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은 잘못이 없다
'위층에서 창문을 열고 밤에 후지산을 감상했습니다.
무엇을 더 바랄 수 있을까요?'
이 집을 빌리기로 결심한 것은 창문 너머로 후지산이 보인다는 후기를 읽고 나서였다.
여행을 준비할 때면 늘 숙소 선택에 공을 들인다. 전체 경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금액이 드는 일이기도 하고 여행 전반의 만족도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부분이니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마음에 드는 곳을 찾으면 이전 투숙객들이 남긴 후기까지 미련할 정도로 꼼꼼하게 읽곤 하는데 이 집에서 후지산을 봤다는 이야기는 한 두 명이 적어 놓은 게 아니었다.
후지산은 일본을 대표하는 명산이자 국가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곳이다. 혼슈 중앙부, 시즈오카현과 야마나시현의 경계에 자리한 이 산은 완만한 굴곡을 이루며 옆으로 펑퍼짐하게 퍼진 모습 때문에 혼자만 뚝 떼어 놓고 보면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높이가 해발 3,776미터에 이른다고 한다. 한반도에서 가장 높다는 백두산(2,744미터)과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한라산(1,947미터)과 비교해 보면 얼마나 거대한지 쉽게 가늠할 수 있다. 시야가 좋은 날에는 100킬로미터가량 떨어진 도쿄에서까지 보인다고 하니 많은 것들을 쉽게 파악하기 어려웠던 과거에는 얼마나 신비하고도 범접하기 어려운 존재처럼 느껴졌을까. 일본인들이 후지산을 신성시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이십 대 때부터 일본을 그렇게나 많이 여행했으면서도 나는 후지산을 보러 다녀올 생각은 단 한 번도 못했다. 유명 관광지는 가도 좋지만 안 가도 그만인 성격 탓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남편이 이야기를 꺼내준 덕분에 드디어 나도 직접 보게 되는구나!
관심도 없었는데 보러 가기로 결정하고 나니 마치 오래전부터 꿈꿔 오던 일을 앞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의 하루는 후지산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간 김에 더 많이, 더 오래 보고 싶은 마음에 아예 후지산 인근 마을에서 숙소를 찾기로 했다. 그렇게 만난 곳이 바로 이 집이었다. 그렇지. 집에서 후지산이 보인다는데 여기에서 뭔가를 더 바란다면 그건 욕심이지.
진짜로 욕심을 부린 것은 아니었지만 장점은 더 있었다. 자동차로 5분만 달리면 호수를 배경으로 그림처럼 펼쳐진 후지산을 감상할 수 있는 가와구치코에 닿고 내친김에 1시간 남짓을 더 달려가면 진짜 후지산에 도착하는 위치에 자리 잡은 집이었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는 가와구치 아사마 신사라는 유서 깊은 장소도 있는데 후지산 세계문화유산군에 포함되어 있는 이 신사는 서기 864년 후지산의 대분화 이후 화산을 진정시키기 위해 이듬해에 지어진 곳이라 했다. 우리가 머물 동네가 후지산을 위해 만들어진 신사 주변에 생겨난 마을이라는 이야기가 신비감을 더해 여행길에 오른 나의 마음을 기대로 가득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막상 숙소에 도착해서 보니 후지산이 보이지 않았다. 눈을 아주 가늘게 뜨고 힘을 주면 일본인들의 영산이라는 그것이, 아니, 그것의 윤곽이 희미하게 보이는 것도 같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아무것도 안보였다. 나는 숙소를 예약한 사이트에 들어가 다시 한번 후기를 읽어보았다. 분명 이곳에 머물렀던 이들이 후지산을 봤다고, 너무 좋았다고 남긴 글들이 눈에 들어왔다. 남들은 다 보였다는데 왜 내 눈에는 안 보일까. 속상했지만 사실 누구를 탓할 일은 아니었다. 하늘에는 구름이 잔뜩 껴있었으니까.
그 커다란 산이 날이 흐리다고 설마 하니 이렇게까지 안 보일 줄은 몰랐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공기가 시야를 감쪽같이 막은 탓에 후지산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설 속에만 존재하는 산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아침엔 안 보였지만 오후가 되면 보이겠지, 오늘은 못 봤지만 내일은 볼 수 있지 않을까? 희망고문은 2박 3일 내내 지속되었다. 결국 우리는 후지산이 보인다던 집에서 후지산을 상상만 하다가 떠나오고 말았다.
하지만 집은 잘못이 없다. 집을 우리에게 빌려준 호스트도 잘못이 없다. 그렇다고 날씨 탓을 하기엔 결과는 바뀌는 게 없을 텐데 탓해 봤자 의미 없는 일이다. 막대한 피해를 주거나 받는 상황만 아니라면, 나는 내가 바꿀 수 없는 상황을 만났을 때 내 생각을 바꾸는 편이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날씨가 흐렸던 덕분에, 후지산을 못 본 덕분에, 우리는 이렇게 멋진 집을 더 자세히 살펴보며 즐길 기회를 얻었으니 다행이다. 그리고 이 집에 딱 한 번만 오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다음번에 후지산 근처로 여행을 올 때 같은 집을 다시 예약하면 되니까 숙소 찾을 시간을 아낄 수 있어 잘됐다. 비록 이번에는 인연이 닿지 않았지만 기다림 끝에 만나게 될 후지산은 더더욱 아름다울 테니 그 또한 좋지 아니한가.