛과 형태만으로 이미 아름다웠던 그 집은 지난 시간으로의 짧은 여행으로 날 이끌기도 했다. 나는 떠나온 고향집과 이제는 세상을 떠난 조부모를, 그리고 언제 이렇게 되었나 싶게 연세가 들어버린 나의 부모를 떠올렸다.


호스트인 이마이 씨는 가와구치코로 이주한 후 가와구치코와 후지산, 그리고 숙소가 있는 동네의 역사와 문화를 알게 되었고 더 많은 이들이 그 매력을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숙박업을 시작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오래된 일본 가옥의 매력은 세부적인 것을 자세히 살펴볼수록 드러나며 장인의 기술과 목재의 따스함을 이 숙소에 머무는 이들이 눈과 피부로 직접 느끼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서로 얼굴을 마주 본 적은 없지만 이런 이야기를 나누며 왠지 나는 이마이 씨와 조금 가까워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저희 지역을 방문하셔서 사계절 내내 문화와 공기, 풍경을 느껴보시면 좋겠습니다."


이마이 씨의 이야기를 뒤로 하고 떠나오는 길, 숙소의 문은 첫째 아이가 잠갔다. 몇 번 해봤다고 이제 거침없이 열쇠를 구멍에 넣고 단번에 잠그는 솜씨를 보며 조금 불편하더라도 앞으로도 이런 경험을 우리 아이들에게 더 자주 하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곱게 낡은 물건들의 아름다움을, 그것을 지켜나가는 일의 가치를 아이들도 자연스레 깨닫게 되기를 바라며, 이번에는 나도 나무가 아닌 자갈길을 밟아가며 우리의 첫 일본 옛집을 떠나왔다.


우리 가족의 첫 일본 옛집 ©여행하는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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